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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99화 (99/108)

99.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는 거냐?”

하진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홍문을 쳐다봤다.

“심창을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란 말입니까?”

“너는 심창이 밀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냐? 심은송도 아는 것을 네가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폐하. 심 부인의 경우는 그 생부가 장사꾼이라 심창이 그 생부와 밀수로 엮여 있었던 탓에 심 부인도 그 증거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감쪽같이 감추면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감쪽같이 감추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것이 네 역할 아니더냐.”

“그래서 귀신같이 알아냈잖습니까.”

“그건 거래지.”

“거래든 뭐든 간에 결과만 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후궁에서 빼내 주기로 하고 그 증거를 받은 것이냐? 잠은 왜 같이 잔 것이냐? 갑자기 없던 욕정이 막 치솟더냐?”

“…….”

홍문이 하진을 째려봤다.

만약 황제만 아니었다면 주먹으로 한 대 쳤을 것이다.

물론 얌전히 맞고 있을 하진은 아니지만 말이다.

“심 부인이 반드시 확약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증거를 내놓지 못하겠다고 해서…….”

“아, 그래서 그 확약으로 같이 했다 그런 것이군. 심은송이 참 영악해.”

“…….”

심은송이 영악한 것은 홍문도 인정한다.

솔직히 홍문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모른다.

뭔가 휙 지나갔는데 이미 상황은 종료다.

“그래. 심 부인을 연환궁에서 빼내어 네게 하사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뭘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계속 데리고 살 거냐 아니면 보내 줄 거냐.”

“당연히 보내 줘야지 어떻게 데리고 살겠습니까.”

홍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

“여자를 건드리고 그냥 보내겠다고? 인간성이 썩었구나. 원래 그런 놈인 줄 알았지만 내 생각보다는 더 썩었어.”

“폐하.”

“안 건드렸으면 모르지만 건드렸으면 데리고 살아야지.”

“잘 모르는 여자와 어떻게 평생을 산단 말입니까? 그리고 심 부인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심은송에게 물어봤느냐?”

“그걸 왜 물어봅니까? 거래는 거기까지입니다. 저는 심창을 잡고 심 부인은 황궁에서 합법적으로 나오고. 그게 끝입니다.”

“나중에 다시 물어봐.”

“다시 물어봤자…….”

“좋은 여자를 얻는 기회는 일생에 단 한 번일 수도 있어. 심은송이 좋은 여자라는 건 아니지만 영악하고 자기 앞가림 잘하고 똑 부러지지. 아마 너하고 잘 맞지 않을까 싶은데. 너는 순진하고 가녀리고 눈물 많은 여자는 좋아하지 않잖아?”

그건 맞는 말이다.

무슨 말만 하면 울고, 혹은 너무 순진해서 나쁜 짓을 절대로 하지 못하고, 나쁜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을 이해도 못해 주는 그런 여자와 한집에 사는 것은 고문이다.

하진은 주은호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홍문 자신에게 주은호와 살라고 하면 아마 화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홍문은 주은호 같은 여자는 데리고 살라고 해도 거절하고 싶다.

너무 착하다.

그렇게 착한 여자는 평생 힘들게 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너무 착하면 온갖 고생거리를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약삭빠르고, 남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눈감아 주고, 손해를 봐도 져 주고 그러는 것은 체질상 성격상 맞지 않는다.

홍문은 져 주면서 살고 싶지 않다.

착한 짓을 하며 살려고 했다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이미 착한 짓은 버렸고, 질기고 오래, 그리고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으며 사는 쪽을 택했다.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하고 산 것은 그 때문이다.

혼인은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

거추장스런 것이 달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뭔가를 책임지게 되면 그만큼의 약점이 생기는 법이다.

책임진다는 것은 등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것은 걸음을 더디게 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은데 일부러 등에 무거운 짐을 자원해서 지고 싶지는 않다.

심 부인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하고 자신은 하진의 길을 옆에서 지원하면 되는 것이다.

“저는 혼자가 편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지체하지 마시고 환궁하셔야 합니다. 토끼 잡이가 다 끝났는데 사냥꾼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토끼들을 두고 다른 개들이 군침을 흘리게 됩니다. 틈은 많이 주면 화근이 됩니다. 아시지요?”

“알다마다. 그러면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제 환궁할 때다.

깨끗하게 청소된 황궁으로 돌아가 심창과 허연이라는 승냥이를 내몰아야 할 때다.

*

금와에서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오느라 힘들었다던 홍문의 엄살이 전부 들통날 정도로 금와에서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까웠다.

환궁하는 하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위연이었다.

홍문이 황궁을 비우며 위연에게 뒤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 위연이었다.

위연은 허연과 심창을 감옥에 구금한 상태에서 황궁의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엄중히 막았다.

위연이 황궁을 책임진 시간은 하루 온종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고작 하루지만, 위연에게는 일 년 같은 하루였다.

그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마마.”

연환궁의 연비전으로 돌아온 은호를 맞이한 것 역시 위연이었다.

위연의 역할은 하진이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황궁의 문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환궁이 이뤄지자마자 그 짧았지만 무거웠던 책임에서 해방되었다.

제법 막중한 책임에서 해방된 위연이 제일 먼저 은호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은호가 무사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도 할 겸 견아의 안부에 대해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연은 견아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원의 아이를 가진 것을 제일 먼저 안 것도 자신이고, 그녀가 도움을 요청해 온 것 역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루에게 그 사실을 말해서 그녀가 곤궁에 처해졌다는 사실이 더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은호가 견아를 데리고 옹주로 향했다는 사실을 위연은 눈치채고 있었다.

은호가 연환궁을 비우기 전에 견아가 위연을 몰래 찾아와서 은호와 함께 출궁할 거라는 걸 알려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온 은호의 곁에 견아가 보이지 않는다.

위연의 불안은 하진에게서 비롯되었다.

위연이 알고 있는 하진은 절대로 진원의 아이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연은 하진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해 왔다.

형제이고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더, 아니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하진과 가깝게 지냈고 하진의 신뢰를 받아 왔다.

가깝기 때문에, 친하기 때문에 그를 더 잘 안다.

하진은 진원의 핏줄에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을 사내다.

같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하진이 견아를 발견하고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원래 예정대로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 줬던가.

“무사하십니까? 큰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도 황궁에서 막중한 일을 하셨다면서요.”

“저야 문만 닫아걸고 있었을 뿐인데요. 복중의 아이는 무사합니까?”

“네. 저를 닮으면 약할 텐데 폐하를 닮아서 건강한 아이인가 봐요. 끄덕도 없는걸요.”

은호가 겪은 일은 험하다면 험한 일이다.

납치당했고 죽을 뻔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혼자 그곳을 빠져나와 생전 처음 말을 타고 달리기까지 했다.

만약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은호도, 복중의 아이도 위험했을 거라고 이루가 나중에야 말했었다.

그만큼 위험한 짓을 한 것이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아마 두 번 다시는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하진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마마…….”

위연이 잠시 망설였다.

견아에 대해 지금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위연의 망설이는 표정을 읽은 은호가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전하.”

“네?”

“견아 때문이잖아요. 그렇지요?”

“아, 그게…….”

“무사히 떠났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이를 가진 몸으로 혼자 여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혼자가 아니라면…….”

위연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사를 붙여 주기라도 한 것일까?

“견아는 그렇게 바라던 분을 만나서 같이 떠났어요. 아마 이제 더는 그분과 견아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설마…….”

견아가 바라던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진원 왕자.

옹주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진 사내.

그리고 이번에 허연이 난을 일으키며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극소수에게 알려졌지만 조금 전 환궁한 홍문에게 듣기로는 그는 죽었다고 했다.

하진의 칼에 죽었다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시체를 확인하고 태워 버렸다고 했는데, 살아 있다고?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신 거로군요.”

“네.”

“폐하께서 진원 형님을 살려 주시다니…….”

위연이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믿기지 않는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진이 진원을 살려 보내 줬다. 그 하진이.

하진이 변한 것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하진이 변했다.

그리고 하진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이 여인일 것이다.

주은호.

결국 한 송이의 꽃이 이 척박하고 사납고 험악한 곳에 뿌리를 내리더니, 이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비쩍 말라 죽어 버릴 것 같더니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 혼돈의 항아리와 같은 곳을 바꾸어 놓았다.

독기로 가득 차 있던 곳에 훈훈한 바람이 불게,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작은 꽃에 불과하지만 이 여인이 그것을 해낸 것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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