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102화 (102/108)

102.

“네 탓이다.”

하진이 제 팔에 안겨 쌕쌕거리며 숨을 내쉬고 있는 은호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떨어뜨리며 속삭였다.

“누가 그런 꼴로 잠들어 있으라더냐.”

자는 여인을 덮친 핑계는 빈곤했다.

“그러고 자는데 어떤 사내가 가만히 있겠느냐. 고자가 아닌 이상.”

당사자인 은호는 숨만 가쁘게 내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데 지레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하진이 계속 핑계, 아니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불러도 깨지 않고 건드려도 깨지 않는 것을 보면 네가 참 큰일이다. 어느 놈이 와서 건드려도 모를 것이 아니냐.”

‘어느 놈’

이 와서 건드릴 이유도 없고, 황궁에서

‘어느 놈’

이 감히 건드릴 마음이나 먹을까.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말이다.

“나는 네가 깨면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너는 깨지도 않고 말이다.”

물론 은호가 깼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진은 너무 오래, 실은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하진의 기준으로는 너무 오래 굶주렸고 굶주린 사내 앞에 무방비 상태로 잠든 은호가 나쁜 것이라며 그렇게 사내는 자기 정당화를 했다.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하진은 여전히 자신과 열심히 싸우는 중이었다.

쌓인 욕망을 잔뜩 쏟아 낸다고 쏟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전 아래는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기는커녕 여전히 불끈거리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하진의 말이 평소답지 않게 많아졌다.

정신을 분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잖으면 다시 짐승으로 변해 제 품에 안긴 이 여인을 짓눌러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룻저녁에 두 번은 스스로 생각해도 야만적이다.

평상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은호의 몸 상태가

‘조심’

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회임이라는 것이 참 여러모로 귀찮은 것이라고 하진이 생각했다.

은호가 회임한 것은 이제 황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해서 은호의 회임이 비밀에 붙여졌었다.

은호가 회임을 한 것이 시기적으로 애매한 탓에 그 아이가 선황의 아이인지 자신의 아이인지 의견이 분분하며 시끄러워질 것이 뻔해서 일부러 황궁의 상황이 정리가 될 때까지 비밀로 해 두었지만 이제 더는 비밀로 해 둘 이유가 없어 공표해 버렸다.

은호의 회임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은 이중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더는 황궁 안에 은호가 잉태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선황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미친 발언을 할 인물들은 남지 않았다.

허연과 심창,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말끔히 숙청하며 그동안 하진과 공공연하게 대립각을 세워 온 귀족들을 전부 뿌리 뽑은 까닭이다.

그리고 후궁들의 암투로 인해서 은호의 태중의 아이가 위협받을 일도 없다.

어제 하진은 대전 회의에서 연환궁의 후궁들을 모두 출궁시키겠다는 뜻을 비쳤기 때문이다.

그런 하진의 뜻에 신하들이 누구도 반발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던 탓이다.

연환궁을 채우고 있는 후궁들의 대부분은 이번 숙청 대상인 귀족들의 딸이다.

그 아비 되는 자들이 숙청당하였는데 딸들을 후궁으로 남겨 둘 수 없다는 명분은 타당했고, 그 타당한 명분 앞에서 조정의 신하들 중 누구도 연환궁의 후궁들을 축출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이제 곧 연환궁 전체가 비워진다.

그렇게 되면 회임 중인 은호를 굳이 위협할 이들도 사라진다.

하진의 계획은 이 연환궁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물론 하진 이후에 다른 황제가 서게 되면 다시 후궁을 들이겠지만 적어도 하진 자신의 대에서는 후궁을 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 후궁이 없는 황제는 찾아볼 수 없지만 모두가 그랬다고 해서 자신도 거기에 따를 생각은 조금도 없다.

훗날 다른 황제가 연환궁을 다시 만든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때까지는, 적어도 자신이 황궁의 주인으로 있을 동안에는 이 황궁 안에 다른 안주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인을 위한 공간도 없을 것이다.

연환궁은 전체를 허물어 버리고 이곳을 넓은 정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은호는 머잖아 정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고 은환궁으로 거처를 옮겨 갈 것이다.

황제의 용종을 잉태한 황제의 유일한 여인이다.

이제 그녀가 황후가 된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반대를 할 것인가.

“뭐라고 말을 좀 해 보아라.”

하진이 제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은호를 쳐다봤다.

쌕쌕 숨을 내쉬던 은호는 이제 제법 고르게 숨을 쉬며 제가 베고 있는 하진의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매일 저녁 폐하를 기다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눈꺼풀이 언제 내려오는지도 모르는 채로 잠이 들어 버리는걸요. 그런데 이건 제가 자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는 거라고 어의가 말했어요. 태중의 아이는 잠을 많이 자는 잠꾸러기인데 아이가 잠들 때마다 저도 잠이 드는 거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잠꾸러기에 둔하다는 말은 제가 아니라 아이가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해요.”

은호가 강조한 부분은

‘매일 저녁 기다렸다’

는 대목이었다.

매일 저녁 기다렸는데 왜 오늘에서야 왔느냐는 우회적인 원망이다.

“어제까지도 제법 늦게까지 기다렸는데 오지 않으셨어요. 어제 너무 늦게 잠들어서 오늘 더 일찍 잠이 들어 버렸는데 오실 거라면 오신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해 주실 것이지 그러시지도 않고, 오지 못하신다면 오지 못하신다고 기별을 해 주시면 저도 차라리 기다리지 않고 편히 잠들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원망 아닌 원망을 말하며 은호가 눈웃음을 지었다.

은호는 다정하게 말을 했지만 듣는 하진은 여간 찔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며칠 동안 올 수 없다면 미리 기다리지 말라고 기별을 넣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었다.

물론 거기에도 이유는 있다.

오늘 밤에는 갈 수 있겠지, 오늘 밤에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갈 수 있겠지 하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이 전부 빗나가 결국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올 수 없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기별을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올 것이니 잠들지 말고 기다리라는 기별을 미리 넣지 못한 것은 오늘 일이 끝날지 어떨지 하진조차 미리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진에게도 그럴듯한 핑계거리는 있지만 은호의 원망이 더 이유가 충분했다.

“이제는 다 끝나셨나요?”

은호가 하진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넓은 사내의 가슴에 엎드린 채로 은호가 그 가슴에 팔을 괴고 얼굴을 뉘어 사내를 쳐다봤다.

“이제는 정말 다 끝내셨나요?”

“거의.”

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없으니 모든 일을 다 끝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의, 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머지는 이제 서서히 정리해 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곧 책봉식이 있을 거다.”

황후 책봉식이다.

다른 누구의 황후가 아닌 자신의 황후가 되는 것이다.

하진은 아직도 은호가 아비의 황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분노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제 짝이 되었어야 할 여인을 아비가 가로채었다.

항간에는 자신을 가리켜 패륜아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하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묻고 싶다.

누가 패륜을 저지른 것인지 묻고 싶다.

아들의 여인을 빼앗은 아비가 패륜인 것인지, 아니면 아비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은 아들이 패륜인 것인지 묻고 싶다.

자신은 금기를 어기고 아비의 여자를 빼앗은 것이 아니다.

아비의 여자를 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여자를 되찾았을 뿐이고, 자신의 여자를 되찾기 위해 아비를 죽였을 뿐이다.

누가 금기를 범했는가.

아비인가 자신인가.

누가 강도인가.

아비인가 자신인가.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강도라고 하고 금기를 범했다고 하지만, 주은호는 처음부터 제 여자였다.

저는 제 것을 지켜 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지키고 있고 앞으로도 지킬 뿐이다.

“황후가 되는 거다.”

“폐하.”

하진의 가슴에 엎드려 은호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만약 그 칠석의 밤에 제가 거리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폐하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네가 칠석의 날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네 집 담을 넘었을 것이다.”

“그건 강도가 하는 짓이에요, 폐하.”

“네 아비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너를 맞으러 가기로 말이다. 네 아비가 말해 주더냐?”

“편지에 적어 주셨어요.”

“아비가 보고 싶지 않으냐? 네 책봉식에는 참석을 해야 하니 잠시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릴까?”

“장거리 여행이 몸에 부담이 되실 거예요.”

“홍문이 네 아비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놈은 수완이 좋으니 네 아비를 무사히 도성으로 데려올 것이다.”

“폐하. 행복하세요?”

은호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하진이 입술을 열려다 말고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입을 열어서

‘행복하다’

고 말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진이 느끼는 이것은 그저 말로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런 행복이 아니다.

자신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빠졌던 부분이 채워지고, 모자랐던 곳이 메워지며 비로소 자신은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

은호가 자신에게 채워짐으로 자신은 미완의 괴물에서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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