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95화 (95/108)

95.

은호는 깜빡 잠이 들었다.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든 은호를 내려다보며 하진이 조용히 웃었다.

그때 임시로 세운 군막의 휘장이 걷혔다.

“쉿.”

하진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이루에게 조용하라고 표시했다.

하진은 옹주로 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금와의 관으로도 가지 않았다.

금와의 관에서 다시 준비한 객잔도 당연히 거절했다.

지금 금와의 관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황제가 금와의 객잔에서 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금와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수 있다.

비록 그 일에 동참한 것이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역모가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역 전체가 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황제의 입에서 어떤 처분도 내려지지 않고 있지만 언제 황제가 대죄를 내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금와의 관리들은 그저 숨 죽여 기다릴 뿐이었다.

하진은 지금은 금와에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생각도 물론 아니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황권을 우습게 아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 자들을 하나둘씩 묵인하면 결국은 작은 불씨가 거대한 화마가 되어 전부를 집어 삼키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것을 방치해 두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

하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루도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루도 하진도 혹시나 은호가 깰까 봐 조용히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홍문이 도착했습니다.”

“직접 온 것이냐?”

“네.”

“그놈이 말을 타고?”

“안색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말을 못 타는 놈이 말을 타고 여기까지 왔으니 죽을 맛이겠지.”

“나름 빨리 오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두 사내가 소곤거리며 대화를 이어 갔다.

대화 중간에 은호가 몸을 뒤척이자 두 사내의 대화가 끊어졌다.

은호가 다시 곤히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두 사내가 다시 조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호가 자고 있는데 어떻게 나가라는 것이냐. 내가 움직이면 깰 텐데.”

“그렇긴 하지만…….”

“많이 지쳐 있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말을 타셨으니까요.”

“말은 타 본 적이 없었을 텐데…….”

“용감하게 달려오셨습니다.”

“나는 못 본 것을 네가 봤구나.”

하진의 말에 이루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별것이 다 송구하다 하는구나.”

“사내가 못나면 여인을 고생시키는 법이지. 나처럼 말이다.”

“폐하.”

“은호의 손을 보았느냐.”

하진의 말에 이루의 시선이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은호의 손을 향했다.

그녀의 손톱과 손끝이 엉망이었다.

“바닥을 뜯어내느라고 손이 이 지경이 되었다 하더군. 상상이 가느냐? 은호가 말이다. 무슨 말만 하면 겁부터 먹고, 노려보면 기절부터 하던 은호가 용감하게 바닥을 뜯어내고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말을 타는 것을 말이다.”

“원래부터 용감하셨던 분이십니다.”

“알지. 알아. 내가 잘 알아.”

하진이 제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은호를 내려다보며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지.”

“홍문에게 기다리라고 하겠습니다.”

“말을 타고 와서 힘들 것이다. 조금 정도는 쉬라고 해. 황궁의 일을 잘 끝냈으니 여기까지 직접 왔겠지. 그놈 성격상 일을 끝내지 않고 황궁을 떠날 놈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겠지요.”

“뭘 얼마나 자랑하고 싶어서 내가 돌아가길 못 기다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자랑은 조금 나중에 하라고 하고, 지금은 좀 쉬고 있으라고 이르거라.”

“네, 폐하.”

이루가 뒤로 물러나 다시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하진이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든 은호의 이마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이마를 만져도 은호는 깨지 않았다.

하진의 손끝이 은호의 이마에서 코끝으로 미끄러지다가 그녀의 입술에서 멈췄다.

그녀가 내쉬는 작은 숨이 하진의 손가락을 살랑거렸다.

그 가벼우면서도 포근한 감각이 좋아서 하진이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어여쁘다.

어떻게 이렇게 어여쁠 수 있을까.

너무 어여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은호야.”

하진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촉촉한 입술을 문지르는 손끝에 기분 좋은 열기가 감겨 왔다.

“너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너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도, 어떤 권력으로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하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은호다.

“나는 너를 위해서는 바보가 되어 줄 수 있단다.”

은호를 위해서는 바보도 되어 줄 수 있고, 손해도 볼 수 있고 어울리지 않는 자비와 아량도 베풀어 줄 수 있다.

은호를 위해서다.

자신이 착해서도 아니고, 자신이 인정이 많아서도 아니고, 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은호가 웃고 은호가 좋아한다면 자신의 고집을 꺾고 은호를 위해 뭐든지 양보해 줄 수 있다.

그걸 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알아주면 좋겠다.

그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약해지는지 알아준다면,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다.

천천히 몸을 숙인 하진이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던 촉촉한 입술에 제 입술을 내렸다.

살며시 입술을 포개자 은호가 내쉬는 숨이 하진의 입술 안으로 스며들었다.

가볍게 붙인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하진이 은호의 속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며 포갰던 입술을 떼놓았다.

그러자 은호의 눈꺼풀이 살며시 올라왔다.

“왜 벌써 깼느냐. 내가 깨운 것이냐?”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

“피곤하다길래 내 다리 위에 누워 있으라고 했더니 바로 코를 골더구나.”

“코를…… 골았다구요?”

코를 골았다는 말에 은호가 당황해서 두 손으로 코를 가렸다.

“심하게 골더구나. 무슨 소리인가 해서 이루가 들어올 정도로 말이다.”

“설마요…… 설마 제가 그렇게…….”

은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를 놀리는 재미가 든 하진이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

“코만 골았으면 말을 하지 않지. 이도 갈고…… 침도 흘리고…….”

“폐하. 놀리지 마시어요.”

“정말인데? 그래서 내가 네 침을 닦아 주려고 이렇게 몸을 숙였다가…….”

하진이 다시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네 고약한 입술을 막아야 침을 흘리지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입을 막았지.”

그 말과 함께 하진이 은호의 입술을 다시 훔쳤다.

“으응…….”

츄릅, 츄릅, 입술을 빠는 소리가 두 사람의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하진의 손이 은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은호의 손가락을 얽으며 처음에는 가볍게 맞물렸던 입술이 점점 더 깊숙하게 이어졌다.

“응, 으응…….”

은호가 제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있는 하진의 손을 꽉 쥐었다.

은호는 자신이 자면서 이를 갈고 침을 흘렸다는 하진의 짓궂은 말을 믿지 않지만 지금은 제 입술을 타고 타액이 흘러내리는 것을 인정했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몽롱한 머릿속이 뿌연 열기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꼭 꿈의 연장인 것만 같았다.

하진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은호는 꿈을 꿨다.

아주 짧게 잠든 것 같지만 그사이에 은호는 꿈을 꿨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아프고 조금은 행복한 그런 꿈이었다.

꿈속에서 하진은 아직 소년이었고 자신도 어린 소녀였었다.

꿈속에서 하진은 울고 있었고 그런 하진을 보며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해 주려고 했었다는 것을 은호가 떠올렸다.

물론 하진이 울 리도 없고 자신도 하진을 보며 그렇게 울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참 이상한 꿈이었다.

한참을 울다가 울음을 그친 하진이 제게 해 준 말을 은호는 잠에서 깬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울면 달래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너는 왜 내가 울어도 그렇게 보고만 있지? 연민이라는 것도 없지?]

꿈속에서도 하진은 그렇게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었다.

아니, 꿈이라서 그런 하진을 본 것일 수도 있다.

원래 꿈은 마음의 반영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진과의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그런 꿈을 꿨을 수도 있고, 하진이 진원 왕자를 죽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것이 풀린 게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눈을 떠 보니 소년 하진이 아니라 진짜 하진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게 말을 걸어 주는 순간 은호는 안도했다.

자신은 이 사내의 곁에 있다.

꿈속의 여인처럼 자신은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

꿈속의 여인처럼 자신은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 은호가 꾼 꿈은 길고도 짧았다.

모르는 여인이 나와서 연못에 빠져 죽는 것을 봤고 하진이 우는 것도 봤다. 여인이 죽은 것 때문에 하진이 울었을 거라는 생각은 꿈속에서도 했다.

꿈속에서 하진은 소년이었고 자신은 지금의 생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진에게 뭐라고 말을 해 주려고 했었다.

울지 말라고, 괜찮다고, 나중에 더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그렇게 말해 주려고 할 때 꿈에서 깼다.

제가 연민이 없다며 투덜거리던 소년 하진에게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그를 얼마나 위로해 주고 싶은지 말하기도 전에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깨기 전에 소년 하진이 제 손을 꽉 잡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 손이 제 손에 뭔가를 쥐여 줬었다.

그건 작은 반지였다.

하진이 제 손에 반지를 얹어 주는 순간 꿈에서 깼다.

“하아…….”

하진이 입술을 떼 내자 은호가 제 손바닥을 확인했다.

당연히 반지는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에 남은 여운은 그대로였다.

“저어, 태몽을 꾼 것 같아요.”

입술을 뗀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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