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그런 이유로.”
홍문이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하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홍문이 이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은 모두 주이염 때문이다.
결코 자신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걸 홍문은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로군.”
하진의 첫마디였다.
누가 들어도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지만 당사자인 홍문과 주이염은 제정신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늘부터 네가 내, 그러니까 네놈이 내 처남이라는 것이냐?”
“굳이 그렇게 불러 주지 않으셔도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은 형식적인 것이라서…….”
주이염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보냈더니 홍문이 자신의 처남이 되어 돌아온 사실 앞에 하진이 지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잠시 주저했다.
일단 이해는 한다.
홍문에게 벼슬을 주려면 귀족의 신분이 있어야 하고 주이염이 홍문을 양자로 들이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아주 오랜 골칫덩이가 해결되는 것이다.
하진도 홍문을 승상으로 삼고 싶다.
책사가 아닌 정식 관직을 내려서 정당하게 자신의 일을 돕게 하고 싶지만 홍문에게 신분을 줄 가문이 없었다.
어지간한 가문으로는 어림도 없었는데 주이염이 제 양자로 들였다고 하니 하진으로서는 고맙다.
온전히 고마워해야 하지만, 그 대신에 홍문이 은호의 오라비가 되는 것이다.
양자도 아들은 아들. 그러니까 홍문은 은호의 오라비가 되고 하진 자신은 홍문의 매제가 된다.
이 이상한 족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장인의 생각이십니까?”
“내가 팔자에 아들이 없이 딸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을 겪어 보니 이만한 사람이 또 없어서 주씨 가문의 이름을 물려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폐하.”
주이염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정말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장인?”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신은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처남이라니.”
기가 막힌 탓에 혀를 차며 하진이 어쩔 수 없이
‘마음대로 하거라’
라고 승낙을 해 줬지만 그 승낙을 받은 홍문의 기분도 묘했다.
아니, 실은 홍문의 기분이 제일 묘했다.
홍문은 처음부터 주은호가 싫었다.
주은호라는 사람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주은호가 하진에게 미치는 영향이 싫었었다.
한 명의 여자로 인해서 흔들리는 황제라니, 그런 것은 하찮은 것이고, 자신이 황제로 만든 사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가 오면 죽이는 것이 좋다고 여겨 왔는데 의도하지 않게 남매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홍문이 죽이려 한 여자가 두 명 있다.
한 명은 주은호이고, 한 명은 심은송이다.
그런데 주은호는 동생이 되었고 심은송은 부인이 되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평생 여자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내도 생기고 여동생도 생겼다.
물론 제가 가장 싫어하고 견제하던 두 여자였다.
그런데 그 기분이 썩 나쁜 것은 아니다.
“웃어?”
앞에서 하진이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으로 험악하게 말을 해도, 홍문은 입가에 지어지는 이 미소를 어떻게 감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감정 감추기의 일인자처럼 굴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표정을 감추려고 해도 웃음만 나오니 말이다.
*
“준비가 끝나셨으면 모시겠습니다.”
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루의 목소리에 은호가 심호흡을 했다.
“잠시만요.”
숨을 몇 번이나 더 쉰 다음에야 은호가 사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비틀거리는 것은 머리에 쓴 가체의 무게 때문이 아니다.
몸에 걸친 예복이 무거워서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힘든 것이 절대 아니다.
지금 은호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진에게 굳이 책봉식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해산을 하고 난 다음에 가벼워진 몸으로 책봉식을 해도 된다고 했지만 하진은 굳이 서둘러 출산 전에 책봉식을 끝내려고 했다.
그 이유를 은호도 안다.
책봉식을 마치고 정식 황후가 되어 낳는 아이와, 후궁의 몸으로 낳은 후 황후로 책봉되는 어미의 아이가 가지는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황후가 되어 아이를 낳는 것과 아이를 낳고 황후가 되는 것이 세간에는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황후가 되면 그 아이 때문에 황후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분명 나올 것이다.
하진은 사람들의 말에 민감하다.
하진 자신에게 쏟아지는 소문에는 예민하지 않지만 은호에게 쏟아지는 소문에는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
은호는 세간에서 자신에게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소문들 중 좋은 것은 없다.
듣고 싶지 않아도 사비가 어떻게 알고 꼭 알려 준다.
선황의 황후였을 때 이미 그때의 태자를 유혹해서 지금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태자를 부추겨서 선황을 죽이게 한 것이 은호라는 소문도 떠돌고 있다.
가장 최악의 소문은 지금 태중에 있는 아이가 선황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억측들이다.
진실을 아는 것은 극소수이고, 억울함을 밝히고자 진실을 모두에게 소리쳐 알릴 수도 없다.
그렇게 결국에는 혼자서 그 소문들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해서 하진이 이 책봉식을 서두른다는 것을 은호도 안다.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후궁이니까 그런 소문들이 도는 것이다.
황후가 되면 소문의 절반은, 혹은 그 이상은 가라앉을 것이다.
황후가 되고 부친이 건강을 되찾고, 그리고 양자 입적으로 남매 관계가 된 홍문이 승상의 자리에 오르면 더는 황궁 안에서도, 조정에서도 누구도 선황과 관련된 이상한 소문들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을 안다.
“마마. 불편하시면 조금 더 앉으셨다가 일어나셔도 됩니다.”
비틀거리는 은호가 불안한지 옆에서 사비가 살며시 속삭였지만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긴장해서 그래.”
은호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책봉식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떨리는 것은 자신이 정식으로 하진의 아내가 되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후궁은 따로 혼인 예식을 올리지 않는다.
황제의 여자들 중에서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것은 황후 한 명 외에는 없다.
하진은 후궁도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두지 않을 것이다.
이 혼례는, 이 책봉식은 하진에게 있어서도 일생에 단 한 번의 혼례다.
그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봐야 할지 은호는 그것이 설레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곳 연환궁에서 금환궁까지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는 길이 천길만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제 이 연환궁을 나가면 두 번 다시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연환궁과도, 연비전과도 안녕이다.
이 연환궁은 이후에는 허물어져 다른 모습으로 다시 지어질 예정이다.
사비의 손을 잡은 은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오래 머문 것은 아니지만 정이 들었다.
정은 이다지도 쉽게 붙어 버린다.
십 년을 산 것도 아닌데 벌써 이렇게 정이 붙어 버렸을 줄은 몰랐다.
물건에도 이렇게 정이 드는 법인데 사람은 하물며 어찌 정이 들지 않을까.
발 너머로 층계를 내려온 은호가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이루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하진의 명령으로 자신을 지켜 주던 사람이다.
말이 없고 묵묵하지만 지키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는 바위처럼 굳건하고, 정한 뜻에 대해서는 소나무처럼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마마.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오늘 은호가 금환궁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이 이 사내에게 맡겨졌다.
허리에 큰 칼을 차고 그녀를 금환궁까지 모시고 가는 것이다.
이루의 곁에는 위연이 서 있었다.
지난번 궁녀 견아의 일 이후로 황궁 출입을 뜸하게 하고 있던 위연이 오늘은 예복을 갖춰 입고 연환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진 모르게 견아의 일을 감췄다는 벌로 일시적인 황궁 출입 금지령을 받았던 위연의 근신이 오늘 풀린 것이다.
앞서 걸어가는 이루와 위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은호가 문득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칠석의 밤 하진을 만나고, 선황의 청혼을 받고, 입궁해서 황후가 되고, 초야에 하진에게 안겼다.
선황의 의심 어린 눈길 앞에서 혼절하기도 했고, 자객에게서 목숨도 위협받았다.
저를 죽이려는 황제를 제가 찔렀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죽음 직전의 황제의 표정도, 그런 황제를 다시 찌르던 화비의 모습도,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비밀과 진실을 은호는 알고 있다.
너무 많은 비밀과 너무 많은 진실을 은호는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것은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만큼 더 많은 비밀과, 더 많은 진실과, 더 많은 사연과, 더 많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더 많은 눈물을 하진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지금까지 걸어오며 새겨진 상처나 기억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과 같다.
지금 은호는 하진이 기다리고 있는 금환궁을 향해 걷고 있다.
힌 걸음 또 한 걸음.
그에게로 걸어가는 길만큼이나 연환궁과는 멀어진다.
연환궁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과거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돌아보지 않는 것.
앞만 보고 걸어가는 것.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을 바라보는 것.
눈을 똑바로 들고 주위에 한눈팔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다.
좌우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앞에서 내미는 손만 바라보고 있으면 미로 같은 황궁에서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황궁은 무덤이라고 했다.
황궁은 저주받은 곳이라고 했다.
황궁은, 눈물과 슬픔뿐인 곳이라고 했다.
“마마.”
이루가 옆으로 물러섰다.
걷다 보니 어느새 금환궁에 다다른 것이다.
이루와 위연이 좌우로 물러서자 그 안으로 은호가 들어섰다.
책봉식이 열리는 금환궁의 태사전 안에는 문무백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무수한 문무백관들은 은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저를 향해 내민 손.
오롯이 저만 바라보는 눈.
세상 사람들이 전부 패륜이라 손가락질하며 배덕하다 욕할 때조차 저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단 한 번도 거둬 본 적 없던 사내가 지금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내는 저 멀리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제단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은호의 눈에는 사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은호가 붉은 천이 깔린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좌로도 우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오직 그 사내 단 한 명만을 봤다.
미로 같은 황궁, 저주받은 이 황궁에서 길을 찾게 해 주고, 웃게 만들어 준 사내만 바라봤다.
다들 이 황궁에서는 꽃이 피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은호는 안다.
저 사내와 함께라면 자신은 꽃을 피울 수 있다.
저 사내와 함께라면 이 황궁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는 한, 자신들이 서로 그리워하는 한, 이 황궁의 지붕에는 따스한 햇살이 드리워질 수 있다.
아니, 지금도 태사전의 지붕 위로 눈이 부신 햇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가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우는 사내가 아니니, 웃고 있다고 여기기로 했다.
계단의 끝에 이르러서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주은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은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웃음이 나왔다.
고작
‘네’
라는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잡은 손이 꾹 눌러 왔다.
그 손이 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