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96화 (96/108)

96.

“태몽?”

잠에서 깨어난 은호가 건넨 말에 하진이 살짝 당황했다.

은호가 아이를 가진 것은 알지만 갑작스레 나오는 태몽이라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은호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하진은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호는 아직 외견상 변화가 없다.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배가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의가

‘회임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아랫배에 손을 얹어도 태동 같은 것이 느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은호의 태중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 그게 실감이 날 리가 없다.

다만 은호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을 뿐이다.

아이가 썩 많이 달가운 것도 아니다.

물론 아이가 싫다는 것이 아니지만 반가운 것과 달갑지 않은 것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다.

황제의 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마냥 은호의 회임을 기뻐할 수 없는 것이 하진의 입장이다.

은호와 자신의 아이는 기쁘지만, 황궁에서 아이가 무사히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 얼마나 험악한 일인지, 권력을 탐하는 수많은 자들이 아이를 이용하려는 것도 알고 있어서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황궁은, 아비와 아들이 서로와 서로를 죽이는 살을 타고 태어나는 곳이다.

자신과 은호의 아이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 거라고 다짐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는 황제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고 아들은 아비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아비가 가려는 길과 아들이 가려는 길이 항상 같으라는 법도 없다.

사람은 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각이 원하는 것이 다르고, 이루려는 꿈이 다르고, 같이 하는 사람들이 다르다.

목적과 과정과 모인 사람들이 다르면 결국에는 길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다른 과정의 모든 것에서 아비와 아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나고, 갈등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든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지만, 이것은 수백 년 동안 반복되어 왔던 황실의 저주다.

기뻐하면서도 염려해야 하고, 염려하면서도 기쁘고.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곧잘 말씀해 주셨는데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 반지 꿈을 꾸셨대요.”

“반지?”

“어머니는 원래 자매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를 가졌을 때 어머니 꿈에 어렸을 때 죽은 언니가 나타나서 어머니 손에 반지를 얹어 준 거예요. 홍옥이 박힌 보석 반지요.”

“그리고 네가 태어났다? 홍옥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누가 제게 반지를 줬어요. 홍옥이 박힌 작은 반지였어요.”

“누가 줬을까? 사내놈은 아니겠지?”

하진이 짓궂게 웃었다.

그 미소를 올려다보는 은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사내인데…… 어쩌지요?”

“어떤 놈이지?”

꿈속이라도 기분 나쁘다.

사내놈이 은호에게 반지를 줬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은호에게 그런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잘생긴 사람?”

은호도 장난기가 돌았다.

꿈속에서 보석 반지를 제게 준 것은 하진이다.

소년이었던 하진.

실제로 그런 반지가 존재하진 않겠지만 홍옥 반지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나 본 적 없던 소년 하진이 자신에게 그 반지를 준 것은 은호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있다.

꿈속에서 소년 하진은 우는 걸 보고도 달래 주지 않는다고, 위로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었다.

그러면서도 제게 반지를 쥐여 줬다.

반지의 의미는 많이 있겠지만 사내가 여인에게 반지를 주는 것은

‘속함’

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라는 뜻이 아닐까.

하진은 눈물이 없는 사내다.

세상 무엇으로도 울지 않는 사내다.

그러나 그런 하진도 소년 시절에는 울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울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은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던 하진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몰랐던 그때,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그때 하진은 어머니를 잃고 울었을 것이다.

소년이었던 하진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세상의 전부를 잃고 우는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였겠지만 누가 그 소년을 위로해 주었을까.

아무도 위로를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도.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에게 슬프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표현도 못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약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았겠지.

그런 사내가 제게 왜 위로를 해 주지 않냐고 화를 내는 것은, 그 사내가 자신에게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리라.

자신에게는 계속 숨겨 왔던 그 약한 모습을 보인 사내는 자신을 그의 안으로 받아들여 준 것이리라.

그리고 반지를 건네주며 그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고 부탁한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미의 열매는, 그의 자신의 아이다.

각각 다른 곳에서 피어난 그와 자신이 만나 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것.

그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 그의 외로움과 자신의 외로움, 그의 삶과 자신의 삶이 만나 또 다른 생명을 피워 냈다.

아이는 이 사내와도 다르고 자신과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뿌리에는 자신이 있고 이 사내가 있다.

이 사내를 만들어 온 모든 과정과 자신을 만들어 온 모든 과정이 만나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꽃을 피우고, 그 꽃이 어떤 모양으로 꽃망울을 터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모른다.

예측할 수 없지만 예측할 수 없어서 더 기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진의 염려를 은호는 안다.

하진의 마음도 은호는 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염려해서 가둬 놓았어도 결국 자신은 하진을 만났고, 황제가 하진보다 먼저 자신을 가로챘어도 자신과 하진은 기어이 만나 지금 이렇게 결실을 만들어 냈다.

사람이 염려는 할 수 있지만 그 염려가 다가올 미래를 바꿀 수는 없고, 사람이 걱정은 할 수 있지만 그 걱정이 모두 나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루어져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더라도, 그 과정이 험악하더라도 결국에는 만나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꽃을 피우게 되어 있다.

하진이 태어날 아이를 염려하더라도 그 아이는 굽이굽이 돌더라도, 가끔은 꽃샘바람을 맞더라도, 혹은 거센 폭풍우에 휘말리더라도 언젠가는 그 아이만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홍옥은 붉고 아름답다.

피처럼 붉고 아름답다.

피처럼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뿌리가 몸살을 앓아야 하는 것처럼 삶이 꽃을 피우려면 충분히 아파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진이 겪어 왔던 것이, 하진과 만나 자신이 겪은 것들이 어쩌면 자신들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몸살을 앓았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태몽이다.

은호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머잖아 태어날 이 아이의 삶이 홍옥처럼 아름다울 것을 예언해 주는 꿈이라는 것을 안다.

이건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가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다.

반드시 아름답게 피어날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러면 난가? 잘생긴 사내라면?”

하진의 대답에 은호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이 사내가 이렇게 짓궂은 농담을,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내라는 것을 또 누가 알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내라는 것을 누가 알까.

“맞췄어요.”

하진이 입술을 가리고 있는 은호의 손을 걷어 내리고 다시 그 입술에 입을 맞추려고 할 때였다.

“폐하.”

군막 밖에서 하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와 하진이 잠시 멈칫했다.

얄미운 목소리였다.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아무도 방해를 하지 않으니까, 그만 좀 나와 주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먼 길을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도 있으니까요.”

“저놈을.”

하진이 미간을 구기자 은호가 그런 하진의 허벅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지며 하진에게 눈짓했다.

얼른 나가 보라는 뜻이다.

자신은 이제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놈의 목을 칠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홍문을 누구보다 신뢰한다는 것도 안다.

이 사내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홍문이 있고, 이루가 있고, 그리고 자신이 있다.

이것만으로도 황궁은, 봄이 오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입을 모아 황궁에는 봄이 없다, 황궁은 저주를 받았다, 황궁은 정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신뢰하는 이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황궁에는 이미 봄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시작된 봄은 이제 황궁을 뒤덮을 것이고, 머잖아 황궁은 따뜻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봄꽃이 가득하고, 웃음이 가득한 그런 곳.

그리고 태어날 아이는 그곳에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날 것이고, 그 아이가 자라며 보는 황궁은 하진이 자라며 보는 황궁과는 무척이나 다를 것이다.

그 아이가 자라며 만나는 황궁의 사람들 역시 하진이 본 사람들과는 다르고, 그 아이가 만나는 세상은 하진이 자라며 만난 세상과는 무척이나 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봄을 앞당기기 위해 지금은 하진을 군막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얼른 나가 보세요.”

이렇게 등을 떠밀어서 말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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