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꽃 98.
“조운현의 여식이냐?”
하진의 느긋한 물음에 홍문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푹 숙였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러면 우용균의 여식이냐? 우용균의 딸이 곱기는 했지. 깡마르고 위태위태한 것이 네 취향이었던 것이냐?”
이번에도 홍문이 고개를 저었다.
연환궁의 후궁 중 누군가와 사고를 친 것은 확실한데 지금 그게 누군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이루야. 네가 생각하기에는 누구일 것 같으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루는 당황한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홍문의 단짝이라고 여겼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홍문에게는 그럴 시간도 거의 없었다.
하진이 황궁을 비운 것은 고작 사흘 정도다.
그런데 그사이에 사고를 치다니 이건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예전부터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냐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였느냐?”
속에 품고 있었을 리는 없다.
그랬더라면 연환궁에 불을 지른다 어쩐다는 계획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쩐지 이상하기는 했지. 내가 후궁들을 전부 죽여 버리려고 금환궁에 모았을 때 네가 길길이 반대를 했었지 아마?”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미 홍문을 놀리는 재미가 들어 버린 하진이 이 재미있는 거리를 놓칠 리가 없다.
“서연무의 딸인가? 눈 아래에 점이 있는…….”
“언제 후궁들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보셨습니까? 관심도 없다던 분께서.”
“나는 원래 한 번 보면 전부 기억하지.”
홍문이 회심의 반격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풀이 꺾였다.
“그래서 누구냐? 말을 해 보아라. 내가 너를 위해 후궁 한 명 정도는 허락할 수 있다.”
황제의 후궁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선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 신하들에게 후궁을 내린 경우는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혁혁한 공을 세우거나 큰 상을 받을 일이 있거나,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경우에 황제가 후궁들 중에서 아리따운 여인으로 골라 그 신하에게 내리는 일이 있었다.
그런 것은 보통 황제와 신하 사이의 단단한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매개로 사용되기도 했다.
후궁 입장에서는 황자를 낳아 장차 미래의 황제의 모후가 되지 못하는 이상 강인사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권세 있는 대신의 아내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고 황제의 하사품이 되는 것을 기뻐하기도 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물론 아주 가끔 문제가 발생한 일도 있었는데 황제가 신하에게 하사한 후궁이 몇 달 뒤에 잉태를 했는데 그 아이가 황제의 아이인지 아니면 신하의 아이인지 판별할 길이 없어 결국에는 황제를 후견인으로 둔 신하의 자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에는 황제가 신하에게 후궁을 내릴 때는 동침한 적이 없거나, 동침한 지 오래된 경우에만 그 대상이 되었다고 하니 후궁을 신하에게 내리는 일이 그 정도로 빈번했던 것이다.
“누군지 말만 하면 내가 네게 그 후궁을 주마. 너도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 가정을 꾸리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야지.”
그리고 하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심창의 딸만 아니면 된다.”
그 불여우 같은 심창의 딸 심 부인.
은호를 잡아먹지 못해서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심 부인과 양녀를 궁으로 들여보내 제 일신의 양달을 꾀하고 있는 심창.
그 두 사람은 하진의 눈 밖에 이미 났다.
물론 심창의 딸일 리는 없다고 하진은 자신했다.
홍문이 심창을 얼마나 혐오하고 심창의 딸도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문의 표정이 이상하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눈알이 굴러다닌다.
“설마……. 심 부인이냐?”
그럴 리가.
심 부인일 리가.
“진짜 심 부인이냐? 심창의 딸?”
“저어, 그것이……. 그러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데…….”
맞다.
심 부인 심은송이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눈알이 상해도 그렇지 어디 여자가 없어서 심창의 딸을. 그런 불여우를 뭐가 어쩌고 어째?”
하진의 눈빛이, 목소리가 사뭇 거칠어졌다.
홍문은 생각에 실수가 없고 일 처리가 빠르고 교활한 것이 유일한 장점인데 그런 놈이 이런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하진이 화를 버럭 냈다.
“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난처해서 정말……!”
이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홍문도 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밀리면 정말 미친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다.
홍문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사정은 무슨 사정! 아랫도리의 사정?! 제대로 달리지도 않은 놈이 무슨 그럴 만한 사정!”
“저도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왜 그건 안 물어보시고……!”
때아닌 하진과 홍문의 흥분 가득한 말싸움에 지나가던 이들이 슬쩍슬쩍 눈길을 주자 이루가 손을 휘휘 저어 그들을 내쫓았다.
*
“그러니까 그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의 얼굴을 한 홍문이 하진을 노려봤다.
홍문은 원통하고 분통 터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만 잡았습니다, 손만. 제가 어떤 분처럼 칠석날 밤에 아직 혼인도 안 한 처녀를 건드리길 했습니까. 아니면 남의 신방에 몰래 들어가길 했습니까. 그냥 손만 잡았는데 아주 몹쓸 놈 파렴치한 취급을 하시다니…….”
그
‘칠석날 밤에 혼인도 안 한 처녀를 건드린, 그리고 남의 신방에 들어간’
사내인 하진이 홍문을 노려봤다.
“그게 다 폐하를 위한 일이었는데 자초지종은 들어 보시지도 않고 사람을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시고…….”
공동묘지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홍문도 나름대로의 핑계를 털어놓았다.
홍문 입장에서는 사정 설명이지만 하진이 듣기에는 핑계다.
홍문의 핑계는 이런 것이다.
원래는 연환궁을 사고를 위장해서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리려고 했다.
그러던 중에 하진이 납치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래 처리 일 순위는 견아라는 궁녀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연환궁의 후궁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하진의 변고를 듣고는 우선순위가 누가 하진을 납치했는지 그 배후를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진을 노릴 만한 인물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허연이었다.
딱 맞아떨어졌다.
진원 왕자의 자식을 가진 궁녀, 그리고 하진의 납치. 허연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허연을 가택 감금시키고 그 저택을 전부 샅샅이 수색해서 허연이 금와 수령과 내통한 증거를 찾아내고 그가 사병들을 옹주와 금와로 이동시킨 것까지 찾아냈다.
진원 왕자가 살아 있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허연을 압박해서 하진과 은호를 어디에 잡아 두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는데 하진과 은호는 알아서 자력으로 탈출했다.
몸 상한 곳 없이 무사히 도망친 것은 다행이지만 자신이 구해 냈다는 생색거리는 사라져서 홍문도 살짝 당황했었다.
그렇게 허연은 처리했지만 아직 심창이 남아 있었다.
홍문의 생각에는 허연을 처리할 때 심창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가장 완벽했다.
하진이 심창과 허연을 조정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시키기 위해서였다.
어느 한쪽이 권력을 잡고 그 비중이 높아지면, 힘은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고 한쪽으로 기운 권력만큼 경계해야 할 것도 없다.
선황이 외척 세력을 배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진의 경우는 외척이라고 해 봤자 은호의 아비인 주 승상밖에 없고 주 승상은 건강을 위해 요양을 하고 있는 중이니 견제할 것이 없지만 심창과 허연은 달랐다.
명분 없이 내칠 수도 없고 어느 한쪽이 명분이 생겨 내치게 되면 다른 한쪽이 남은 권력을 독식하게 된다.
허연을 자르면 그 권력은 심창에게로 기운다.
더군다나 심창은 그 양녀를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허연을 처리할 때 심창도 처리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명분이 없다.
그때 그 명분을 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심 부인 심은송이었다.
[나를 황궁에서 내보내 주겠다고 하면 내가 너를 돕겠다. 내 양부의 약점이 필요하다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심 부인은 그렇게 홍문에게 거래를 제안해 왔다.
똑똑하고 당찬 여자였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기회가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을 정도로 영악한 여자였다.
심 부인이 영악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홍문은 그 여자가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었다.
[내 양부께서는 욕심도 많고 야망도 많지만 그에 비해 성격은 비열해서 도무지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지. 이래 봬도 장사꾼의 딸이라 상대방의 머릿속을 읽는 것 정도는 잘 하니까. 내가 필요 없어지면 언제라도 나를 내칠 수 있는 인간이라 나도 살길을 나름대로 마련해 놓으려고 입궁하기 전부터 몇 가지 약점들을 모아서 가지고 들어왔거든. 예를 들면 내 양부가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밀수에 손을 대고 있다던가 하는 것 말이야.]
심 부인은 심창의 양녀가 된 직후부터 심창과 관계된 불법적인 것들에 대한 증거를 몰래 모아 놓았다고 했다.
심창의 집에서 양녀로 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모은 것이다.
물론 장사꾼인 심 부인의 친부가 그것을 도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장사꾼의 본질이라며 심 부인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말했다.
[그것들을 줄 테니 나를 여기서 내보내다오. 어차피 폐하의 승은도 입지 못할 것, 나는 강인사에서 늙어 죽기는 싫다. 연비마마께서 후궁들을 내보내 주신다고 하셨지만 폐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겠느냐. 폐하께서 후궁들은 전부 내보내겠다고 하면 딸들을 들여보낸 귀족들이 들고일어나겠지. 폐하께서도 그런 부담은 지기 싫으시니까 너를 이용해서 연환궁에 불을 질러 모두 죽이려 한 것이 아니냐. 내가 틀렸느냐?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는 못 죽는다. 여기서 이렇게 살지도 않을 거다. 나는 나가야겠고 너는 나를 내보내 줘야겠다.]
그리고 심 부인이 제안한 것이 바로,
[폐하께 간청해서 나를 달라고 네가 청하면 된다. 황제께서 후궁을 신하에게 내린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것이었다.
[나를 네 아내로 달라고 하란 말이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