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88화 (88/108)

88.

하진이 편지 쓰기를 마치자 그 내용을 확인한 진원이 그 편지를 접어 제 수하에게 건넸다.

이제 전서매는 빠르게 황궁까지 날아가 홍문에게 편지를 전할 것이다.

해가 지기 전까지 편지가 황궁에 도착하면 빠르면 내일이라도 견아를 만날 수 있다고 진원이 예상했다.

오늘 하루, 그리고 밤, 내일까지 기다리면 이 일은 끝난다.

견아를 만나면 자신은 그녀와 함께 사라질 생각이다.

외조부 허연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이미 견아와 사라질 방법은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하진과의 약속 또한 지킬 생각이다.

하진이나 하진의 여자를 해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외조부인 허연이 위험해지겠지만, 하진을 믿고 약조를 받을 것이다.

이 일이 전부 끝나고 나면 허연에게 죄를 묻지 말아 달라는 약조다.

이 일을 꾸민 것은 전부 자신이고, 죄인인 자신은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서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니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허연은 그저 관직에서 물러나 안온한 노년을 보낼 수 있게 선처해 달라고 할 작정이다.

이 일을 처음 계획할 때부터 진원은 이미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황제의 자리.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황제의 자리가 무엇이길래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받아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권력을 쥐고 있든 권력이 없든 간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황제든 필부이든 상관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아무리 강한 힘을 휘두르고 살아도 고작해야 100년이다.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과 살 수 있는 시간으로 따지면 100년도 되지 못한다.

20년 혹은 40년 그것이 전부다.

그 짧은 시간을 권력을 위한 암투로 보낸다는 것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렇게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면서까지 얻은 권력과 자리를 고작 20년, 30년을 누리다가 죽음이 눈앞에 찾아오면 그때 후회가 들지 않을까.

역대의 황제들은 정말 죽음 앞에서 만족하며 눈을 감았을까.

죽는 순간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을까.

아니다.

가진 것을 놓고 가야 해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지도 모르고, 죽음 앞에서 그동안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진원 자신이 그랬었다.

옹주에서 독을 마시고 쓰러지는 순간, 후회했었다.

끔찍한 독의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죽음을 예감한 순간,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후회한 것은 견아였다.

조금 더 일찍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지 못한 것, 그녀의 존재를 비밀로 해야만 했던 것. 그런 것들이 전부 후회가 되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자신에게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달려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왕자라는 지위, 어머니,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더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생각하겠다고, 그녀만을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회가 주어졌다.

그대로 죽었더라면 이런 기회는 생기지 않았겠지만, 하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두 번째 삶을 주었으니 이번 삶에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어머니의 삶이 불쌍했었다.

아버지의 삶 역시 불쌍한 것은 마찬가지였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외조부 허연 역시도 불쌍하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외조부. 모두 권력에 취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권력이 결국은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것을 모르고 그 안에서 허둥대다가 결국에는 그렇게 죽어 갈 것이다.

외조부 허연은 절대로 스스로는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니까, 스스로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 늪에서 끄집어내 주는 것도 외조부를 위한 일이다.

지금은 외조부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느껴서 절망할지 모르지만 권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면서 노년을 보내다 보면, 마지막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그 노년의 삶에 오히려 고마워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허연은 진원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혈육이다.

그러니 그의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진에게서 받을 생각이다.

이 정도면 그와 그의 여자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좋지 않을까.

서로 소중한 것을 주고받는 것으로 하진과의 인연도 여기서 끝이다.

“내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긴 하루가 되겠군.”

하진이 진원을 쳐다봤다.

그의 손은 아직 자유로웠지만 진원은 하진을 묶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호는 지금 여기에 없다.

은호가 무사하다는 것만 알려 주고 진원은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진원이 은호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하진도 안다.

“묶지 않아도 되겠어?”

하진이 제 손을 내보였다.

“도망치지 못해.”

“나를 과소평가하는 건 좋은데, 그러다가 후회해, 형님.”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여자를 두고 말이야.”

“하긴.”

혼자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진원의 말대로 은호가 있다.

‘이루가 여길 찾아내도 은호가 싸움에 휘말리면 곤란한데…….’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다.

이래서 소중한 것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생긴다는 것은 약점이 생긴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은 약점도 없다.

그러나 뭔가 생기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생긴다.

두려움이 생기고 자꾸만 주저하게 되고, 그리고 안전한 길을 찾게 된다.

하진이 그랬다.

예전의 자신은 이렇지 않았다.

보다 잔인하고, 보다 냉정하고, 보다 강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주저하고, 망설이고,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찾게 되고, 무엇보다 잔인해지는 것을 꺼려 하고 있다.

은호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가 실망하지 않을까, 그녀를 울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싫어하는 방법이 아닐까, 미움받게 되는 건 아닐까, 자꾸만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된다.

손과 발에 밧줄이 묶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된 기분이다.

누군가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 끝을 쥐고 있는 기분을 항상 느끼게 된다.

주은호 때문에 행복하지만 주은호 때문에 두려워진다.

“나는 형님을 놓아줄 수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형님을 쫓아갈 거야. 형님은 평생 자유롭지 못할 거야, 아마.”

“그렇겠지.”

“이건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럴지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저주 속에서 태어나서, 그 속에서 자라다가 그 저주로 인해 목숨을 잃지.”

황궁이라는 화려한 항아리 속에서 태어나, 같은 피를 나눠 가지고 태어난 형제들끼리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다가 그중의 하나가 살아남고, 살아남은 것은 다시 그 항아리 안에서 새끼를 낳아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새끼들이 그렇게 서로를 죽이는 것을 보게 되고.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그래도 그 항아리가 좋다고 꾸역꾸역 항아리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고 서로를 죽인다.

“나는 내 아이에게는 이 저주를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야.”

진원의 말에 하진이 피식 웃었다.

그건 하진도 바라는 것이다.

자신과 은호의 아이에게는 이 저주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바란다고 이루어진다면, 이미 오래전에 저주는 끝이 났을 것이다.

그건 쉽게 끊어지는 저주가 아니다.

*

“하아…….”

은호가 심호흡을 했다.

은호는 다시 원래 갇혀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진원 왕자에게 견아가 금와에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견아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것으로 이 일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견아를 진원 왕자와 만나게 해 주고, 진원 왕자가 자신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일이 끝난다면 모든 것이 간단하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해결될 수 있을까?

진원 왕자가 자신들을 무사히 보내 줄까?

은호는 진원 왕자에 대해 잘 모른다.

그와는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었다.

견아의 이야기로 전해 들은 진원 왕자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것은 견아에게 좋은 사람일 뿐이다.

하진도 자신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에게 좋은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진원 왕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황제를 납치했다.

견아를 만나고 두 사람이 도망친다고 해도 이 일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진원 왕자가 자신들을 풀어 줘도 진원 왕자와 함께 일을 도모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순순히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있어.’

견아가 금와에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 시간을 더 벌 수 있다.

‘이루 장군께서 구하러 오겠지만…….’

이루라면 분명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싸움은 일어날 것이다.

‘내가 걸리적거리면 안 되는데…….’

지금 납치된 것도 자신 때문이다.

하진 혼자였다면 절대로 납치 같은 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폐하를 구할 수는 없지만…….’

하진을 구할 정도의 힘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혼자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이루가 하진을 구해 낼 때 적어도 자신 때문에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망쳐야 해. 나 혼자서라도.’

자신이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 하진을 돕는 일이다.

아니, 하진을 위해서 여기서 자신은 도망쳐야 한다.

견아를 진원 왕자와 만나게 해 주는 건 이 모든 일이 다 끝난 다음에도 늦지 않다.

“하아…….”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은호가 바닥에 손을 댔다.

이 집의 구조는 조금 전에 들어오며 이미 대충 머릿속에 그려 놓았다.

은호가 있는 이곳은 이 층이다.

아래층은 비어 있다.

아니,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하진은 옆의 건물에 있다.

따로 분리해서 가둬 놓은 것이다.

낡은 집이라 허술해서 바닥의 널빤지는 걸을 때마다 소리를 냈다.

이것을 뜯으면 아래로 이어진다.

여자라고, 임신한 여자라고 생각해서 허술한 곳에 가둔 것인지, 아니면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상관없다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바닥을 뜯고 달아날 수 있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상해도, 달아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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