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은호가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살짝 옆으로 내렸다.
혹시 하진이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이걸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몸을 잠시 뒤척였던 하진은 다시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가 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은호가 다시 서신을 열었다.
하도 읽어서 이제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지만 그래도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았다.
이 서신은 부친의 죄의 고백이자 참회이고 용서를 구하는 글이기도 했다.
[황궁에서 죽은 황후의 국상이 치러지던 사흘째의 밤에, 야음을 틈타 손님이 찾아왔단다. 아직 소년에 불과했던 어린 태자, 폐하께서 독기를 품은 눈으로 나를 찾아오셨지.
물론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오셨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때 정신이 없었단다.
그때 네가 무척이나 심하게 앓고 있었던 탓이었지.
너는 그때 무척이나 어렸었는데 열이 심하게 올라 도무지 내리지 않고 의원이 지어 준 약도 듣지 않아 나는 네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단다.
그때 폐하께서 찾아오셨지.
폐하는 나를 죽이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 담을 넘어오셨지만 너를 간호하느라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며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내려놓으셨지.
나를 죽이면 세상에 너 혼자 남는다는 것을 아시고 나에 대한 증오를 잠시 내려놓으신 거였지.
그분은 생모를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까닭에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내가 죽으면 너 혼자 남겨진다는 것도, 남겨진 아이가 얼마나 슬프고 서러운지도 잘 알고 계신 탓에 너를 위해서 나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셨단다.
그분이 말씀하셨지.
‘너 때문이 아니다. 네 딸 때문에 너를 살려 주는 거다. 이건 용서가 아니다. 나중에 이 빚은 반드시 돌려받을 것이다. 네 딸이 더는 네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반드시 네 목숨을 받으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 너를 잠시 살려 두는 것뿐이다.’
라고 말이야.]
그때의 하진을 은호는 가끔 상상해 보곤 했다.
소년이었던 하진,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자신.
열이 올라 끙끙 앓고 있던 어렸던 자신을 바라보며 하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끔은 궁금해진다.
자신들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던 시절, 그리고 하진이 자신을 여인으로 인식하기도 전부터 자신들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 후로 폐하는 가끔 찾아오셨지. 물론 남들의 눈을 피해 주로 밤에 말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유 없이 찾아오셨다고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단다.
폐하께서는 가실 곳이 없어서, 그 외로운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원수나 다름없는 나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 보렴.
지독하게 외롭지만 마음 둘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소년이 그 어미를 죽인 원수를 찾아와 새벽이 되도록 노려보고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그런 밤이 꽤 오래 지속되었단다.
그분은 가끔 그렇게 물으셨지.
‘이제 딸은 아프지 않는 것이냐?’
네 안부를 물을 때면 나는 항상
‘딸아이가 몸이 약해 기침이 끊이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단다.
그때의 너는 무척이나 약해서 단 하루도 병을 앓지 않았던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랬더니 그다음에 찾아오실 때는 손에 약을 들고 오셨더구나. 기침에 좋은 약이라고 말이다.
인정이 있는 분이셨다.
다만 그 인정을 쏟아 낼 곳이 없었을 뿐, 인정이 그 안에 있는 분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에 그분이 두 눈이 새빨갛게 되어 찾아오셨지.
그날이 그 생모 되시는 황후마마께서 세상을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던 해였단다.
아마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독기를 잔뜩 머금고 찾아오셨을 그분은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내게 왜 황후마마를 죽였냐고 따져 물었지.
왜 죽여야만 했냐고.
왜 그렇게 모질게 몰아붙여야만 했냐고.
일 년을 속으로 삭여 온 울분을 토해 놓을 때 그분의 옷깃을 잡은 것이 너였단다.
너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그때 그분의 옷깃을 잡고 네가 엉엉 울었지.
그때 너는 아마 그분이 우니 따라서 울었겠지만 그분에게는 아마 네 울음이 특별하게 닿은 것이 틀림없을 거다.
네 나이 때의 어린아이들은 누가 울면 쉽게 감정이 동화되어 따라서 우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지만 그분이 그걸 어떻게 아셨겠니.
그분이 생각하기에는 그저 그분이 울 때 네가 같이 우니 아마 위로가 되셨던 것 같았다.
그걸 볼 때 내 마음도 울컥거렸단다.
그 넓은 황궁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해 울어 주는 사람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더구나.
그분이 울 때 함께 울고, 그분이 울 때 옆에서 손을 잡아 줄 사람 한 명 없었을 거라는 사실에 내가 다 서러워지더구나.
오죽 외로웠으면 원수인 나를 찾아왔을까.
오죽 외로웠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울어 주는 것에 더 서럽게 울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내 눈시울이 젖는단다.
그때 네가 하도 울어서 결국에는 그분이 너를 품에 안고 달래 주어야만 했단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분은 더는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황궁에서 그분을 자주 뵈었지만 그분은 내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고 마치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딴사람인 것처럼 나를 그리 대하셨지.
그리고 그 즈음에 그분은 황궁 밖으로 자주 돌아다니셨단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는 황제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살길을 찾아 황궁 밖을 돌아다닌다는 소리도 있었고, 언제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니 방황하는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분은 절대로 방황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모르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아마 칠석의 밤이 되기 몇 달 전이었을 것이다.
삼월로 기억한다.
그분이 몇 년 만에 찾아오셨기에 그날 나는 바짝 긴장했단다.
그 당시에 그분은 이미 그분만의 세력을 규합하고 힘을 모으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황께서는 그분을 경계하고 계셨고 언제 선황과 그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단다.
누구라도 먼저 칼을 뽑으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선황을 모시던 내게 그분이 찾아왔으니 나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리고 그날 그분이 말씀하셨지.
‘내게 진 빚을 이제 갚아라.’
빚.
언젠가 돌려받겠다는 그 빚을 갚으라고 할 때 나는 그분이 내 목을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너였단다.
‘네 딸을 내게 다오. 그러면 너와의 은원은 모두 잊겠다. 네가 내게 진 죄는 네 딸을 받는 것으로 다 용서해 줄 것이니 네 딸을 다오. 네 딸을 내게 주고 너는 내 편이 되는 거다.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는 거다. 네 딸이 황후가 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너를 용서해 주겠다.’
뜻밖의 요구였단다.
‘나는 적어도 내 여자를 내 어머니처럼 만들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다.’
그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에 넘어간 것일까.
나는 너를 그분께 드리기로 약속을 했단다.
나는 항상 네가 걱정이었단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실 속의 꽃처럼 살아온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단다.
누구에게 너를 맡겨야 네 눈에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를 근심 걱정 시키지 않고 행복하게만 만들어 줄 사내가 어디 있을까 그런 사내를 늘 찾아 헤맸단다. 그런데 폐하의 요구를 듣고 보니 그분이라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너를 안고 너를 달래 주던 그분이라면 너를 평생 안전하게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분께 너를 드리기로 약속했지.
좋은 날을 잡아 혼인을 올리기로 했단다.
그건 내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단다.
나는 평생 선황을 섬겨 왔지만 그분은 선황의 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분께 너를 내어준다는 것은 선황에게서 등을 돌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단다.
선황의 입장에서는 나는 배신자가 되는 것이니 내가 입을 어떤 보복도 감수하고 나는 너를 그분께 드리기로 했지만, 그분과 나의 예정보다 빨리 문제의 날이 찾아왔고, 선황이 허를 찔러 너를 가로채 갔다.
그 이후는 네가 아는 그대로란다.
사랑하는 내 딸 은호야.
내가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단다.
세상에 완전하게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을 말해 주고 싶단다.
세상에 의인은 없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편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고, 자기 기준에서 정의도, 선도 결정되기 마련이란다.
나는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옳다는 판단을 내렸고, 내 기준으로 선한 일을 해 왔단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을 죽이고 울렸지.
폐하도 그럴 것이다.
폐하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정의 내리고, 선을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폐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울리겠지.
그리고 그것으로 너를 지키시겠지.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네게 알려 주고 싶은 한 가지는, 그것이란다.
아무리 잔인한 자에게도 의미는 있고, 사랑도 있고, 바라는 것이 있는 법이란다.
폐하께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네가 믿고 사랑하는 이 아비가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괴물인 것처럼 폐하도 누군가에게는 괴물로 비치겠지.
하지만 이 아비를 네가 끝까지 믿고 사랑해 주었듯이 폐하를 끝까지 믿고 사랑하렴.
그 잡은 손을 어떤 순간에도 놓지 말렴.
불완전한 이들이 손을 잡음으로써 완전해진다고 나는 믿는단다.
그리고 내 딸이, 그렇게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며 이만 내용을 줄이마.
기침이 나서 더는 붓을 잡고 있을 수가 없구나.]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난다.
아버지는 아마도 참회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변명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