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89화 (89/108)

89.

“이익……익……!”

은호가 있는 힘을 다해서 바닥의 널빤지를 뜯었다.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라서 다행이었다.

조금 전 하진을 만나기 위해 내려갈 때 은호는 주위를 자세하게 봐 두었다.

집은 허허벌판에 있었다.

근처에 있는 것이라고는 잔뜩 쌓아 놓은 짚 더미뿐이었다.

추수가 진행 중인 벌판에 잔뜩 쌓아 놓은 볏짚과 곳곳에 지어져 있는 원두막들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추격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수상하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감시를 서는 자들은 집 주위에만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농부의 복장으로 집 주위에 있어서 누구도 그들이 황제를 납치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위장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하게 위장을 해서 진짜 낡은 집에 자신들을 가둬 둔 것이다.

지어진 지 오래되고 그동안 관리가 안 된 것인지 벽과 바닥은 충분히 낡았고 아래층 헛간에는 오래된 짚단만 잔뜩 있었다.

높이는 꽤 있었지만 은호가 믿는 것은 그것이었다.

자신이 여기서 떨어져도 짚단이 충격을 완화해 주어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빠지직―

널빤지가 뜯겨 나가며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드러났다.

체격이 큰 사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은호는 체구가 작았다.

은호가 조심스럽게 구멍 안으로 다리를 내렸다.

구멍을 손으로 꽉 쥐고 아래로 몸을 내리자 은호의 몸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높아…….’

아래에 짚단이 있다는 걸 알지만 막상 손을 놓는 것은 무서웠다.

머리로는 여기서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막상 손을 놓으려니 무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전에 딱 한 번 담을 넘은 적이 있었다.

칠석의 밤이었다.

칠석의 밤 사비와 함께 은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이라는 것을 넘었었다.

대문으로 나갈 수 없어서 담을 넘는데 그때의 기분은 정말 짜릿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을 하는 기분이었었다.

부친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처럼 담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을 때 등 뒤로 흐르던 식은땀.

그때의 기분과 지금의 기분이 조금 닮았다.

물론 그때처럼 두근거리는 것도, 나쁜 짓을 하는 기분도 아니지만 그때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때는 하룻밤의 일탈을 즐겨 보고 싶었던 것이고, 지금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말하며 은호가 손을 놓았다.

퍽―!

손을 놓는 순간 은호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짚단 위에 푹 처박혔다.

짚단이 푹 꺼지도록 처박힌 은호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짚단 위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조심스럽게 짚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온 은호가 옷에 붙은 지푸라기들을 털고 위를 쳐다봤다.

위는 조용했다.

문밖에서 그녀를 감시하던 이들은 그녀가 도망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곱게 자란 여자가 이런 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것이리라.

물론 은호 역시 하진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짓을 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급하니까, 그만큼 다급하니까 뭐라도 하려는 것뿐이다.

헛간 안은 조용했다.

감시하는 자들은 위층에 있고 하진이 잡혀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옆의 낡은 건물이었다.

나무로 지어져 예전에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로 사용되었겠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지 엄청나게 낡고 군데군데 부서진 것이 보이는 그런 창고 안에 하진이 붙잡혀 있다.

자신은 하진을 구할 수 없지만 하진을 구할 수 있게 방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이루를 만나 여기까지 안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만 없으면 하진은 혼자서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다.

“…….”

헛간을 나서기 전 은호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일단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은호는 빨리 달리지 못한다.

어설프게 여기서 뛰어나갔다가는 금방 잡혀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헛간의 여기저기를 살금살금 돌아다니던 은호가 몇 명의 사내들이 텅 빈 밭에 쌓아 놓은 짚단 사이사이에 서 있는 것을 봤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짚단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도망쳤더라면 분명히 잡혔을 것이다.

‘말이 있을 텐데…….’

여기까지 끌려오며 말을 타고 왔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 저자들은 분명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이다.

그러면 근처에 분명히 말이 있을 것이다.

‘말을 어디에 묶어 놓았을까…….’

사방을 쳐다봐도 말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는…….’

그때 은호가 또 다른 헛간을 발견했다.

전부 그 헛간 역시 위에는 집, 아래에는 헛간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 위층에 사람들이 숨어 있고 아래의 헛간에 말을 숨겨 놓았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저기까지 가 보자.’

용기를 낸 은호가 땅에 납작 엎드린 채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일어서서 가면 당장 눈에 띌 것 같아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가벼운 내의 차림으로 은호가 땅에 납작 엎드렸다.

‘제발…… 제발 들키지만 않게 해 주세요…….’

간절히 빌며 은호가 조심스럽게 땅을 기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잡초가 꽤 무성하게 자라 있다는 것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풀을 벨 사람도 없었는지 헛간 주위로 무성하게 자란 풀은 무릎까지 덮을 정도였다.

땅에 납작 엎드린 은호의 몸을 가려 주기엔 충분했다.

살금살금 기어가던 은호가 무사히 헛간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였다.

헛간 안에는 열 마리가 넘는 말이 묶여 있었고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머리 위에서 사람이 걸어 다닐 때마다 삐걱삐걱 낡은 널빤지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은호는 말을 타 본 적이 없다.

바깥출입이라는 것을 거의 한 적이 없다.

부친은 그녀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호했었고, 집 밖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며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이 많았던 부친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말을 탈 수 있을까…….’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말을 자신이 탈 수 있을까.

숨을 한 번 쉬고 일어선 은호가 묶여 있는 말의 줄을 풀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날려 보낸 전서매에 대한 답장은 내일은 되어야 도착할 것이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이 상태로 기다려야 한다.

하진을 묶어 둔 채로 진원은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맡겨 두고 가서 쉴 법도 한데 진원은 하진의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뭘 물어보고 싶은 것이지?”

이 상황이 하진은 조금 우스웠다.

생각해 보니, 형제지간이지만 진원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 함께 있어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이런 식으로 서로를 꽤 오랫동안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긴 대화를 오랫동안 해 본 적도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적도 이렇게 긴 시간은 처음이다.

속에 있는 마음을 꺼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궁금한 것? 그런 것은 더더욱 물어본 적이 없다.

그랬던 자신들이 필요에 의해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기분을 하진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우습다고 해야 하는지 비극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직은 가늠할 수가 없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봐.”

은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어느 정도는 하진도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진원도 은호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허연이라는 변수와 허연이 심어 놓은 그의 수하들만 조심하면 된다.

지금 진원을 도와서 움직이는 모든 자들은 허연이 심어 놓은 자들이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진원이 아니라 허연의 명령을 들을 것이 분명하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다.

하진도 알고 있다. 적은 허연이지 진원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진원이 존재하는 한 허연이든 누구든 진원을 이용해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의 자리를.

그러니까 진원은 어떤 이유로든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미안하지만 진원은 죽어야 한다.

사라지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황후마마.”

진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하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아직 황후마마라는 칭호가 편해. 내가 죽을 때까지 저분은 황후마마이셨으니까. 황후마마이자 어마마마였었지.”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연비마마라고 하더군.”

“그래서?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왜 그런 거지? 다른 여자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아바마마의 여자를 건드려서 패륜을 저지른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은 거지?”

“패륜을 저지른 자식이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패륜아.

“나는 애초부터 패륜아였어. 형님은 그걸 몰랐던 건가?”

은호가 아니었다고 해도 자신은 패륜을 저지를 계획이었다.

부친과 자신은,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살을 타고 태어났다.

자신은 살모사다.

살모사의 새끼는 태어나면서부터 낳아 준 부모를 물어 죽인다고 했다.

자신은 그런 독사다.

아비를 모르는 독사.

독을 품은 아비에게서 태어났으니 독을 품은 새끼인 것이 당연하다.

“나는 단 한 번도, 아바마마를 죽이고 싶지 않을 때가 없었어.”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둔한 나도 그건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아바마마를 미워하는 것도, 아바마마께서 너를 미워하는 것도. 나는 다만 네가 그렇게 미워하던 아바마마의 여자를 네 후궁으로, 아니지. 그 여자를 네가 사랑하게 된 것이 의외라서. 보통은 하나를 미워하면 주변의 것들도 전부 미워하기 마련이 아닌가?”

“내가 먼저 만났거든. 아바마마께서 그 여자를 빼앗아 가기 전에, 내가 먼저 그녀를 만났어. 아주 오래전에. 그때부터 그녀는 내 것이었어. 나는 내 것을 되찾은 것뿐이야.”

“아주, 오래전?”

“그렇지. 아주 오래전.”

하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오래전, 은호는 기억 못 하는 그런 때가 있었다.

금단의 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