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97화 (97/108)

97.

“제가 체질상 말을 못 타는 체질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물 아래로 떨어지면서 골반을 크게 다쳐서 딱딱한 의자에도 오래 앉지 못하고 특히 말안장, 흔들리는 말 위에는 절대로 못 앉아 있는 것을 잘 아시지요?”

한번 시작되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홍문의 잔소리를 잘 아는 이루는 이미 황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 제가, 말을 타고, 여기까지 생고생을 하면서 왔는데, 폐하께서는, 제가 왔다는 걸 알면서도, 참 여유 있으십니다.”

“말도 타 보니 재미있지?”

하진이 딴청을 피웠다.

“폐하.”

“그래. 허연은 어떻게 되었느냐?”

지금 정도에 말을 끊지 않으면 홍문은 그동안 서러웠던 것을 전부 끌어와서 쏟아부울 것이 뻔했다.

“돌아갈 때는 가마를 태워 주마.”

넌지시 꿀을 던져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황제의 가마를 아무나 타는 줄 아느냐?”

꿀을 줄 때는 특상품의 꿀로 줘야 한다.

“너니까 특별하게 태워 주는 것이다.”

평소에 하지 않는 애정을 한 숟가락 듬뿍 얹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징그럽습니다, 폐하.”

애정이 조금 과했다.

“그래서 허연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죄를 자백하더냐?”

“폐하의 서신을 받은 직후에 허연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허연이 감춰 둔 사병들을 찾아냈고, 허연이 역모를 공모한 증거 역시 찾아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허연의 사주를 받아서 폐하를 납치했다고 증언해 줄 허연의 사병들이 있으니 이제 허연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확실하게 허연은 끝났습니다.”

“죽일 생각이냐?”

“이번에는 죽여야 합니다. 더는 인정을 베풀어 줄 생각은 마십시오. 화근의 싹은 확실하게 잘라야 다음 비가 와도 그 싹이 다시 자라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폐하.”

홍문이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무엇을 물을지 하진이 이미 예상했다.

“진원 왕자는 정말 죽었습니까?”

“죽었어.”

“시체는 왜 발견이 되지 않는 걸까요?”

“까마귀가 먹어 치웠겠지.”

“폐하.”

“들개라던가.”

“진원 왕자는 살려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내 형이다.”

하진이 홍문에게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금 하진은 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고 홍문은 서서 열심히 말하는 중이었다.

하진이 앉으라고 그 앉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자 어쩔 수 없이 홍문이 조심스럽게 앉았다.

“살려 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유라는 것이 워낙 주관적이라서요.”

“머잖아 은호가 아이를 낳겠지.”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앞으로 태어날 폐하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화근은 더 확실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아마 은호와 나는 아이를 꽤 많이 나을지도 모르지.”

“뭐, 정력이 넘치시니까요. 다른 후궁을 들이실 것도 아니니 정력 넘치시는 페하를 연비마마 혼자 감당하셔야 할 테고, 그렇다 보면 연비마마의 배가 부르지 않은 날을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을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이들이, 나와 은호의 아이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죽이려든다면 나는 무척이나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은호는 당연히 슬퍼하겠지.”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의 부왕께서는 자식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기뻐하시고 또 싸움을 붙이신 분이시니까요.”

“나는 그런 괴물은 되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겠지요.”

“아비가 괴물이라서 괴물을 낳았다.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낳으면 괴물을 낳겠지. 나는 그것을 내 대에서 끊어 버리고 싶다. 나는 괴물로 태어났지만 나는 정상적인 아비가 되어 내 아이들을 낳고 싶다.”

하진의 바람은 그것이다.

괴물은 괴물을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는다.

아비는 괴물이었고 자신도 괴물이었다.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그만 괴물이고 싶다.

괴물의 삶은 이제 끝내고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이 되어 사람을 낳고 싶다.

자신이 낳는 아이들은 괴물이 아닌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게 하고 싶다.

고작 이런 것이 소원이다.

황제의 자리, 막강한 권력, 화려한 삶. 이 모든 것들보다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람다운 삶이다.

은호와 함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지금 하진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이제는 사람처럼 살 생각이다.”

하진의 말에 홍문이 더는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지다가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하진이다.

“허연은 그리되고, 원래 하려던 것은 어찌 되었느냐?”

원래 홍문이 하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하진이 일부러 옹주 시찰이라는 명분으로 황궁을 비웠다.

일명 황궁의 청소.

황궁, 특히 연환궁에 불을 질러 그 안의 후궁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태워 죽이고 그참에 견아라는 후궁도 태워 죽인다는 무서운 계획을 홍문이 꾸미고 하진이 허락했었다.

주 목적은 진원 왕자의 아이를 품은 견아라는 궁녀를 깨끗하게 처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귀족들의 입김을 등에 업고 입궁한 후궁들을 말끔하게 정돈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하진은 연환궁에 후궁들을 들이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주은호를 후궁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귀족들과, 그중에서도 특히 심창과 허연과 합의를 한 것이다.

화비의 죄를 묵과해 주고 허연을 관직에 그대로 두는 조건과 심창의 딸을 비롯해서 귀족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전부 입궁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은호를 강인사에서 황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런 조건으로 합의하지 않았더라면 귀족들은 은호가 다시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극구 반대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자기들의 딸을 후궁으로 받아 주지 않으면 주은호도 후궁이 될 수 없고, 주은호를 원하면 자기들의 딸도 후궁으로 받아야 한다는 귀족들의 요구를 하진이 수락한 끝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하진이 강인사에 있던 은호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황의 황후, 그리고 선황이 죽던 자리에 같이 있던 인물.

그것만으로도 은호는 다시 궁에 올 수 없었다.

그걸 하진이 기어이 데려온 것이다.

그 때문에 하진은 귀족들이 자신을 패륜아라고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안다.

패륜아. 천륜을 어긴 자식. 금수만도 못한 황제.

그런 비난이 자신의 뒤에서 소리 없이 번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계모를 품은 망나니라는 욕설까지 자기들끼리 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극소수만 알고 있지만 은호가 황후이던 시절부터, 은호가 자신의 계모이던 그때에 이미 자신은 은호를 안았다.

아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을 때 자신은 기어이 은호를 제 여자로 만들었다.

지금 제게 쏟아지는 손가락질과 비난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죄를 지을 만큼, 그리고 그 죄에 죄를 더하고, 그 더한 죄 위에 더 중한 죄를 몇 겹이나 더 쌓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주은호를 원한다.

죄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 지옥 아랫목에 떨어지게 되더라도 주은호를 원하는 이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채워진 연환궁의 후궁들을 언제까지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었다.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한 후궁들이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알지만 여자들의 한은 때때로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그 때문에 은호가 다치는 일이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은호에게는 누구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눈에 거슬리는 연환궁의 후궁들을 전부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했다.

귀족들의 요구대로 그들의 딸을 후궁으로 받아들여 줬지만, 불미스러운 사고로 연환궁에 불이 나서 전부 타 죽었다면 귀족들도 더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수십 수백 명이 타 죽은 연환궁을 다시 세우고 거기에 다른 후궁들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획된 것이다. 연환궁 화재 사건은.

그렇게 되었어야 했지만 허연이 일을 꾸미는 바람에 약간 어긋났다.

“불이 났느냐?”

“그것이……”

홍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만 봐도 하진은 대충 감 잡았다.

불은 지르지 못했던 것이다.

연환궁은 멀쩡하고 후궁들도 멀쩡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기분이 좋다.

황궁을 떠나올 때는 연환궁의 후궁들이 전부 타 죽는 편이 시원할 거라고 생각하며 떠나왔는데 지금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다.

그사이에 자신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너도 실수할 때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허연의 일을 처리하느라 기회를 놓친 것이냐.”

하진이 괜히 홍문을 놀려 봤다.

“그것이, 그러니까, 그것이……”

그런데 홍문이 평소와는 다르게 진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을 못 한다.

평소의 홍문이라면

‘허연의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일을 할 틈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몸이 열 개입니까?’

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홍문의 반응은 영 수상하다.

뭔가 엄청나게 잘못을 저지른 그런 표정이다.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그 말에 홍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질렀군.’

하진이 짐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그것도 연환궁과 관계된 일 중에서 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야 저렇게 얼굴이 새빨개질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것이 없다.

홍문이 연환궁의 후궁과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없을……

“후궁과 잤느냐?”

없겠지만 그래도 물어는 본다.

그리고 그 순간 홍문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하진이 눈을 껌뻑였다.

잤구나, 잤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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