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107화 (107/108)

107.

“제가 지금까지 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드셨지만 어르신께서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하실 것 같아서, 그 말씀은 못 믿겠습니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욕을 먹으면 명이 짧아지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르신을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근질거리는 귀를 긁으며 홍문이 주이염을 슬쩍 쳐다봤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이염의 증세는 많이 호전되었다.

어차피 완치가 안 되는 병이라는 건 주이염도 알고 홍문도 알고 있다.

완치가 되지 않으니 지금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전부다.

죽을 목숨을 연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 그 덕분에 지금 주이염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아직 머리가 희게 셀 나이는 아닌데 검은 머리카락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센 것은 그가 마시는 약이 워낙에 독하기 때문이다.

독을 독으로 치료한다. 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주이염에게 추천한 것은 다름 아닌 홍문이다.

독 중에서도 독한 극약을 양을 조절해서 복용함으로써 몸 안의 병을 억누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홍문이 죽기 아니면 살기니 일단 먹어 보라고 준 것이 의외로 효과를 봤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하는 법.

목숨을 연장하는 대신에 고통이 수반되었고 고통은 머리를 하얗게 세게 만들었다.

지금도 주이염은 하루에 한 번 극약을 복용한다,

약을 먹고 나면 복통에 시달리며 한두 시간을 끙끙 앓아야 하지만 그 덕분에 하루의 생명이 더 연장된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주이염이 이 고통스러운 생명을 연장해 가는 이유는 머잖아 태어날 손주의 얼굴을 보고 죽기 위해서다.

주이염은 이제 다른 것은 바라는 것이 없다.

살아오면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누려 봤다.

선황의 재위 시에 나라 제일의 권력도 누렸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얻었고 이제 그 딸이 비로소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는 미련이 없다, 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딸이 행복한 것만 확인하면 더는 미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딸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그 태어날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이래서 사람은 하나를 원하면 하나를 더 가지고 싶어지고, 그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까지도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손주를 품에 안아 볼 수 있다면 그다음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그러나 손주를 품에 안고 싶다는 마음보다 조금 더 강한 마음이 있다면, 적어도 딸이 해산을 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각오일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딸은 만삭의 몸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어떤 식의 충격을 주는지 주이염은 잘 알고 있다.

딸을 낳으며 아내가 죽었을 때, 그때의 충격을 주이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기억은 가슴에 새겨져 평생 잊혀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다.

주이염은 그걸 안다.

그래서 하진의 슬픔도 이해하고 있고 은호를 위해서는 악착같이 살려고 버티는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은호에게 슬픔이 새겨진다.

그리고 은호는 그 슬픔을 끌어안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주이염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신에게 기도를 한다.

내일 다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주이염은 일생 신에게 간청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극약을 먹어 가며 목숨을 연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 조정은 물갈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새로 들어온 신하들은 잘 적응을 하고 있는가?”

“그럭저럭입니다. 아무래도 젊은 피가 섞이다 보니까 말들이 많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젊고 혈기 왕성하지만 경험은 미미한 관리들이 얼마나 저돌적이고 막무가내인지 말입니다. 뭔가 열심히 해 보겠다는 열의는 좋은데 가끔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밀어붙이는 성향이 너무 강해서 머리가 아픕니다.”

“승상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는가?”

“폐하께서 그 자리만큼은 아직 채우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누구가 살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홍문의 말은 주이염이 살아 있어서 아직 하진이 새로운 승상을 세우지 않는다는 일종의 책임 전가가 묻어나는 목소리다.

“자네가 승상 자리에 딱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이번에 도성에 올라가면 폐하를 뵙고 자네를 승상에 천거를 해야겠네.”

“신분이 안 됩니다. 누굴 창피 주려고 그러십니까? 신종 복수 방법입니까? 제가 독을 먹였다고 제게 이러시는 거라면, 저는 어르신을 도왔을 뿐이라는 걸 열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폐하께서는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보신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신분 운운하다니, 그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가?”

“그것도 신분 나름입니다.”

“자네 신분이 어때서 그렇지?”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홍문이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홍문은 개인적으로 주이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이염이라는 인물의 교활함과 야비함,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그 결단력을 좋아한다.

선황을 황제로 만들고, 선황으로 하여금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도록 온갖 야비하고 잔인한 짓을 도맡아 한 주이염이 아닌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오랫동안 권력을 놓지 않고 누려 온 그 능력을 존경한다.

인간적인 성품 따위는 절대로 존경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하고 좋아해도, 자신의 안에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홍문이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그의 신분이다.

이루는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가문의 자손이다.

그는 그가 가진 능력에 따라 그에 합당한 벼슬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홍문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하진을 황제로 만든 것에 일등 공신이지만 아직까지 황궁 안에서 그에게는 공식적인 자리가 없다.

그는 하진이 태자였을 때에도 그저 모략꾼에 책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하진이 황제가 된 지금도 황제의 책사로 불리고 있다.

책사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니다.

장사꾼도 벼슬아치가 될 수 있고 평민도 거지도 벼슬아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딱 하나, 벼슬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 있다.

그건 바로 역적의 후손이다.

홍문이 바로 그 역적의 후손이다.

이것만큼은 하진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역적의 후손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는 국법은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다.

홍문의 증조부가 되는 인물이 백 년 전에 역모에 가담했다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들었다.

홍문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홍문은 비가 새는 움막에서 태어났다.

역적의 후손은 벼슬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것도 금지되었다.

마을 밖에 따로 움막을 치고 그곳에서 푸성귀를 길러 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것이 전부였다.

태어나는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발바닥에 역적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먹인을 새긴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먹인을 홍문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발바닥에 새겼다.

역적의 후손과 혼인을 해 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문은 태어났다.

근친상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증조부의 죄로 가문 모두가 쫓겨난 후 조부는 슬하에 둔 두 명의 자식들에게 근친을 강요했다.

그 결과 남매가 근친을 저질러 태어난 것이 바로 홍문 자신이다.

홍문의 생부와 생모는 누이와 동생으로 홍문을 낳은 직후에 생모는 목을 매고 죽었고 생부는 미쳐서 돌아다니다 폭우가 내리던 날 토사에 쓸려 내려가 죽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홍문은 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홍문은 태어나면서 두 가지의 죄를 짊어지고 태어났다.

한 가지는 역적의 핏줄이라는 죄요, 다른 하나는 근친의 씨앗이라는 죄였다.

거기에 아비 어미를 죽인 자식이라는 죄도 꼬리를 달고 늘 붙어 다녔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했으나 글을 배울 수 없었고, 서당 담벼락에 몰래 붙어서 소리로만 글을 배운 것이 서당에 다니는 이들보다 더 빨리 배워 나중에는 서책을 통째로 외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비상해도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은 진흙탕이었다.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하진을 만났다.

[태생이 더러우니 내가 너를 더럽게 사용해도 좋겠느냐?]

하진은 첫 만남에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흔쾌히 자신을 더럽게 사용하라고 대답한 것 역시 홍문이었다.

[나는 너를 더럽게 쓰고 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것이냐?]

[더럽게 쓰고 버리셔도 좋으나, 더럽게 사용했는데 더 쓸 만해지면 그때는 갈고닦아서 칼집 하나 만들어 주시고, 제 더러움을 가려 주시면 더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하옵니다.]

하진은 홍문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하진과 함께하며 홍문은 꿈을 꿨다.

홍문이 꾸는 꿈은 새로운 세상의 꿈이었다.

새로운 세상.

자신의 더러운 것이 더는 더럽지 않게 여겨지는 세상.

그 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더 더러워질 것도 없고 더 떨어질 나락도 없었다.

이미 발을 딛고 서 있는 곳 자체가 나락이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 주이염은 자신에게 승상의 자리에 오르라고 말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황궁에 출입하고 책사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

“양자는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네?”

순간 홍문이 미간을 심각하게 찡그렸다.

이 죽어 가는 사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었다.

양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일까?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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