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러니까…….”
홍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견아라는 궁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다는 겁니까?”
“당연히 알고 있다.”
“어디에 있습니까?”
“쉽게는 말해 주지 못하지.”
“부인.”
“나는 그 궁녀가 임신한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게서 뭔가를 듣고 싶으면 내 조건 먼저 들어줘야 할 거다.”
심 부인, 은송이 확신에 찬 눈으로 홍문을 쳐다봤다.
심 부인은 지금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홍문을 보고 뒤를 따라와 봤는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황제가 납치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조금 전 은송은 이상한 것을 봤다.
연환궁 이곳저곳에 수상한 자들이 움직이며 뭔가를 준비하는 것을 봤었다.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것을 연환궁의 은밀한 곳에 숨기는 걸 본 것이다.
그 냄새는 은송이 아는 냄새였다.
유황.
은송은 장사꾼의 딸이다.
부친이 취급하는 물건들 중에는 유황도 있었다.
한 번 맡으면 잊을 수 없는 유황의 냄새를 은송은 바로 알아차렸다.
유황을 왜 연환궁에 은밀하게 숨기겠는가.
유황의 목적은 여러 가지지만, 지금 은송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불’
이다.
유황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타오른다.
은송은 머리가 좋은 여자다.
황제가 옹주 시찰에 연비를 굳이 데리고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홍문이 연환궁에 발걸음을 한 것에서부터 수상한 자들이 연환궁 곳곳에 유황을 숨겨 놓은 것을 전부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홍문은 황제의 은밀한 명을 받아 이 연환궁 전체를 불태워 버리려는 것이다.
정확히는 연환궁이 아니라 연환궁의 궁녀들.
지금 황제에게 있어서 가장 눈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들은 바로 후궁들이다.
연환궁의 후궁들은 황제가 원해서 들인 후궁들이 아니다.
귀족들이 강력하게 요구를 한 까닭이고 황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황제가 힘이 없어서 후궁들을 입궁시키라는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건 은송도 알고 있다.
황제는 귀족들과 거래를 한 것이다.
강인사에 있는 주은호를 후궁으로 들이기 위해서 다른 귀족들의 딸도 함께 받아들였을 뿐, 황제는 애당초 후궁을 곁에 둘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번에 있었던 금환궁 사건을 일으킨 전말이다.
황제는 금환궁에서 후궁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다.
물론 그 빌미를 제공했던 것은 자신의 말실수였다.
황제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작은 빌미라도 잡으면 그 즉시 귀찮은 후궁들을 전부 정리해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것을 막은 것이 연비 주은호다.
그리고 주은호는 후궁들을 모아 놓고 연환궁에서 나가 후궁의 지위를 버리되 자유로운 삶을 택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심장한 제안까지 했었다.
어쩌면 주은호는 알아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금환궁에서의 사건은 그때 겨우 넘어갔어도 황제가 기어이 자신들을 죽이려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주은호는 정말 착한 여자다.
그러나 주은호는 착해도 황제는 그렇지 않다.
황제는 집요한 성품이니 기어이 후궁들을 처리하려 들었을 테고, 황제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홍문이다.
홍문.
황제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뱀 같은 인간.
그 인간이라면 황제의 뜻을 받들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연환궁에 불을 지를 수 있다.
아니, 지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황제가 납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은송은 지금 홍문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홍문이 견아라는 그 궁녀를 찾는 까닭은 그 궁녀가 황제의 납치와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 궁녀를 찾으라고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해서 거래를 하면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살아남아야지.’
은송이 홍문을 노려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사람 팔자 모른다더니…….’
너무 우습다.
장사꾼의 딸로 부족함이 없이 화려하게 살았는데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라 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그 자리를 벼르고 후궁으로 입궁했더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는,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르고 싶었는데 죽음이라니. 그것도 개죽음.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절대로 후궁 따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심창의 양녀 따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황궁에 있으면 죽음 외에는 없다.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야 한다.
기회를 놓치면 죽임당한다.
황제는 절대로 후궁들을 살려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심창도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피도 이어지지 않은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까 살려면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은송이 찾은 살길은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하늘이 살라고 주신 기회다.
“일단 궁녀가 어디 있는지부터 알려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부인의 조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그대의 말을 어찌 믿겠어.”
안전을 보장받기 전에는 절대로 홍문의 말을 믿을 수는 없다.
은송은 홍문을 믿지 않는다.
보장을 해 줘도 뒤통수를 칠 인간이 아닌가.
“부인.”
“나는 황궁에서 죽기 싫으니, 나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 준다고 약속하면 그 궁녀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마.”
“…….”
홍문이 심 부인을 쳐다봤다.
후궁 주제에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신에게 당당하게 하대를 하는 여자.
황제의 총애를 받는 주은호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하대를 하지 않는데 이 여자는 아주 오만하고 당당하게 하대를 해 댄다.
당당함만으로는 황후감이다.
심창의 양녀.
양녀인데 심창의 친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심창의 욕심을 닮은 여자다.
욕심만 많은 것이 아니라 독하고, 또 머리가 좋은 여자다.
후궁의 암투에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고 예전에 죽은 화비와 닮은 여자이기도 하다.
이 여자는 호락호락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급한 것은 자신이다.
지금 하진을 구해야 하는 입장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견아라는 궁녀의 신변을 확보해야 한다.
심은송이 정말 그 궁녀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지금은 심은송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한다.
‘심창은 역시 이 일과 관련이 없는 건가? 하지만 이 여자를 살려서 황궁에서 내보내면 후환이 없다는 보장도 없는데…… 들어준다고 했다가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까?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일단 황궁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약속을 들어주는 척하고 그 궁녀의 신변을 확보한 다음에 황궁에서 내보내 주고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고 묻어 버리면 누가 알겠는가.
비겁한 짓이라고?
원래 사람이 사는 것이 비겁함의 연속이다.
정당한 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
깨끗함만으로도 소망을 이룰 수 없다.
결국 심은송과 홍문 자신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은 꼴인 것이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궁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어떻게 황궁에서 내보내려는 것이지?”
“문을 열어 드릴 테니 그냥 당당히 나가시지요?”
이 여자가, 지금 한시가 급한데 왜 자꾸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까?
“후궁이 황제 폐하의 황명도 받지 않고 멋대로 황궁을 나가게 되면 그 목이 잘리게 되는데 너는 지금 내게 스스로 목이 잘릴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냐?”
“그러면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시라고 하면 약속을 지킬지 어떨지 누가 알겠냐고 트집을 잡으실 것이고, 지금 나가시라고 하면 목이 잘린다고 뭐라 하시고,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인께서도 알다시피 지금 폐하는 불온한 자들에게 납치를 당하신 상태입니다. 부인께 황명을 내리실 수도 없는 입장이십니다.”
“그 일을 꾸민 것이 누군지 아느냐? 폐하의 납치 말이다.”
“그것까지 아셔야겠습니까?”
“숨기는 자와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 견아라는 궁녀가 얼마나…….”
사실 은송은 견아라는 궁녀가 이 일에 대체 왜 중요한지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 궁녀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내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것만 안다.
지금 홍문이 이렇게 찾는 것을 보니 황제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기 시작했다.
황제가 납치된 상황에서 그 궁녀를 왜 찾겠는가.
그 아이가 바로 황제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변고가 생기면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것은 바로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다.
지금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다.
주은호가 임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임신을 한 또 다른 여자.
주은호가 데려간 그 궁녀.
누구의 아이를 품고 있는지 절대로 불지 않던 그 궁녀는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 속에 품고 있던 아이가 황제의 아이라면 궁녀가 끝까지 비밀을 말하지 않은 것도, 주은호가 그 궁녀를 데려간 것도, 그리고 지금 홍문이 그 궁녀를 찾고 있는 것도 납득이 갔다.
그 뱃속의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다.
그 아이가 하진의 아이라고 은송은 확신했다.
그때 홍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을 꾸민 것은 허연입니다.”
“…….”
‘허연? 그 허연? 화비의 아비? 진원 왕자의 외조부?’
뜻밖의 이름이 홍문의 입에서 나오자 은송의 숨이 덜컥 멎었다.
갑자기 생각이 빨라졌다.
‘그 궁녀가 어느 전의 궁녀였다고 했었지…… 진원 왕자 궁이었나…… 그랬던 것도 같고…… 그랬던 것도…… 그랬던 거라면…… 헉……!’
은송이 놀란 눈으로 홍문을 쳐다봤다.
“진원 왕자의 아이였구나.”
대답이 없는 홍문을 보며 은송은 자신이 제대로 짚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궁녀가 품은 아이는 다름 아닌 죽은 진원 왕자의 아이였던 것이다.
지금 황제와 연비가 죽으면 그 아이가 황제가 된다는 것 역시도 바로 깨달았다.
지금 그 궁녀는 황금알을 품은 거위와 마찬가지다.
아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