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105화 (105/108)

105.

참회, 변명,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글인 동시에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비의 바람이 적힌 글이다.

은호가 서신을 접어 다시 서랍 안에 넣어 두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제 옆에서 잠이 든 사내의 곁에 얌전히 누웠다.

고른 숨소리가 기분 좋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에 이 사내가 저를 안고 울음을 달래 줬다고 한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자신이 이 사내의 소매를 잡고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에 이 사내가 자신으로 인해 아비를 용서해 주었다고 했다.

자신이 모르고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 이 사내와 자신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결의 끝에서 칠석의 밤에 만났고, 서로를 알았고, 헤어지고, 다시 황궁에서 만났다.

이것은 운명이고, 이것은 인연이며, 이것은 필연이다.

누구도 떼어 놓지 못하고 기어이 서로에게 이끌려 오고야 마는 운명이다.

이 사내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자신이 이 사내를 끌어당겨 자신들은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다.

강인하던 사내가 자신으로 인해 부드러워지고, 연약했던 자신이 이 사내로 말미암아 강해졌다.

그렇게 자신들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이제 조금은 온전한 삶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아이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채워진 삶을 살아갈 것이다.

물론, 태어날 아이도 뭔가 결여된 채로 태어나 그것을 채워 줄 그만의 인연을 찾아내겠지만 말이다.

쓰윽.

은호가 하진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다정한 울림이 자장가처럼 그녀를 덮어 달아났던 잠이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하진의 곁에서,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은호도 작은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숨소리가 촛불의 울림에 섞여 그렇게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

“책봉식이 무척 화려할 것 같습니다. 책봉식은 화려해야지요.”

마치 자신이 책봉식을 치르는 것처럼 이것저것 비단과 패물을 고르고 있는 심은송을 사비가 눈을 흘기며 째려봤다.

사비는 대체 심은송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환궁의 후궁들은 닷새 전에 모두 황궁 밖으로 내보내졌다.

각자의 사가로 돌아가라는 황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 아비들의 죄로 인해서 그 딸들까지 죄를 물어 원래는 강인사로 보내야 하는 것이지만 황제와 동침을 하지 않은 까닭에 후궁을 면해 주는 것으로 그 벌을 그쳐 모두 사가로 돌아가 다시 혼인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심 부인 심은송이었다.

후궁들 중에서 연비를 빼고 유일하게 부인의 칭호를 받았던 심은송은 후궁을 면하고 출궁한 직후 황제의 측근인 홍문과 혼인을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물론 그 과정을 주도한 것은 황제였다.

심은송은 후궁에서 면하고 축출당한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황제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 후궁을 상으로 내리는 형식으로 홍문과 정식으로 혼약했다.

물론 그 전에 심창의 양녀라는 신분을 파하고, 본래의 성을 되찾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은송의 본래 성은 양씨로, 양은송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녀를 양 부인이라고 부른다.

“배가 조금 많이 부르셨으니까 배를 덮을 수 있도록 넉넉하니 예복을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단을 보는 눈을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답니다, 마마.”

양은송은 은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양은송의 성격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으로 타고나기를 거만하게 타고났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굴리고, 누군가를 상대할 때는 이용 가치가 있나 없나부터 확인을 하는 성격으로 그런 면으로 보면 그 지아비가 되는 홍문과 무척이나 닮았다.

위연의 표현에 의하면

‘여자 홍문’

이다.

그만큼 거침없고 그만큼 이기적인 성격이지만 유독 그녀는 은호를 좋아했다.

은송은 입버릇처럼 은호가

‘착하다’

고 했다.

보기 드물게, 아니 바보처럼 착한데 그 착한 것이 예쁘게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아마 은송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은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좋아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진실함이다.

은호가 진심으로 자신과 다른 후궁들을 위해 뭔가를 해 주려고 한 것을 은송은 안다.

보통은 바라는 것을 아래에 깔고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해 착한 척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주은호의 경우는 그런 것이 없이 진심으로 도와주려 한 것을 은송도 아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은송은 매일 황궁에 출입한다.

자매가 없는 은호를 위해 말동무가 되어 준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비는 그게 불만이었다.

은호의 말동무는 자신이 되어 줄 수 있는데 굳이 양은송이 계속 은호를 찾아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비의 마음과는 달리 은호는 은송이 찾아와 주는 것을 기뻐했다.

자신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은송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은호는 배가 제법 불렀다.

이제 일곱 달에 접어들며 배가 꽤 불렀기 때문에 더는 책봉식을 늦출 수 없어서 황후 책봉식은 이제 고작 닷새 후로 다가왔다.

원래 황후 책봉식은 더 일찍 했어야 했지만 은환궁을 다시 지으며 그것이 늦춰졌다.

하진은 은환궁과 연환궁을 전부 무너뜨리고 새롭게 지었다.

연환궁과 은환궁을 합쳐서 그 위에 새로운 황후의 처소인 선화궁을 짓고 너른 뜰을 만들었다.

그 대규모의 공사를 하는 기간이 길어져서 책봉식이 늦어졌다.

궁을 새로 지은 까닭은 은호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은호는 선황의 황후로 책봉되었을 때 잠시 은환궁에 머물렀었다.

그때의 은환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은환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 지음으로써 은호가 아무런 나쁜 기억 없이 거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들어 버렸다.

황후를 향한 황제의 총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마마.”

은송이 비단을 내려놓고 과자를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요즘 은송은 살짝 살이 붙었다.

워낙에 입맛이 좋아 하루 종일 먹고 있기 때문이다.

은송이 입맛이 좋은 것은 지금 그녀가 홑몸이 아닌 까닭이다.

은송은 회임한 지 이제 막 석 달이 되었다.

입덧 하나 없이 입맛이 유독 좋아서 지금 통통해질 정도로 살이 쪘다.

은호가 입덧으로 초기에 조금 고생을 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승상 어르신께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들으신 것이 있으신가요?”

요즘 매일같이 은송이 황궁을 들락거리며 은호를 찾아오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건 홍문 때문이다.

홍문은 은호의 책봉식에 주이염을 참석시키기 위해 지금 그를 데리러 시골에 내려가 있다.

주이염의 몸이 상태가 워낙에 좋지 않아 그의 상태를 보고 천천히 올라오겠다고 말하고 내려간 터라 홍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 그 때의 상태에 따라 올라오는 일정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은송의 입장에서는 홍문이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하지만 벌써 열흘이나 원래 예정에서 늦어지고 있다.

그래서 은송의 속이 타는 것이다.

“안 그래도 오늘 파발이 왔습니다.”

“그래요?”

파발이 왔다는 은호의 말에 은송이 반색했다.

“언제 온다고 적혀 있었습니까?”

“내일 정도에 도착할 것 같다고 적혀 있는데 도중에 비가 내리면 하루 정도는 더 늦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때문에 부인이 낭군을 보내고 많이 적적하시지요?”

“그게 어디 마마 때문이겠습니까? 아마 마마께서 말리셨어도 그분은 기어이 자기가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을 거예요.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분은 승상 어르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거든요. 질투가 날 정도로 승상 어르신을 좋아한다니까요.”

“그런가요?”

홍문이 자신의 부친을 좋아한다는 것은 은호는 금시초문이다.

은호는 아직 홍문이 어렵고 불편하다.

홍문은 은호 앞에서는 말이 별로 없다.

입을 열면 가시가 돋친 말이 나오고 그 눈빛이 매서워서 은호는 그가 아직 어려운데 그런 그가 자신의 부친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는 하루 종일 승상 어르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거든요. 승상 어르신께서 이런 일을 이렇게 하셨다, 저런 일을 저렇게 하셨다, 이런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셨는데 놀라웠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조잘대듯이 하는 것이 상상이 가세요?”

“아니요. 전혀.”

은호가 살짝 웃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떠드는 홍문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잖아요. 유유상종이라고, 아마 승상 어르신과 제 낭군님이 비슷한 성격에 비슷하게 음험한 분들이라 잘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두 분 모두 아주 남을 죽이는 일은 잘도 하는 분들이시잖아요.”

은송의 말이 신랄했다.

제 지아비라고 봐주는 것이 없다.

“뭐, 아무리 성격이 나빠 봤자 폐하보다는 낫겠지만요. 마마는 대단하세요. 그 성격 나쁜 폐하를 대체 어떻게 데리고 사세요?”

마지막 화살이 애꿎은 하진에게로 향했다.

은송은 하진을 항상

‘성격 나쁜 폐하’

로 불렀다.

하진에게 당한 것을 아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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