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92화 (92/108)

92.

“마마!”

돌아온 은호에게 와락 뛰어들어 안긴 것은 사비였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운 사비가 은호를 끌어안고 또다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마마! 마마!”

은호가 납치된 이후부터 내내 울기만 했던 사비였다.

병사들이 곧 돌아오실 거다, 라고 위로를 해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엉엉 울던 사비가 돌아온 은호를 놓아주지 않고 은호의 앞섶이 푹 젖도록 엉엉 울었다.

“괜찮다니까. 그만, 뚝. 그만 뚝. 사비야. 뚝. 그만 울라니까.”

저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사비의 등을 쓸어내리던 은호가 제게 따뜻한 죽이 담긴 그릇을 가져온 병사를 쳐다봤다.

남장을 하고 병사로 꾸미고 있던 견아였다.

견아의 눈가도 빨갛게 물든 것을 보며 은호가 다정하게 웃으며 죽 그릇을 받아 들었다.

“모두에게 걱정만 끼쳤구나.”

“괜찮으십니까?”

저를 걱정하는 견아를 보며 은호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은호는 아직 진원 왕자의 생사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저 하진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이루가 하진을 무사히 구해 냈지만 그쪽의 일을 정돈하고 난 다음에 돌아올 예정이라 조금 늦어진다고 했다.

무사하다고 전해 왔다.

하진이 무사할 것은 알고 있다.

은호가 안부를 알고 싶은 것은 진원이었다.

하진이 진원을 살려 줬을까.

하진에게 그 정도의 자비심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바람일까.

은호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하진에게 형제를 살려 줄 만한 자비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진원을 살려 뒀을 때 하진이 안고 가야 하는 부담감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다음에도, 또 다음 번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서 황궁 안에 숨어서 두 번 다시 황궁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폐하는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오셨겠지…….’

이번 일을 겪으며 은호는 처음으로 하진의 입장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누군가를 의심하며, 언제 납치될까,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까 경계를 세우며 살아야 하는 삶.

그런 것이 하진이 살아온 삶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무척이나 평온했었다.

은호는 살아오면서 목숨의 위협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안전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했었다.

하루는 평온해야 하는 것이었고 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행복은 항상 곁에 있었고 세상이 모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진은 행복한 것이, 평온한 것이, 안전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그런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노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늘 주위에 위험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런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하진에게 누군가를 용서하라, 나중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위험거리가 되는 이를 살려 주라, 자비를 베풀어라 하고 부탁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 은호도 잘 안다.

하진이 나쁜 사내라서 잔인한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하진은 그렇게 살아온 것뿐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진원을 살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진원을 살려 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고, 그가 진원을 죽였다 하더라도 왜 그를 죽였냐고 원망하는 말을 쉬이 할 수가 없다.

‘견아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하는 걸까……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까…….’

만약 정말 진원이 죽었다면 견아는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진원 왕자가 실은 살아 있었고 이번에 죽임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얻을 것이다.

그건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겨질 수도 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견아에게 있어서 그건 얼마나 잔인한 기억이 될까.

‘진원 왕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은호가 견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밖에 없다.

예정된 대로 옹주로 보내 주고, 그곳에서 세상 어디라도 좋으니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녀의 아이와 함께 살아가게 도와주는 것 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옹주로는 가지 않을 것 같구나.”

제 곁에 서 있는 견아에게만 들리게 은호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 일로 아마 곧장 황궁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 너는 준비를 하거라.”

‘준비’

라는 것은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마마.”

견아의 목소리도 떨렸다.

“사비야.”

은호가 저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는 사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비의 눈물범벅인 얼굴을 보며 은호가 사뭇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가 꼭 해 줘야 하는 일이 있는데, 해 줄 수 있지?”

“네, 마마.”

은호의 말에 사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께 좀 다녀와 줄 수 있겠니?”

“나으리께요?”

갑자기 은호의 입에서

‘주이염’

에게 다녀오라는 말이 나오자 사비의 눈이 커졌다.

“나으리께는 왜 갑자기…….”

“내가 이번에 큰일을 당하고 나니 아버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생각이 났구나.”

은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사비가 눈치챘다.

사비는 은호와 같은 젖을 먹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은호의 친구였고 자매처럼 자란 사이다.

은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다.

은호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고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데 은호만 그것을 모른다.

지금 은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평소의 사비라면

‘절대 안 된다’

고 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 막 돌아온 상황에서 은호가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사비는 은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

살아 돌아왔으니까,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은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

“네, 마마. 나으리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너 혼자 가면 위험한 길이 될 수도 있으니 병사를 붙여 주마.”

은호가 곁에 서 있는 견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사비도 은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원래 은호의 계획은 옹주까지 가서 견아를 풀어 주는 것이었지만 돌발 상황 때문에 환궁해야 하는 지금 견아를 이곳에서 떠나보낼 생각인 것이다.

병사 혼자 이탈시킬 수 없으니 자신을 주이염에게 심부름을 보낸다는 핑계로 견아를 병사로 붙여서 보낸다고 하면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얼른 떠나거라.”

은호가 사비를 일으켰다.

“아버님께 내가 아버님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하거라. 알겠지?”

“네, 마마.”

사비가 은호의 손을 꽉 쥐었다.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행렬에서 연비의 종복 하나와 병사 한 명이 대열에서 이탈해 떠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연비가 그 아비 되는 주이염에게 보내는 궁녀를 누구도 막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병사 한 명과 궁녀 한 명이 행렬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이루와 함께 돌아왔다.

“폐하.”

하진이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선 은호가 고개를 숙였다.

하진은 천막 안에서 상처를 치료받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의 몸에 작은 상처들이 많이 나 있었다.

은호는 그가 그렇게 다쳤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다친 것으로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를 납치하며 진원 왕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허연의 병사들이 하진의 몸에 상처를 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골라서 말이다.

고개를 숙인 은호의 곁으로 병사들이 스치며 지나갔다.

하진이 그들을 전부 내보낸 것이다.

“다친 곳은 없느냐?”

알고 있는 다정한 목소리에 은호가 얼굴을 들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저를 향해 웃고 있는 하진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은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눈물이 고였다.

하진이 무사한 것을 알고, 그라면 절대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를 만나도 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저런.”

은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하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가 묻은 손가락의 끝이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울보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진의 손끝이 눈물을 닦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차오른 눈물이 넘쳐 버렸기 때문이다.

“저는 그러니까…….”

은호가 뒷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 가기 전에 하진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하진의 손이 은호의 등을 다독거렸다.

툭, 툭, 건드리는 손길에 은호가 눈을 감고 숨을 끅끅 내쉬었다.

소리 내지 않고 울려니 입술을 비집고 끅끅거리는 소리만 새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해서.”

하진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마. 절대로.”

상관없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나도 하진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하진 때문에 죽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이 사내를 원망할 일은 없다.

사랑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마에 하진의 입술이 닿았다.

정수리에 닿았던 입술이 미끄러지며 은호의 이마에 닿았다.

그 숨결이 다정해서, 은호가 비로소 안도했다.

안도하는 순간 은호가 생각했다.

지금,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진원 왕자에 대해 지금 물어봐도 되는 것일까.

“폐하…….”

어쩌면 지금의 질문이 하진을 실망시킬 수도 있고, 하진을 화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은호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하진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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