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103화 (103/108)

103.

은호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어둠이 물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그런데도 눈이 떠졌다.

곁에는 하진이 잠들어 있었다.

금와에서 황궁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하진과 잠이 든 밤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하진은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한 모양이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질풍처럼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내다.

이 사내는 한번 결정을 내린 일에 주저함이 없고,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는 사내다.

이런 사내가 자신을 원하고 있고, 이런 사내를 자신이 사랑하게 되었다.

만약 이 사내가 이렇게 강한 사내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인연은 맺어질 수 있었을까.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처럼 제약이 많은 인연이 또 있을까.

그런데 이 사내는 그 모든 제약을 그 손으로 기어이 찢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사내가 만든 길 위를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이다.

이 사내는 계속 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걸 은호는 믿고 있다.

이 길은 아직 미완의 길이다.

자신과 이 사내는 완성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미완의 길을 걷는다.

걷고자 하는 길에 하나의 다리를 놓고 그 위를 걸어가는 것이 삶이라면, 이 사내는 자신의 삶에 다리를 놓아 주는 사내다.

이 사내가 놓아 주는 다리는 무척이나 견고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다.

그 견고하고 안전한 다리를 놓아 주기 위해서, 그 다리 위를 걸어가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 사내가 어떤 피를 흘리고 어떤 마음으로 먼저 앞서가는지 은호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 사내는 앞서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간다.

이 사내는 앞서 다리를 놓고 자신은 그 다리 위를 믿고 걸어간다.

이것이 자신들의 사랑이다.

은호는 하진을 믿는다.

하진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를 믿고 있다.

믿지 않으면 사랑할 수가 없다.

의심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은호는 요즘 황궁의 역대기를 읽고 있다.

밤에는 일찍 잠이 들지만 낮 동안에는 다른 할 일이 없어서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태교에도 좋을 것 같아 읽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제일 먼저 잡은 책이 황궁의 역대기다.

이 황궁의 오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었다.

이 황궁의 수없는 시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직 전부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삼분의 일 정도를 읽으며 은호가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그건 황궁의 역사는 의심의 역사라는 것이다.

의심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이용하면서도 서로를 버리지 못하고 함께 가는 것.

그것이 황궁의 역사였다.

그것이 어쩌면 부친이 말한 황궁의 괴물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어쩌면 하진이 말한 황궁의 독기일지도 모른다.

아비가 자식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자식은 아비를 원망하고 빼앗으려 들고, 아내는 지아비를 믿지 못하고, 사내는 제 여인을 의심하고 이용하려고 들고, 그런 무수한 세월이 반복되며 그것과 함께 황궁의 역사가 쌓여 내려왔다.

그곳에 신의라든가, 서로를 믿어 주는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는 꽃이 필 수 없다.

사람들은 하진을 가리켜 완벽한 사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완벽한 사내라 하더라도 그가 꽃을 피울 수 있는 땅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가 만든 다리 위를 걸어가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가장 완벽한 것은,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다.

그것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로 사람의 삶은 갈릴 수 있다.

하진에게는 자신이 있고 자신에게는 하진이 있다.

결국 하진과 자신은 서로를 구원했고, 서로의 삶을 완벽하게 세워 주었으며, 앞으로도 서로를 지탱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지금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할 것이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행복할 수 있을 것을 은호는 믿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이 사내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다.

이 사내 역시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을 안다.

은호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옆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사내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옆으로 손을 뻗어 작은 상자 안에서 곱게 접은 서신을 꺼냈다.

여러 번 읽은 탓에 꽤 너덜거리는 서신을 편 은호가 그것을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 이 서신에는 적혀 있다.

이것은 요양을 위해 낙향한 주이염이 은호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것을 은호는 읽고 또 읽었다.

이 서신 안에는 은호가 알지 못하는 하진이 담겨 있다.

하진은 은호가 그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 주지 않는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은호도 하진이 먼저 말해 주지 않는 것을 물어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걸 도와준 것이 부친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 서신 안에는 은호와 하진을 잇는 징검다리가 들어 있고, 이 서시 안에는 하진이라는 사내의 전부가 들어 있다.

그리고 부친의 죄도 들어 있다.

부친이 왜 자신을 하진에게 주기로 결심했는지도 이 서신 안에는 들어 있다.

은호는 이것을 하진에게 보여 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하진과 부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도 없다.

이것은 그저 더 사랑하게 도와주는 디딤돌일 뿐이다.

이것은 그저 더 품어 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등을 떠미는 손일 뿐이다.

이것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고, 이것이 없어도 품어 줄 수 있지만 이것이 있음으로써 더 사랑하고 더 품어 줄 수 있을 뿐이다.

잠들어 있는 하진을 다시 한 번 쳐다본 후 은호가 무릎을 세우고 서신을 펼쳤다.

이 밤에 잠에서 깼으니 이제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낮잠을 많이 자서 더 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의 과거를 따라 올라가며 그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행복하다.

서신은 이렇게 시작했다.

[사랑하는 딸아.]

그 글귀를 읽는 것만으로도 부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딸아.

부친은 책봉식에 오실까.

홍문이 내려간다 하니 반드시 모시고 돌아오겠지만, 부친의 병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호전되었을까.

부친은 병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오지 않는다.

그저 그곳의 풍경이나 그곳에서 사는 이야기에 대해 간간이 편지를 전해 올 뿐, 그 편지의 내용 중에 병에 대한 것은 없다.

[사랑하는 딸아.]

다시 한 번 그 글귀를 읽으며 은호가 붉어지는 눈시울을 닦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 번 읽었던 서신을 조용히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딸아.

이 편지를 네게 쓰기까지 내게 수많은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과, 이 편지를 지금 쓰는 일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아주면 고맙겠구나.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담장 안에 가두고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너를 지키기 위함인 동시에 나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네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 고백한다.

나는 네게 좋은 아비였지만 나는 너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잔인한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딸 은호야.

꽤 오래전 태자의 신분이던 폐하께서 나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 너는 잠들어 있었고 우리는 어둠에 숨어 누구도 모르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그분이 말씀하기를 너를 달라 하셨지.

내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폐하는 장차 황제가 될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 길이 피로 얼룩질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너를 그 길에 함께 걷게 하기는 싫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폐하께서 그러시더구나.

빚을 갚으라고.

이제 그 빚에 대해서 네게 말해야겠구나.

나는 폐하께 빚을 졌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그 빚은 사람을 죽인 빚이다.

그래, 딸아. 이 아비는 사람을 죽였다.

이 아비는 그동안 수도 없이 사람을 죽여 왔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살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내가 죽인 사람들 중에는 폐하의 생모도 계셨다.

그래, 내가 폐하의 생모를 죽였다.

네가 얼마나 놀랄지 상상이 가는구나.

폐하의 생모가 연못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은 바로 나였단다.

죽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모질게 말이다.

물론 그것을 원한 것은 선황이셨고, 나는 선황을 위해서 폐하의 생모를 사람이 처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단다.

그분의 친정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분의 친정 아비에게 누명을 씌워 목을 자르고, 그분의 형제들에게 유배와 사약을 내려 그 가문 자체를 멸문시켰고, 황궁에서 그분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단다.

누구도 그분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하게 했고, 그분이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연못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단다.

그분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나는 아무런 슬픔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단다.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전에도 나는 그런 일을 수없이 해 왔기 때문이지.]

은호가 잠시 서신에서 눈을 들었다.

하진이 몸을 뒤척였기 때문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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