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어? 저거……!”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짚단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였다.
갑자기 헛간에서 말들이 달려 나온 것이다.
헛간에 묶어 놓았던 열 몇 마리의 말들이 갑자기 뛰어나와 벌판으로 달려 나가자 사내들이 벌떡 일어났다.
“잡아!”
“저걸 어떻게……!”
무섭게 달려 나가는 말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저기!”
그때 한 사내가 달려 나가는 말 위에 올라탄 은호를 발견했다.
“달아난다!”
“잡아! 잡으라고!”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쫓아가려고 해도 말을 타고 달아나는 은호를 잡을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말은?!”
그 소란에 헛간의 위층에 있던 자들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은호가 갇혀 있던 곳을 지키던 자들도 밖을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한 마리도…….”
말들을 묶어 놓았던 헛간으로 뛰어 내려간 사내들이 단 한 마리도 남지 않은 것을 보며 당황했다.
여자를 쫓아가려고 해도 말이 없으면 쫓아갈 수가 없다.
“전하께 보고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한 사내가 활을 메고 말들이 달려 나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말은 처음에는 놀라서 도망쳤겠지만 어차피 길들여진 말이다.
훈련된 말들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애초에 멀리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은 돌아온다. 하지만 도망친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내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
“전하―!”
갑자기 문을 부술 듯이 열고 사내가 뛰어 들어오자 하진과 진원의 대화가 끊겼다.
“여자가 도망쳤습니다!”
사내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진원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놀란 진원이 사내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혼자 남겨진 하진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에, 세상에서 제일 겁이 많은 주제에 또 이럴 때는 제일 용감하다니까. 구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래서는 멋있게 구해 주고 잘난 척을 할 수도 없잖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은 은호가 혼자라도 달아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은호가 있으면 하진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은호가 없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더 이상 몸을 사릴 이유가 없다.
“그러면 나도 슬슬 여기서 나가 볼까?”
은호 때문에 이루가 올 때까지, 아니면 홍문이 뭔가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은호가 무사히 달아났다면 더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진이 등 뒤로 묶인 손을 움찔거렸다.
손을 묶은 밧줄은 단단했다.
굵은 밧줄로 풀지 못하게 단단하게 결박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히 결박해도 푸는 법은 존재한다.
하진이 힘을 줘서 엄지손가락을 눌렀다.
으드득. 소리가 나며 엄지손가락이 부러졌다.
*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 날 떨어뜨리지는 마……!”
고삐를 꽉 쥐고 은호가 말에게 부탁을 했다.
그건 거의 애원이었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말이라 제일 순해 보이는 말을 골랐다.
그런데 순해 보였던 말이 한번 달리기 시작하니 너무 무섭게 달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바라는 것은 추격해 오는 자들에게 잡히지 않는 것, 그리고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무섭게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분명 크게 다치거나, 아이를 잃을 것이다.
하진의 아이를 잃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 잡혀 있을 수도 없다.
최대한 추격을 늦추려고 헛간에 있던 말들을 전부 흩어 보냈다.
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헛간 문을 열어 놓고 일부러 막대기로 말들을 후려쳤다.
덕분에 말들은 헛간에서 모두 달아났고 그 틈에 섞여 은호도 달아날 수 있었다.
고삐를 꽉 쥐고 몸을 바짝 낮췄지만 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더 무서웠다.
고삐를 당기면 말이 멈춘다는 것이 은호가 아는 전부였다.
“아……!”
죽어라 앞을 보며 말을 달리던 은호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여러 마리의 말이 뒤쫓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들이 꽤 멀리 달아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말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말들이 다시 돌아간 것일까.
은호와 추격하는 자들의 간격이 점점 좁혀졌다.
뒤따라오는 자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은호의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은호는 이보다 더 빨리 달리는 법을 모른다.
“잡히면 안 돼…… 제발…… 제발 조금만 더 빨리…….”
말을 평소에 타 봤더라면 분명 이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겠지만 은호는 지금으로서는 방법을 몰랐다.
“제발……!”
뒤를 돌아보자 이제 추격자들은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았다.
“잡아!”
“누가 말고삐를 잡아!”
추격자들이 탄 말이 순식간에 은호의 좌우에서 나란히 달렸다.
“멈추게 해!”
한 사내가 은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꺄아아아!”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오자 은호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손이 고삐를 쥐려고 할 때였다.
푹―!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화살이 그 손목을 꿰뚫었다.
“으아악!”
은호가 탄 말의 고삐를 잡으려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날아온 화살이 말 탄 사내들을 쏘아 맞추자 사내들이 달리는 말에서 고꾸라졌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은호가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을 달릴 때 저 앞에서 먼지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먼지바람을 헤치고 저를 향해 달려오는 일련의 무리들을 보며 은호는 누가 화살을 쐈는지 알게 되었다.
“장군님―!”
이루였다.
달려오는 자들의 선두에 이루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은호가 비로소 안도했다.
이루가 여기까지 와 주었다.
그러면 이제 하진도 안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은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건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짜낸 용기였다.
생전 타 보지 않은 말을 탄다는 것, 누군가를 피해 도망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두 번 다시 내라고 해도 내지 못할 용기였다.
하진을 살리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마!”
달려온 이루가 은호가 탄 말의 고삐를 낚아챘다.
말을 멈춘 이루가 말 위에서 뛰어내려 은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은호를 번쩍 들어 말에서 내린 이루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외상은 없었다.
“마마, 무사하십니까?”
이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진과 은호가 함께 납치되었지만 이루를 정말 무섭게 만든 것은 은호에게 변고가 생기는 것이었다.
하진도 자신이 지켜야 하는 분이지만, 하진은 강하다.
하지만 은호는 다르다.
이루는 은호처럼 약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약한 은호인 데다 홑몸도 아니다.
이런 은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자신은 목숨으로 그 죄를 갚을 생각이었다.
하진이 용서를 해도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은호가 무사해 줘서, 이루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군님! 폐하를 구해 주세요! 폐하께서…….”
“구해 낼 겁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마마께서 안전한 곳에 피해 계셔야 합니다.”
이루가 손짓하자 그의 부하들이 다가왔다.
“마마를 안전하게 모셔라. 마마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무엇을 하든지 마마의 안전이 가장 우선이라는 것을 기억하거라. 그리고 세 명만 나를 따라온다.”
이루가 데려온 부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추격하기 위해서 소수만 데려왔기 때문이다.
그 소수 중에서 대부분을 은호를 위한 호위로 남겨 두고 이루가 세 명만 지목했다.
하진을 구하는 것은 자신 외에 세 명 정도면 된다.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마. 폐하를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숨도 돌리지 않고 이루가 곧장 말 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은호가 달려온 방향으로 사라졌다.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이루와 그의 부하들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은호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손가락과 손끝에 잔상처들이 많았지만 죽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세요…….”
이제 은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이루가 하진을 무사히 구해 내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이 순간에 진원 왕자를 걱정하는 것은 하진에게 죄를 짓는 것일까.
하지만 견아를 생각하면 진원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
하진은 진원을 용서해 줄까.
부디 그래 줬으면 좋겠다.
형제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사내들이 도망칠 준비를 하는 동안 진원이 하진을 가둬 뒀던 헛간 안으로 들어섰다.
도망칠 땐 도망치더라도 하진을 데려가야 했다.
하진은 견아와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질이다.
원래는 하진보다는 연비가 더 쓸모 있는 인질이었지만 연비가 도망친 지금은 하진을 견아와 교환하는 수밖에 없다.
헛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움직이지 마.”
진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끝이 목에 닿았기 때문이다.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하진이 진원이 들어서는 순간 그의 뒤에서 그의 손목을 뒤틀며 그 목에 날카로운 것을 갖다 댄 것이다.
진원의 목에 닿은 것은 녹슨 못이었다.
헛간의 널빤지에 박혀 있던 못을 뽑은 하진이 그것으로 진원의 목을 겨누고 다른 손으로 진원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못을 버리고 대신 칼로 진원의 목을 겨눴다.
“이래서 형님은 나를 못 이긴다는 거야.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지. 살려 두니까 이렇게 당하는 거야.”
진원의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하진이 낮게 웃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