3.
에른스트 공작가의 가주, 레오폴드 폰 에른스트 공작은 신혼여행을 떠난 이틀 뒤 의식불명이
되어 실려 왔다.
신혼여행지로 향하던 마차가 절벽으로 떨어졌고, 절벽 아래에서 죽은 마부와 숨만 붙어 있는
공작을 뒤따라가던 기사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샤가 눈을 떴을 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공작이 저택에 도착한 즉시 그녀는 지하 감옥에 끌려왔다.
“으….”
바닥은 딱딱했고,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나의 아버지가,”
그때 낮은 목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철창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죽는 것만 못하게 돌아오셨지.”
남자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달빛이 비치며 선명하게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반대했는데 결국.”
에른스트 가의 후계자, 알렌 폰 에른스트가 사샤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낀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지만, 손발을 감싼 족쇄가 그
녀를 옭아매었다.
“네 어머니를 만났을 때부터 공작께서 이상해지셨어.”
철컥,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묵직한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나의 아버지는 너희 때문에 저렇게 되셨다.”
“무슨 말씀이에요….”
알렌은 뚜벅뚜벅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가 점점 다가오자 사샤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벽에 고정된 쇠사슬이 단단하게
사샤를 붙잡았다.
“무슨 술수로 내 아버지를 유혹한 거지?”
“…대체 무슨 소리를…!”
그녀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 사고로 위장해서 공작의 유산을 노린 거였군.”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비뚜름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니야….”
사샤가 마구 도리질을 하자, 눈물방울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희 같은 여자들을 잘 알고 있어. 이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줄 아나?”
알렌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푸른 두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처음 느끼는 공포로 그녀의 온몸이 눈에 보일 만큼 떨려왔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웠어.”
차분하고 느릿한 목소리와 반대로 알렌은 양손을 들어 거칠게 사샤의 목을 휘감았다.
“너희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윽…!”
그녀의 목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불행이 예견되어 있던 거다.”
“악… 끄윽…!”
사샤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 곳은 믿을 수 없게도 공작가에서 지내고 있는 사샤의 방 침대 위였다
.
“커억, 컥, 컥!”
끝없이 잔기침을 하며 몸부림치던 사샤는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흐억, 학… 흑….”
사샤는 숨을 몰아쉬며 무의식적으로 덜덜 떨고 있는 몸을 웅크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그녀가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기어 거울로 갔다.
하지만 거울에 자신을 아무리 비춰 보아도 목에 남은 손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팔과 다리를 살펴봐도 사슬로 결박했던 흔적조차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나는 꿈을 꾼 건가?
거울 앞에 선 사샤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얼어붙었다.
꿈이라면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사고 때문에 공작이 위독해지고, 어머니는 실종되다니.
쾅-!
그때 어마어마한 소리가 나며 그녀의 방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알렉산드라.”
처음 보는 붉은 머리의 남자와 그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이 그녀의 방에 거칠게 들어왔다.
“당신을 공작 암살 모의 죄로 체포하겠습니다.”
남자가 억양 없는 말투로 말하자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사샤에게 창을 겨누며 위협했다.
“처음부터 의심스러웠어.”
또다시 지하 감옥에 갇힌 사샤를 내려다보며 알렌 폰 에른스트는 나직하게 말했다.
“소공작님 말씀대로 저 여자는 마녀가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그의 옆에 흰옷을 입은 사제가 서 있었다.
“아니에요…!”
사샤는 고개를 들어 또다시 같은 말을 애처롭게 반복했다.
“에른스트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가련한 눈빛을 피하면서 뒤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단호하게 명했다
.
“마녀 알렉산드라를 에른스트 공작 시해 모의 죄로 처형한다.”
소공작의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사샤를 에워싸고 검을 찔러 넣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끔찍하게도, 죽으면 다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공작이 산송장이 되어 공작가에 돌아온
날로.
“아니야, 난 마녀 같은 게 아니야! 난 아무 관련 없다고!”
적극적으로 항변해보기도 하고,
“목숨만 살려주시면 절대 공작가의 눈에 띄지 않게 살겠습니다. 제발….”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목숨을 구걸하기도 하고,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도망도 쳐봤다.
“아니라고!!! 제발 아니라는 걸 좀 믿어줘!!!”
악에 받쳐서 목이 터져라 소리도 질러 봤다.
“도망치는 걸 보니 떳떳지 않은 짓을 한 게 확실하군.”
하지만 번번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또다시 그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이 아홉 번째이다.
이번에는 모두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는데, 탈출 직전에 비밀통로 앞에서 알렌의 손에
직접 잡혔다.
“나의 아버지는 너희 때문에 저렇게 되신 거다.”
매번 토시 하나 다르지 않게 똑같이 뱉는 말.
“마차 사고로 위장해서 공작의 유산을 노린 거였군.”
알렌은 사샤를 붙잡은 채로 빌어먹게 지겨운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작작.”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미 네 놈 손에 죽은 것만 여덟 번.
어차피 이번에도 똑같이 죽을 운명이라면 그동안 참았던 욕이나 네 놈 면상에 실컷 퍼붓고
죽으련다.
악에 받칠 대로 받힌 사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껄이지?”
“…뭐라고?”
“작작 지껄이라고 했습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사샤는 그를 노려보며 마음속 깊숙이 쌓아둔 분노를 폭발시켰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너한테 매번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데?”
“…매번?”
알렌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굳어버린 표정으로 폭주하는 사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는 갖고 날 잡아들이려는 거야? 마르가리타도 실종되었고, 당신이 멀쩡
한데 우리가 어떻게 공작가를 노릴 수 있다는 건데, 말해 봐.”
사샤는 있는 힘껏 비꼬는 목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
“다짜고짜 날 붙잡는 게 아니라 한번 기다려나 보든가. 내가 마르가리타와 연락이라도 하는
지.”
그 순간 사샤는 자신의 양팔을 잡고 있던 알렌 놈의 손에 힘이 풀린 것을 느꼈다.
“우리 엄마가 온 게 싫었으면 엄마를 데려온 너희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지 그랬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알렌을 있는 힘껏 밀쳐낸 사샤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리고 뭐, 너희 같은 여자들? 우리 같은 여자들이 왜? 당신이 공작가 인간이라서 남들이
떠받드는 거지, 당신이 잘난 줄 알아?”
사샤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서 있는 알렌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
음을 흘렸다.
몸싸움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자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사샤가
그를 노려보았다.
“말하는 싸가지에 재수 없는 눈깔에.”
사샤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만 뱉어내며, 검지를 치켜든 채 삿대질을
했다.
“이 허연 머리는 기름칠을 했는지 아주 딱 달라붙은 꼴이 소공작만 아니었으면 여자한테 인
기 개뿔도 없을 게 뻔한데.”
사샤는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마지막으로 열변을 토해내듯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같은 여자들이랑 상종이나 해 보고 말하시냐고요, 이 여자 경험 없는 동정 새끼야
!!!”
사샤의 발악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있는 말 없는 말 모조리 뱉어낸 사샤는 숨이 모자라 한참을 씩씩거렸다.
“….”
한동안 숨을 골라낸 후,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알렌을 보며 그녀는
그때야 자신이 내뱉은 말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질렀다.
저질러 버렸다.
저놈 앞에서 지금껏 몸 사리고 착한 척만 했었는데 결국 터져버렸다.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놈이 열 받을만한 근거 없는 소리까지 지껄여버렸다.
이번에도 몸 성하게 죽긴 글렀다….
그래도 저 새끼의 난생처음 보는 반응을 보니 속은 시원했다.
나는 또 갑니다. 또 만나겠죠, 빌어먹을 공작가 여러분들.
다음 생은 또 어떻게 발버둥 쳐야 하나 이 거지 같은 운명에 눈물짓고 있을 때,
“….”
놈은 여전히 잠잠히 서 있기만 했다.
그동안 숱하게 겪은 알렌 저 새끼의 성깔이라면 지금쯤 바로 기사단을 소집해서 날 지하실에
가두고 목을 조르든 독약을 먹이든, 아니면 배때기에 칼을 쑤시든 했을 텐데.
예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이상함을 느낀 사샤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하.”
알렌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샤에게 보인 적 없는 모습
이었다.
저 잘난 인생에 생전 처음 받아보는 모욕이 어지간히 수치스러웠는지 알렌은 아무 반응도 하
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알렌의 모습을 보며 사샤는 퍽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매번 죽는다는 건 거지 같았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통쾌함을 느끼며 죽겠구나 싶어 자조
하며 웃었다.
“…나중에 보자, 너.”
오랜 침묵 후에, 알렌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시뻘건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리둥절한 사샤를 앞에 두고 알렌은 뒤를 돌아 성큼성큼 발걸음 소리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뭐지 저놈?”
마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뱉고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재수 없는 허연 머리가 가고 나서도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한동안 복도에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 * *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사샤를 잡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대신 비밀통로는 단단하게 막혀 공작가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도망갈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사용인들이 그녀가 나가지 못하도록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었다.
다른 변화도 있었다.
공작 부부가 신혼여행을 간 뒤로 제대로 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던 사샤에게 진수성찬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소공작 놈에게 목숨을 내놓고 지랄한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첫날은 향긋한 시트러스를 갈아 올린 고급 도미찜, 둘째 날은 와인 소스를 곁들인 부드러운
양고기 스테이크와 채소 모둠이었다.
죽을 일만 기다리던 사샤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음식이었다.
다음 세계도 식후경이라고 생각하며 감격에 휩싸인 사샤가 정성스럽게 썬 스테이크 한 조각
을 입에 넣으려고 할 때.
“알렉산드라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저녁 식사를 가져다준 메이드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갈색 머리를 질끈 묶은 20대 중반 정도의 여인으로 사샤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오늘부터 아가씨 방에서 아가씨를 전담하여 모실 담당 사용인 안나입니다.”
“녜?”
육즙이 풍부한 양고기를 우물대느라 그녀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사샤는 천천히 스테
이크를 씹어 넘기고 나서야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저를요…? 왜요…?”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메이드의 대답에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까 이건.
이거 신종 처형 방법이야?
때깔 좋게 먹이고 희망 고문한 다음에 죽일 생각인가.
귀족 놈들 마음은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고팠던 사샤는 당장 눈앞의 식사에
집중했다.
“아가씨,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창가에 앉아서 하릴없이 노을을 보고 있던 사샤는 메이드의 손에 끌려
욕실로 들어갔다.
“여기 들어가시면 돼요.”
“아, 네에….”
사샤가 어색하게 알몸을 가리며 장미 향이 나는 욕조 물에 몸을 담그자, 안나는 그녀가 목욕
하는 것을 정성껏 도왔다.
“아가씨, 뒤돌아보셔요.”
목욕을 마친 후, 안나는 익숙한 솜씨로 사샤의 온몸에 고급스러운 향유를 발라 주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나는 사샤의 머리를 빗질하고,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새 잠옷을 입혀준 뒤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샤는 자신이 왜 갑자기 이런 극진한 대우를 받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쾅,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앞에 길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실버 블론드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을 요요히 비췄다.
“네가 그랬지.”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사샤에게 다가왔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내가 여자 경험도 없는 동정 새끼라고.”
알렌 폰 에른스트는 사샤가 처음으로 죽던 날처럼, 그녀의 앞에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 멈춰 섰다.
“그래서.”
그는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하나씩 풀며,
“직접 보여주려고 한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 가까이 끌어당긴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