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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91화 (91/108)

91.

“지금 당장 죽일 수 있지만 나도 일단은 살아서 돌아가야 하니까.”

진원의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하진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이를 갈면서도 하진에게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보다 빨리 하진의 칼이 진원의 목을 깊숙하게 베어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진원의 부하들은 아닐 것이다.

아마 허연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겠지만, 문제는 허연의 계획은 진원이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허연에게는 진원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런 이유로 저들은 진원이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하진에게 있어서 진원을 살려 둬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진은 진원을 잠시라도 살려 둘 생각이 없다.

진원은 가장 위험한 칼이다.

진원 스스로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해도 진원은 존재 자체만으로 하진에게는 독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되는 형제 사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이 관계를 되돌릴 길은 없다.

한번 어긋난 길을 다시 잡는 것은 어렵다.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이 악연은 끝이 난다.

그리고 죽어야 한다면 그건 진원이다.

“나도 약간의 자비심은 있으니, 형님을 죽인 다음에 형님의 여자도 죽여서 형님 곁으로 보내 줄 터이니, 저승에서 여자와 자식과 함께 살 수는 있겠지 형님.”

“나는 죽여도…… 견아는 죽이지 마라.”

하진에게 잡힌 진원이 이를 악문 소리로 그 말을 내뱉었다.

“아니, 내가 죽어 줄 것이니 견아는 살려 주거라. 그 여자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렇게는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형님도 잘 알 텐데.”

진원을 인질로 잡은 하진이 갇혀 있던 곳에서 나왔다.

“말을 가져와라.”

저를 둘러싼 사내들을 향해 하진이 위협 어린 목소리를 던졌다.

“말을 가져오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원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게 될 거다.”

하진의 목소리는 그저 위협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진원을 죽일 것 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말을 가져와라!”

“빨리 말을……!”

사내들이 서둘러 소리를 지르더니 한 명이 말을 끌고 왔다.

은호가 모두 풀어놓은 탓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말들 중에서 되돌아온 말들을 잡아타고 은호를 추격해 간 자들 뒤에 남겨진 말이었다.

유일하게 한 마리 남은 말을 끌고 오자 하진이 피식 웃었다.

“제법이란 말이야, 아무것도 못 하게 생겨서.”

은호를 향한 하진 나름의 칭찬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말을 전부 풀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이 하진이 도망치는 것이 쉬워졌다.

말이 이 한 마리 외에는 없으니 진원을 인질 삼아 도망쳐도 저들은 쫓아오지 못한다.

말 위에 올라탄 하진이 진원을 제 앞으로 끌어 올렸다.

덩치가 제법 있는 사내 두 명이 타기에 말등이 좁았지만 어쩔 수 없다.

“고삐를 쥐어.”

진원에게 고삐를 쥐게 한 다음 하진이 그의 목을 칼로 겨누며 말 허리를 발로 찼다.

그러자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사납게 달려 나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진과 진원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며 사내들이 난감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연비는 잡았을까?”

“연비라도 잡았어야 하는데…….”

말이 없어서 쫓아갈 수도 없다.

지금 이자들이 유일하게 거는 희망은 먼저 말을 타고 쫓아간 이들이 연비라도 잡는 것이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연비라도 확보하고 있어야 황제와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전부 진원 왕자가 무르기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진원 왕자가 조금만 더 독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와 연비를 납치하는 것에 성공한 직후 황제의 목과 연비의 목을 잘라 버렸으면 이런 사달이 왜 일어났겠는가.

[잡자마자 바로 죽여야 한다.]

허연이 자신들에게 명령한 것도 그것이다.

허연은 황제를 잡으면 살려 두지 말라고 했다.

거래나 협상 따위는 없으니 황제의 목을 바로 쳐야만 한다고 몇 번이나 허연이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걸 가로막은 것이 진원이다.

진원은 황제도, 연비도 애초부터 죽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허연의 말대로 황제를 죽였어야 했다.

그 한 순간의 실수가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라도 살아야겠지.”

한 명이 뒷걸음질을 치자 눈치를 살피던 다른 이들이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허연에게로 돌아가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다.

그리고 황제가 무사히 달아났으니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은 역시 죽은 목숨이다.

여기서 자신들이 잡히면 자신들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구족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서 가족들을 데리고 숨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이제는 의리도 뭐도 없다.

애초에 의리가 아니라 돈 때문에 움직였던 자들이라 선택을 하는 것은 더 쉬웠다.

그렇게 사내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꽤 멀리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하진이 말을 멈추게 했다.

뒤를 돌아봐도 쫓아오는 추격은 없었다.

“여기에서 끝내야겠군.”

하진이 먼저 말 위에서 뛰어내린 다음 진원이 내려오도록 했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하진이 진원에게 칼을 겨눴다.

“이젠 정말 끝이다.”

그런 하진을 바라보는 진원의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마. 여자는 살려다오.”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까지도 여자를 걱정하는 진원을 바라보며 하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태어나면 그때 만나서 평범하게 부부가 되어 살아. 지금이 아니라.”

“하진아.”

“오늘 내가 베푼 인정이 내일 내 목을 겨눈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아서. 미안하지만 형제에게 베풀어 줄 자비심이나 인정은 없어.”

하진이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섭게 그 들어 올린 칼을 내리쳤다.

하진의 눈앞에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

“폐하―!”

하진을 발견한 이루가 말 위에서 뛰어내려 하진을 향해 달려왔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은호와 헤어진 후 곧장 하진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루가 저를 기다리고 서 있는 하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진의 얼굴과 옷에는 붉은 피가 잔뜩 물들어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칼날의 끝에서 핏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이루는 그것이 하진의 피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진이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이루가 안도했다.

“폐하. 그 피는 대체…….”

“진원의 피다.”

하진이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칼을 내던졌다.

“진원이라면…… 진원 왕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진원. 살아 돌아왔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지.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살아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루로서는 짐작할 수 없지만, 대충의 상황은 그려졌다.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겠지만, 그것을 누가 막겠는가.

“그러하오면 진원 왕자는 지금 어디에…….”

하진의 주위에 진원 왕자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묻어 줄 필요까진 없을 거다.”

하진의 시선의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이루가 고개를 돌렸다.

길게 자란 잡초 사이로 쓰러져 있는 피투성이 사내가 보였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진원 왕자가 틀림없었다.

“내버려 두면 들개 밥이 될 겁니다.”

“무덤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누가 술잔이나 올리겠느냐. 찾아 주는 사람 없는 무덤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개의 주린 위장이라도 채워 주는 좋은 일이라도 하고 죽는다면 나중에 다시 태어날 때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나겠지. 적어도 형제끼리 죽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하진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은호는?”

“마마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래. 다행이로구나. 그러면 돌아가자.”

“폐하. 봉화를 올리고 황궁으로 파발을 보냈습니다.”

“그래? 그러면 홍문도 지금 일어난 일을 전부 알겠군. 그런데 그놈이 아직도 오지 않았단 말이냐? 내가 납치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 황궁에서 금와까지 말을 달리면 얼마나 된다고 아직까지 오지 않는다는 것이냐? 어디서 처자빠져 자는 것도 아니고.”

“하오면 바로 군사들을 돌려 황궁으로 환궁하시겠습니까? 금와에서 홍문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시겠다면…….”

“아니. 은호가 놀랐을 거다. 조금 진정시키고, 그리고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면 시끄럽기밖에 더하겠느냐. 가뜩이나 놀란 여자를 시끄러운 황궁으로 데리고 돌아갈 수는 없지.”

하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루도 이해했다.

“홍문이 황궁을 정리할 때까지는 느긋하게 금와에서 기다릴 것이다.”

이번 납치의 배후인 허연을 홍문이 정리하는 것을 이곳 금와에서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이 일은 진원이 문제가 아니라 허연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허연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허연을 정리하면서 심창도 정리하고,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후궁들까지 정리하는 것을 홍문은 잘해 낼 것이라고 하진은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서둘러 돌아갈 이유가 없다.

“모시겠습니다, 폐하.”

이루가 부하가 끌고 온 말의 고삐를 하진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하진의 말이었다.

하진을 모셔 갈 때 그의 말로 모실 것이라 다짐하며 끌고 온 것이다.

“은호가 기다리겠군.”

갑자기 몰아친 폭풍이었다.

아니, 폭풍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라고 하진이 생각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쏟아졌고, 그리고 그 빗줄기에 옷이 젖는다 싶더니 이내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멎었다.

다시 해가 났지만 옷은 여전히 젖어 있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진원은 죽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축축하다.

벼린 칼끝에 묻어 있던 피가 마음에 묻어 있어 축축하게만 느껴졌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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