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2화 (2/101)

2.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들을 대신해서 공작이 그를 소개했다.

“소공작님, 안녕하신가요. 마르가리타라고 해요.”

“….”

마르가리타가 먼저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공작은 모녀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꾹 다문 입과 차가운 눈빛에서 누가 봐도 이 자리가 불쾌하다는 티가 드러나는데도 공

작과 마르가리타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저 그 사이에서 가련한 사샤만이 양쪽으로 눈을 재빨리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알렌은 의자를 삐딱하게 뒤로 빼서 사샤의 맞은편에 앉았다. 불쾌함을 표현하는 동작도 우아

하게 느껴졌다.

찡그린 눈썹 아래로 긴 쌍꺼풀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푸른 눈은 매우 불만스러운 듯 벽

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빨리….”

“내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오.”

마르가리타가 한마디 할 때마다 공작이 정성스럽게 맞장구치는 두 사람만의 오붓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들의 옆에 앉은 사샤와 알렌의 시간은 마치 멈춘 듯 침묵만 감돌았다.

“저….”

사샤는 불편함을 이겨내고 어렵게 정적을 깼다.

공작은 알렌을 그녀들에게만 소개해줬을 뿐 반대로 모녀의 소개는 깜빡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눈앞의 청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게 예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알렌은 사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렌이 그녀를 보자 사샤는 그제야 제

대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알렌의 쨍할 정도로 밝은 푸른 눈은 서 제국에서 굉장히 희귀한 눈동자 색이었다.

사샤는 그의 눈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뭐야.”

“저, 알렉산드라라고 합니다….”

우물거리며 통성명을 한 그녀를 알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길을 떼지 않고 바

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거북함을 느낀 사샤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했다.

“아, 사샤.”

때마침 마르가리타가 사샤를 불렀다.

“결정했단다.”

영문 모를 말에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갸웃하며 마르가리타를 바라보았다.

“한 달 뒤에 공작가에서 조촐하게 하기로 했어.”

“네?”

“우리 결혼식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샤와 소공작은 동시에 마르가리타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정말 결혼할 생각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사샤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마르가리타에게 물었다.

“그러엄, 당연하지.”

마르가리타는 저녁 식사에 나온 음식과 와인까지 잔뜩 먹고 만족스러운 듯 길게 하품을 했다

.

공작의 아들은 마르가리타가 문제의 결혼식 발표를 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공작과 마르가리타가 화기애애하게 저녁 식사를 할 동안, 사샤는 음식을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었다.

마치 바늘이 천 개 돋은 의자 위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사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난 마르가리타가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사샤를 불렀다.

“왜요.”

하루 종일 불편하고 불쾌하기만 했던 사샤는 그녀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무런 걱정 안 해도 돼, 사샤.”

고개를 돌려 마르가리타를 보자, 그녀가 사샤를 껴안으며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뺨을 사샤의

뺨에 비볐다.

“으, 왜 이래! 이 술주정뱅이.”

“사샤~ 사랑해~”

“어휴 정말.”

사샤는 흥이 오른 마르가리타를 떨쳐내고 크게 한숨 쉬었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아까 공작님 아들 표정 안 보였어요?”

다시 그 남자의 죽도록 차가운 표정을 떠올리자 사샤의 몸속 깊이 오싹함이 올라왔다.

“괜찮다니까.”

마르가리타는 숱 많은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정말로….”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반쯤 포기한 사샤는 마차에 등을 기댄 채 깊숙이 몸을 묻

었다.

집에 도착하고 익숙한 집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사샤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긴장감에 지쳐버린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려고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층 침대의 아래에서 자고 있는 마르가리타는 어느새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사샤

는 불안함에 계속해서 몸을 뒤척였다.

“…잘 지낼 수 있을까.”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르가리타는 정말 공작님과 결혼하는 건가?

서 제국은 최근 신분의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평민들의 경제 활동이 활발하고 다양해지면서 부유한 평민들이 가난한 귀족에게서 신분을 사

거나, 준 귀족 대우를 받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완전히 다

르다.

아무리 신분제가 흔들려도 마르가리타 모녀는 엄연히 평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하층민이다.

그런데 마르가리타가 귀족 중 가장 높은 공작님과 결혼을 한다고?

사샤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말이 결혼이지, 사실은 공개적으로 정부와 살겠다는 의미 아닐까.

그쪽이 차라리 가능성 있는 상황이었다. 딸인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기 껄끄러우니 결혼

이라고 표현한 것뿐이고.

소공작의 차가운 눈빛도, 아버지의 정부와 그녀의 딸을 굳이 소개받아야 하는 불쾌함에서 나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러웠다.

아무튼 마르가리타가 더는 고생하지 않는다면 사샤로서는 바랄 것이 없었다. 몸이 힘든 것보

다는 마음이 불편한 쪽이 훨씬 나았다.

늘 새벽이 되어 잔뜩 취해서 오는 마르가리타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공작의 정부로 먹는 눈칫밥이라도 편하게 지내는 마르가리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공작과 함께 있던 마르가리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작가의 응접

실에서 차를 마시는 마르가리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보다 훨씬.

마르가리타가 좋다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다.

불안함은 아직 존재했지만, 이 거리를 벗어날 기회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사샤는 억

지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저녁, 일하는 식당에서 퇴근하고 온 사샤를 마르가리타가 반갑게 맞았다.

그녀의 뒤에는 옷과 짐들이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샤, 어디 갔다 왔어?”

“어디 다녀오긴, 일하고 왔죠.”

“일? 아직 안 그만뒀어?”

“그만두다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마르가리타의 말에 사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오늘 공작가에 들어가기로 했잖아.”

사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체 무슨….”

“곧 공작가에서 우리를 데리러 올 거야.”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내가 말을 안 했었나?”

마르가리타는 태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사샤의 얼굴에 그늘이 점점 드리워졌다.

“늦게 데리러 오라고 하길 잘했네. 하마터면 공작가 사람들이 다 널 기다릴 뻔했지 뭐야.”

마르가리타는 내가 야행성이라서 다행이야, 라는 이상한 가사를 붙여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제발, 그런 말은.”

좀 빨리해! 라고 마르가리타의 등 뒤에 대고 사샤가 분노에 차서 일갈했다.

“우리 딸, 삐졌어?”

마르가리타는 빙글 돌아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다 말 못 해줘서 미안해.”

“흥, 몰라.”

마르가리타는 사샤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샤의 표정이 슬쩍 풀렸지만,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는 영원히 사샤뿐이야~”

“아, 몰라! 왜 이래!”

모녀가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녀들을 데리러 왔다.

그렇게 마르가리타와 사샤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들고 갑작스럽게 공작가로 들어가게 되었

다.

공작과 마르가리타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까지 한 달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

었다.

마르가리타는 매일 공작과 쇼핑을 다니거나 사샤를 억지로 데리고 시내에 나가서 함께 식사

를 했다.

공작의 아들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두 번 우연히 복도 같은 곳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아무 말 없이

사샤를 노려보았다.

“저… 안녕하세요.”

“….”

억지로 인사를 하는 사샤의 마음도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사샤는 그와 마주칠 때마다 불편한 마음으로 얼른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한 달 뒤 열린 두 사람의 결혼식은 정말로 조촐했다. 인원수만큼은.

수도의 가장 큰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딸 아들 외에

는 신랑보다 젊은 주교만이 참석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주교의 성혼 선언문이 조용한 성당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싱글벙글한 웃음이 떠나질 않는 신랑과 황가의 여인들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

게 차려입은 신부.

그리고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끝나길 기다리는 신랑의 아들과 양

쪽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부의 딸.

각자의 사정을 담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랑과 신부는 신혼여행을 떠나기 위해 바쁘게 움

직였다.

두 사람은 아르트리아 해의 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서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공작령의 휴양

지에 있는 고급 별장에서 두 달간 머무르다 오겠다고 했다.

마차에는 공작과 막 부인이 된 마르가리타, 두 사람만이 타고 그들의 뒤를 공작가의 기사가

경호하며 따르기로 했다.

소공작은 일이 있다며 배웅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샤는 마차 앞에 서서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르가리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 저택에 사용인이

많다고 해도 저 소공작과 둘만 남아야 한다니.

부디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두 달간 마주치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

었다.

“사샤,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마르가리타는 딸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미소

였다.

결혼부터 신혼여행까지 전부 혼자서 결정해버린 마르가리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저런 미

소를 보면 도저히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사샤는 마르가리타의 손을 슬쩍 치우며 볼멘소리로 웅얼댔다.

“사랑해, 내 딸.”

마르가리타는 장난스러운 손길로 사샤의 머리를 마구 만지며 헝클었다. 사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혼자 슬쩍 미소 지었다.

“아, 사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작별 인사를 하는 사샤에게 깜빡하고 하지 못한 말을 전했다.

“혼인신고 하면서 너도 호적에 올렸단다.”

“뭐, 혼인?”

“이제 알렉산드라 폰 에른스트라고 하렴.”

호호호, 사샤의 어머니는 즐겁게 손을 흔들며 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다.

“에른…? 리, 리타!”

점점 멀어지는 마차 뒤로 사샤의 다급한 외침만 공작가의 정원을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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