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93화 (93/108)

93.

“살려 줬다.”

은호가 묻기도 전에 하진이 말을 꺼냈다.

놀란 은호가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쳐다봤다.

“죽이지는 않았다.”

하진이 제 손을 은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의 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피는 하진의 것은 아니었다.

하진은 손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도 피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이 진원의 피라고 은호는 생각했었다.

은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하진의 손과 얼굴, 그리고 옷에 묻은 피가 진원의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죽이지 않았고, 그에게 기회를 줬다. 이제 살고 죽는 것은 그에게 달렸다. 이 피는…….”

하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유를 얻는 데 이 정도의 피는 흘려야 하지 않겠느냐. 진원은 이 정도의 피를 흘리고 원하는 것을 얻겠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려도 얻지 못하는 것을 그는 얻을 수 있으니 그는 나보다 더 운이 좋은 거겠지?”

“폐하…….”

진원을 살려 줬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견아는 이미 사비와 함께 떠나보냈다.

진원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해서 옹주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되면 견아와 진원은 영영 길이 엇갈리는 것이 아닐까.

“궁에 전서매를 날려 보냈다. 견아라는 그 궁녀를 찾아서 옹주로 보내라고. 진원에게는 옹주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길이 엇갈리지만 않으면 만날 수 있겠지.”

“폐하, 견아는…….”

지금 말해야 한다.

“견아는 지금 옹주로 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황궁에 있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진도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아차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은호가 없는 말을 지어낼 리는 없다.

“조금 전에 제가 견아를 사비와 함께 옹주로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폐하를 믿지 못하여 출궁할 때 견아를 병사로 위장시켜 데리고 나왔습니다. 견아는 황궁에 남아 있지 않고 저와 함께 왔다가 조금 전 옹주로 보냈습니다.”

“조금 전이라면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따라잡겠지만…….”

하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자 두 명이라면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루를 보내면 여자 두 명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

‘이루를 보낼까?’

이루에게 견아라는 그 여자를 찾아내라고 해서 옹주, 진원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곳까지 보낸 다음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낫다.

진원과는 약속을 했다.

진원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건 자신이 진원에게 기회를 준 것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이 피를 이제는 끊어 내고 싶다.

질기게도 달라붙어 있는 이 끔찍한 살육의 저주를 이제는 끊어 내고 싶다.

그리고 그건 기회였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진원을 죽였다면 자신의 손에 묻은 이 피는 지워지지도 않고 자신의 평생을 괴롭히며 쫓아왔을 것이다.

진원을 살린 것은 그를 위한 것인 동시에 하진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은호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모두가 사는 길은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저주를 끊어 내는 마음으로 진원과 자신의 인연을 칼로 베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적어도 살아서는 만날 일이 없다.

그래야만 한다.

“잘했구나.”

하진이 은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잘했어. 나보다 낫구나.”

견아라는 궁녀를 자신 몰래 숨겨서 데려온 것에 대해 화를 낼 마음은 조금도 없다.

잘한 것이다.

은호는 항상 그랬다.

누구보다 약하고 겁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은호는 실수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낼 줄 아는 여자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자신의 마음을, 영혼을 사로잡은 여자가 이런 여자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진이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만약 이 상황이 아니라면 천막의 출입을 금지하고 이 자리에서 은호를 품었겠지만, 지금은 자제하고 있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허연이 남았다.

홍문이 아직 답서를 보내지 않고 있다.

허연을 어찌했는지 그 답이 오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헐떡이던 진원이 우물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린 진원이 비틀거리며 우물로 기어 갔다.

진원의 몸에서는 아직 지혈되지 못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진원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하진의 칼이 옆구리를 벤 것이다.

하진은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이걸로 형님은 죽은 것이라 생각하겠어.]

내리친 칼날이 제 목을 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칼날은 옆구리를 스쳤고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까지 피가 멎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그리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안 그래?]

하진의 표정은 담담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진이 자신에게 베푼 온정이었다.

그 순간 진원은 자신들이 형제라는 것을 새삼 느꼈었다.

서로가 선 곳은 달랐지만 자신이 그를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도 자신을 형제로 여겨 준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

다시 보지 말자는 그 말은 인연을 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가자는 뜻이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어차피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그것이면 족하다.

어느날 문득,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보이는 새파란 하늘, 그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리운 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족할 수도 있다.

[여자는 옹주로 보내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야. 허연은 용서할 수 없으니 그리 알아.]

옹주까지만 가면 견아를 만날 수 있다.

진원이 애초에 원한 것은 견아였다.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

황궁이 아니라 필부로서 가정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

그것을 내내 바랐었고 이제 곧 그것이 이루어진다.

일은 실패했지만 바라는 것은 얻었다.

외조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애당초 외조부 역시 자신을 이용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진원도 알고 있다.

사람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피를 흘리는 법이다.

어떤 자에게는 그것이 권력이겠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재물일 것이다.

그리고 진원에게 그것은 행복한 가족이었다.

“하아…….”

우물까지 기어온 진원이 두레박의 끈을 손으로 쥐었다.

물을 길어 올려 마른 목을 축이고 싶은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말라…….’

조금만 쉬면 손에 힘이 돌아올까.

진원이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게 쉬며 손에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말굽 소리가 귀를 건드린 것이다.

‘누굴까…….’

천천히 다가오던 말굽 소리가 멈추더니 사람들이 말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는 작았다.

사내의 발소리가 아니라 여인의 발소리, 혹은 아이의 발소리처럼 작았다.

‘지나가는 사람일까…….’

누가 근처를 지나가다 목이 말라 우물을 발견하고 멈췄을 수도 있다.

‘모르는 척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피를 흘리는 사내를 모른 척해 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것을 바라 봤다.

그때였다.

“진원 님?”

진원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견아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견아가 이곳에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꿈을 꾸는 것이다.

‘좋은 꿈이군…….’

이런 꿈이라도 좋으니 견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진원 님……!”

손이 어깨를 잡아 흔들자 진원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웃고 말았다.

흐릿한 시야에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견아의 얼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 우는 것이냐.”

꿈에서라도 좀 웃을 것이지 왜 우는 걸까.

생각해 보면 견아가 웃는 것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었다.

항상 겁을 먹고 있거나 근심 어린 표정들만 지었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자신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죄가 많은 사내다.

“꿈에서라도 좀 웃지. 왜 우는 것이냐.”

뺨에 그녀의 손바닥이 닿았다.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다정해서, 진원은 무척이나 서러웠다.

원래 다정한 꿈은 서러운 법이니 말이다.

“살아 계셨어요…… 살아 계셨어…….”

저를 꼭 끌어안아 오는 견아의 목소리가, 숨결이, 그 품의 온기가 진원을 뒤덮었다.

견아의 뒤에서 놀란 눈을 뜨고 있는 한 궁녀를 바라보며 진원이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겨우, 만났다는 것을.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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