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폐하는 마마께 정말 백번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마가 아니시면 누가 폐하를 그렇게 사랑해 주시겠어요? 그런데도 제 낭군님은 그 고마움을 몰라요. 제 낭군님은 폐하의 편이라 항상 폐하께서 밑지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들의 생각이란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지. 여자가 없으면 남자들이 제대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마마는 폐하께 과분할 정도로 근사한 분이신데 말이에요.”
“부인께서 좋게 봐주시니 그런 것이지요. 제가 어디 폐하께 비길 만한 사람인가요.”
“어머나. 너무 겸손을 떠셔도 그게 미덕은 아니랍니다. 자꾸 겸손을 보이시면 남자들은 기세등등해서 정말 자기들이 잘난 줄 아니까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되어요.”
은송의 말을 들으며 은호는 은송과 홍문의 신혼 생활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홍문도 말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은송도 마찬가지다.
서로 지지 않는 두 사람이 얼굴만 마주하면 조금도 지지 않고 자기주장을 펼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진과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마마, 외출 준비를 하시는 것 같은데 어딜 가실 생각이신가요?”
뜰에 궤짝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던 은송이 넌지시 물었다.
“강인사에 좀 다녀오려구요.”
“강인사에요?”
강인사에는 선황의 후궁들이 살고 있다.
원래 황제의 후궁들은 황제가 붕어한 후에는 강인사로 옮겨져 거기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그것이 법으로 정한 후궁의 말로다.
원래대로라면 은호도 강인사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혼인 무효가 되며 강인사에서 나올 수 있었고 후궁으로 다시 입궁할 수 있었다.
아직 강인사에는 선황의 후궁들이 있고 그중에는 위연의 생모도 있다.
“경사스런 일을 앞뒀으니 강인사에 가서 얼굴도 비치고 좋은 소식도 전할까 싶어서요.”
“좋은 소식이라면…….”
“폐하께서 법을 고치실 예정이세요. 황제의 서거 후에 후궁들을 강인사에 가둬 평생을 살게 하는 모진 법을 더는 유지할 이유가 없으시다며 강인사 자체를 없애실 생각이세요.”
“그러면…… 강인사의 후궁들은 전부 풀려나는 것이로군요.”
악습 중의 악습이 바로 강인사다.
돌봐 줄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중에는 꽃다운 나이의 후궁들도 많다.
그런데 황제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젊고 아름다운 후궁들이 평생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법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행해져 왔다.
그것을 이번에 완전히 폐할 작정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고집스럽게 부탁한 것은 은호다.
흔히 말하는 베갯머리송사 비슷한 것을 몇 달 내내 한 결실을 이제야 맺게 되었다.
그 소식을 미리 전해 듣고 가장 기뻐한 것은 다름 아닌 위연이었다.
위연은 늘 강인사의 모친을 걱정했다.
그리고 은호 역시 강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호로서는 더없이 기뻤다.
황후 책봉식이 열리기 전에 강인사에 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고, 책봉식 전에 강인사에서 후궁들이 풀려날 것이다.
하진은 황후 책봉식을 무척이나 화려하게 치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책봉식 즈음해서 죄를 지은 죄인들을 석방해 주고, 황궁의 내탕고를 열어 도성의 모든 백성들에게 쌀과 무명을 나눠 줄 계획도 지금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황제의 즉위식에서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황제의 즉위식은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황후 책봉식을 치르려고 하진이 마음을 먹었다.
책봉식은 화려할수록 좋다고 옆에서 홍문이 부추긴 까닭도 있었고, 지난번 심창과 허연을 비롯해서 귀족들을 숙청한 여파로 뒤숭숭하던 도성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화려한 축제가 필요하다고 하진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책봉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황제 하진이 지금 백성들에게 비쳐지는 모습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가차 없이 냉정한 지배자인 동시에, 다른 한 가지는 넓은 아량과 연민을 가진 보호자의 모습이다.
귀족들이나 지배 계층에 있어서는 잔인한 지배자요,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다정한 보호자로 다가서야 한다고 홍문도 주장했고 은호도 그런 황제의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잔인하고 엄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또한 누구에게나 너그러울 이유도 없다.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황제는 없다, 그것이 홍문의 주장이었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열 사람을 만족시키는 대신에 열 사람을 기꺼이 끌고 갈 수 있다면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긍은 하게 될 것이고, 수긍하는 이들은 언젠가는 이루어진 결과물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은호도 동감한다.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도 없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한 사람에게 신경을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와 가까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국 많은 이들에게 한꺼번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어도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고 은호는 생각한다.
하진이 자신을 변화시켰고 자신이 하진을 변화시켰듯이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를 변화시키며 결국에는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다.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조금씩 하나씩 변화가 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은호는 정치도 모르고 군림하는 법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진심으로 대하면 결국에는 그 진심이 통한다는 것 한 가지는 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안다.
은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가지뿐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무기이고, 그것이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한다.
“정말 마마는……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아요.”
은송이 중얼거렸다.
“뭐, 옛말에 퍼 주면 그게 다 돌아온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장사꾼의 딸이라서 그런지 퍼 주는 것이 조금 많이 아깝거든요. 하지만 제 아버님은 평소에 잘 퍼 주는 것도 장사꾼의 도량이라고 하셨어요. 전 잘 퍼 주지 못해서 돌아오는 복이 없나 봐요. 마마처럼 남들에게 잘해 주고 잘 퍼 주었으면 저도 복을 받았을지 몰라요.”
“부인도 복을 받았잖아요.”
“뭐, 나름 복이라면 복이지만, 밤에는 전혀 복이 아닌 것 같아서요. 마마, 이런 것은 어디 가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말…….”
은송이 은호에게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물었다.
“폐하께서도 한 번 사정하시면 그게 시들어 버리나요? 하룻밤에 한 번이 전부이신가요?”
“아니, 그건…….”
갑작스런 질문에 은호의 귀가 훅 달아올랐다.
남녀 간의 은밀한 일을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난감해진다.
“제 낭군님은 하룻밤에 한 번이 고작인데 그 한 번도 오래 지속이 되지 않아서 사내들이 전부 그런 건지 아니면 제 낭군이 부실한 건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아서 폐하는 어떠신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
하진은, 하루에 한 번으로는 만족을 못 한다.
한 번 사정했다고 시드는 정도가 아니다.
두 번, 세 번도 연이어 사정할 수 있고 사정해도 시들지 않을 정도로 넘치는 정력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은호가 그걸 다 받아 주질 못한다.
두 번 연거푸 사정한 직후에도 시들지 않는 하진의 양물을 결국에는 은호가 손을 사용해서 수음을 해 주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데 아마 은송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그게 원래 그렇게 작나요?”
“그건…….”
“여자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제 낭군님의 양물은 이만한데…….”
은송이 손가락을 벌려 보였다.
엄지와 검지를 쫙 편 길이였지만 은송은 손이 작은 편이다.
“폐하의 양물은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왜 이런 것을 묻는 걸까.
대답하기가 곤란해진 은호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옆에서 사비가 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사비가 때는 이때다 하고 얼른 끼어들었다.
“폐하와 홍문 님의 신장 차이를 보세요. 두 분의 키만큼 아마 차이가 나실 거예요.”
명대답이었다.
아주 훌륭하고 깔끔한 대답.
황제의 키는 무척이나 크다.
그리고 이루 역시 황제와 엇비슷하다.
그러나 황제와 이루, 그 두 사람과 함께 다니는 홍문의 경우에는 혼자 가운데 쏙 들어갈 정도로 작다.
아주 작은 사내는 아닌데 유난히 큰 두 사내와 늘 함께 있으니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작아 보인다.
홍문의 머리가 하진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니 그가 얼마나 작고 황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양물도, 대충 비교가 가능해진다.
사비의 말처럼 키를 보면 말이다.
*
“푸엣취!”
갑자기 홍문이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발가락 끝도 간질거렸다.
“누가 제 욕을 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갑자기 재채기가 나고 귀가 간지럽고 발가락까지 간지러울 리가 없다.
누가 자기 욕을 하면 오른쪽 귀가 미친 듯이 간지러운 법이고, 자신에 대해 창피한 말을 하면 재채기가 나고,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발가락이 간지럽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 그 세 가지 증상이 홍문에게 모두 나타났다.
이런 경우는 무척이나 드문데 말이다.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니, 자네는 오래 살겠군.”
홍문과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던 주이염이 느긋하게 웃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