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옹주로는 가지 말자구나.”
제 상처를 싸매 주는 견아를 보며 진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견아는 여벌 옷이 들어 있는 보따리에서 나중에 갈아입으려고 했던 옷을 찢어 그것으로 진원의 상처를 싸매고 있었다.
진원의 상처는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깊지는 않지만 이대로 계속 피를 흘리면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는 되었다.
살려 준다고 했지만 하진이 마지막까지 그렇게 친절한 배려는 베풀어 주지 않은 것이다.
“옹주로 가지 않으시면 어디로 가시려구요?”
견아는 옹주로 가서 은호가 말한 사람을 기다리려고 했었다.
은호가 견아를 위해 옹주에 사람을 준비시켜 놓았고 그 사람을 만나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기로 했었다.
“옹주에는 내 외조부님이 심어 놓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볼 것이니 옹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견아야, 네게는 미안하지만…….”
“미안할 것이 무엇이 있어요. 살아 계셔 주신 것만으로 저는 이미 감사한걸요.”
“네게 편안하고 호사스런 삶은 주지 못할 것 같구나. 고생만 시킬 것 같아 벌써부터 내 마음이 무겁다.”
“저는 손발을 움직이며 사는 것이 더 좋아요.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하고 좋은걸요. 괜히 좋은 옷 입고 편안하게 살면 그게 더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전하와 함께하게 된 것만으로도 꿈만 같은걸요.”
견아의 눈가는 아직 젖어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황궁에 궁녀로 들어왔다.
궁녀로 들어왔지만 미모가 빼어나거나 교태를 부리지 못해서 황제의 눈에 드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었다.
상궁들의 눈 밖에 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만 면하면 그저 감사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황궁 안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궁녀들과 내관들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궁녀 한 명 죽어도, 내관 한 명 사라져도 모르는 것이 황궁이다.
후궁이 죽고 왕자와 공주가 죽어도 쉬쉬하고 없는 일로 묻어 버리는 곳인데 하물며 궁녀 따위의 죽음을 누가 신경 쓸까.
엄청난 미모로 황제의 눈에 들 자신이 없는 궁녀라면 줄을 잘 서든가 아니면 바짝 몸을 낮춰 없는 듯 사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었다.
견아는 후자를 택했다.
있어도 없는 듯, 존재감 자체가 미미하게 그렇게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고 살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바보처럼 웃고, 때리면 맞고 일을 떠넘겨도 묵묵하게 전부 도맡아 했었다.
그것이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아가 몸으로 익힌 생존법이다.
그러던 중에 진원 왕자를 만났다.
아니, 왕자궁의 궁녀로 보내졌다.
화비는 진원 왕자를 무척이나 아꼈고 언젠가는 진원 왕자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화비에게 있어서 진원 왕자는 그녀를 구원해 줄 유일한 아들이었고 잡을 밧줄이었다.
화비는 진원 왕자가 궁녀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까 항상 염려했었다.
진원 왕자의 비로 훌륭한 가문의 처녀들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리는 다른 동무들이 주고받는 말로 견아도 알고 있었다.
젊고 잘생겼으며 인품이 훌륭한 진원은 궁녀들에게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젊고 잘생긴 태자 하진이 있었지만 그 사내는 너무 무서운 탓에 궁녀들은 그 앞에 서는 것도 무서워했었다.
그에 비하면 진원은 다정다감한 사내라 궁녀들은 그의 눈에 들려고 부던히 애를 쓰곤 했었다.
진원 왕자의 눈에 들어 왕자의 첩이 되려던 궁녀들은 화비의 손에 의해 모두 황궁 밖으로 쫓겨났다.
화비는 진원 왕자의 궁에 일부러 나이가 많은 궁녀나 사내들의 눈길이 머물지 않을 만큼 얼굴이 곱지 않은 궁녀들을 들여보냈다.
견아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견아는 제가 왕자의 눈에 들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화비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거짓말처럼 왕자의 눈에 들어도 화비가 저를 죽이려 들면 효자인 왕자가 어찌 화비를 막겠는가.
구석에서 그저 조용히 빗자루질이나 하고 다리미로 옷이나 다리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 견아가 한 전부였지만 운명은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소매가 뜯어졌는데 지금 꿰매 줄 수 있겠느냐? 내가 급히 아바마마를 뵈어야 하는데 이렇게 뜯어진 소매는 곤란해서 말이다.]
볕이 좋은 날 바느질감을 잔뜩 바구니에 넣고 처마 아래에 앉아서 옷을 꿰매고 있을 때 그 목소리는 갑자기 견아의 귀에 울렸다.
눈을 들어 제게 뜯어진 소매를 내미는 사내를 보고 견아는 심장이 멎어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왕자는 사냥이라도 나가려는 중이었는지 무복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활을 매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니 시간도 그렇고 번거로운 것이 많은데 이대로 꿰매어 줄 수 있느냐?]
뜻밖의 상황에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들고 왕자의 뜯어진 소매를 얼른 꿰매 주었다.
항상 하는 바느질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고맙구나.]
궁녀에게 하지 않아도 될 인사까지 한 왕자는 답례라며 견아에게 과자를 주고 떠났다.
그 후로 견아는 종종 왕자의 뜯어진 소매를 꿰매 주게 되었다.
왕자는 대체 뭘 어떻게 하기에 매일 소매를 그 지경으로 만드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밀려들 즈음에 이번에는 멀쩡한 소매의 왕자가 견아를 찾아왔다.
소매가 멀쩡한데 왜 자신을 찾아왔는가 싶었는데 왕자는 그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자꾸 멀쩡한 소매를 망가뜨리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오늘은 그냥 왔다.]
멀쩡한 소매를 망가뜨린다는 그 말에 견아는 머리가 먹먹했었다.
왜?
왜 왕자가 멀쩡한 소매를 망가뜨렸을까.
왜 굳이?
[나와 다과라도 들겠느냐? 싫다면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오늘 시간이 없으면 내일도 괜찮고, 나는 모레도 괜찮으니까…….]
왕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지만 그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항상 책만 들여다본다던 왕자.
효자.
조용하고 어진 성품.
생모인 화비가 정해 준 귀족의 딸과 혼인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 왕자.
그 왕자가 제 앞에 서서 양쪽 귀를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본 순간 견아는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그런데 바늘에 찔려 피가 나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아픈 것보다는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런 생각도 못 했다.
그때부터 아무도 모르게 진원 왕자와 밀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진원 왕자도 화비가 어떤 성품인지 알기 때문에 견아를 몰래 찾아왔고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속삭였다.
처음 옷고름을 풀고 그를 받아들인 날을 견아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내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견아 역시 사내는 처음이라 서툰 두 사람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허둥거리다가 결국 웃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하진이 황위에 오르고 나면 나는 출궁하게 될 거다. 출궁하게 되면 그때 하진에게 부탁을 해서 너를 달라고 해 보마. 그때까지만 참아 주면 좋겠구나.]
진원 왕자는 화비로부터 가해지는 혼인 압박을 혼자서 견뎠다.
절대로 견아를 첩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는 단단했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꿨었다.
자신이 진원의 아내가 되는 이루어지지 못할 그런 꿈을 꿨었다.
그리고 꿈은 진원의 죽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었지만, 지금 다시 그 꿈이 이어 붙혀지고 있다.
“먼 곳에 가서 작은 집을 사고 땅도 조금 사서 농사를 지어도 좋구요, 강가에 집을 사면서 작은 조각배도 함께 사서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아이가 태어나면 전하께서 글을 가르쳐 주시고 저는 바느질을 가르쳐 주고…….”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딸이 태어나려나 보다.”
진원이 견아의 아랫배를 살며시 만졌다.
견아는 지금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드러날까 천으로 꽉 조였다는 견아는
‘아이를 가지니 가슴이 커졌어요.’
라고 수줍게 말을 했었다.
“멀리 멀리 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피어나는 잡초처럼 살자.”
황궁에 피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도 좋다.
울타리 밖에 피는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좋고, 꽃이 아닌 잡초라도 좋다.
오늘 피었다 내일 지더라도, 단 하루라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곳에서 사랑하는 이와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그건 황제도 누리지 못하는 행복이고 황궁에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행복이다.
“이제 그만 출발하자.”
하진의 병사들이 자신들을 추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허연의 부하들은 또 다르다.
하진은 자신을 놓아줘도 허연은 자신을 놓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진원은 안다.
자신은 허연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이다.
자신을 잡고 있어야 허연은 권력을 잃지 않는다.
참 허무한 것이다.
그까짓 권력이 뭐라고 딸도 죽은 마당에 그것을 지금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허연만의 문제일까.
저 황궁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이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은 허연을 비난할 수도, 죽은 화비를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럴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고 황궁을 떠나는 자들만이 그들을 비난하거나 혹은 그들을 동정할 수 있다.
“…….”
진원이 황궁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마웠다.”
그 인사가 누구에게 던지는 인사인지 견아도 알고 있다.
견아 역시 그런 인사를 하고 싶었다.
견아는 말로 인사하는 대신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들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자신들이 고마워하고 있는 그들은 아마 알아줄 것이다.
바람이 이 마음을 전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말 위에 뛰어오른 두 사람이 옹주와는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이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