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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86화 (86/108)

86.

하진이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제일 먼저 홍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두 명이었다.

허연과 심창.

“파발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냐?”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홍문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럴 때일수록 머릿속을 차갑게 해야 한다.

괜히 허둥거리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다.

벌어진 일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해야 하는 것은 이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냉정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뿐이다.

“네. 봉화가 오른 것만 확인했습니다.”

봉화를 올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첫 번째 타국의 침략의 경우, 두 번째로 반란, 세 번째로는 지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네 번째로 전염병의 급속한 창궐, 마지막으로는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경우다.

그 각각의 상황에 따라 봉화는 그 피어오르는 불의 갯수과 연기의 색이 달라진다.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에는 세 개의 봉화가 오른다.

그중에서 황제의 사망은 세 개의 봉화 뒤에 검은 연기.

크게 다쳤거나 병을 얻어 위중할 경우에는 붉은 연기.

그리고 황제가 납치되었을 경우에는 푸른 연기가 오른다.

지금 오른 봉화로는 단순히 황제가 납치되었다, 정도밖에는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오른 봉화냐?”

“금와입니다.”

“멀리 가지도 못하셨군.”

옹주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와에서 일을 꾸몄다.

“곧 파발이 도착하겠군.”

금와에서 말을 달려 황궁까지는 그리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파발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이루가 일을 신속하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파발을 늦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가, 아니면 그만큼 정신이 없었던가 둘 중의 하나겠군.’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검은 연기가 아니라 푸른 연기라는 것이다.

‘폐하도 참, 납치나 당하시고…….’

하진이 납치를 당하는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진이라면 납치를 당하기 전에 그 자리에서 전부 죽이고 그도 죽을 각오로 칼을 들었을 것이다.

그 사내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납치 따위를 당하는 것을 용납할 정도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사내 정도라면 손에 칼 한 자루만 들고 있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그런 사내다.

인간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식하게 강한 이루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진은, 홍문이 본 중에 정말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내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주위에 시체를 쌓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제 왔느냐.’

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전신이 오싹거릴 정도다.

그런 사내가 납치를 당했다면 십중팔구 그건 연비 때문이다.

주은호가 아마도 인질이 되었을 것이다.

주은호 때문에 칼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고 정말 어이없이 잡혀갔겠지.

그리고 이루는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서 다른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추격할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무작정 추격한다고 해서 하진을 찾아낸다는 보장도 없도 납치범들을 따라잡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 일을 꾸밀 때에는 작정을 하고 계획했을 것이다.

황제를 납치하려다가 실패하면 당사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가문이 몰살하고 구촌에 이르는 모든 일족을 멸절하게 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꾸미는 자들이 호락호락 발각되게 일을 꾸몄을 리는 없다.

결정적으로 죽이지 않고 납치했다.

납치보다는 죽이는 편이 위험 부담이 덜하다.

황제에게 칼을 들이댄 이상 황제를 살려 두는 것은 등 뒤에 위험을 품고 있는 것이고 죽이면 어쨌든 그보다는 덜 위험하다.

그런데도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황제를 통해 노리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납치범들은 황제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전까지는.

이런 것들을 감안하면 이루는 지금 허둥거리며 황제의 흔적을 찾아 그를 구해 내려고 가능성 없는 짓을 하기보다는 내통자가 누구인지 그걸 먼저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 바보는 그런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홍문이 연환궁을 둘러봤다.

이미 준비는 끝내 놓았다.

밤의 어둠이 내리면 연환궁 곳곳에서 불길이 오를 것이고 후궁들은 잠이 든 채로 불길에 휩싸여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연환궁의 구조상 입구만 막으면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감옥 안에서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입구 바로 앞에서 전부 타 죽는 것이다.

후궁들, 궁녀들, 전부 말이다.

이 연환궁 안에는 심창의 딸인 심 부인도 있고 진원 왕자의 아이를 품은 그 궁녀도 있다.

물론 연비전의 궁녀들도 있지만 상관없다.

전부,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태워 버리고 이 연환궁 자체를 황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불길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연환궁의 존재도, 귀찮은 후궁들의 존재도, 그리고 하진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 있는 진원의 아이도 전부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이 연환궁의 자리에는 작은 숲을 만들 생각이었다.

잿더미 위에서는 나무가 잘 자라는 법이다.

십 년만 지나도 이곳에 연환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그리고 연환궁 화제의 누명은 심 부인에게 뒤집어씌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심 부인이 가장 적합했다.

심 부인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 책임을 심 부인의 아비인 심창에게 물을 생각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증거가 대신 증언할 것이니 말이다.

‘심 부인이 운이 좋은 건가?’

홍문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자, 심창일까, 아니면 허연일까.’

지금 황제를 납치할 정도의 인물은 누구일까.

배후를 알아내면 하진을 지금 찾겠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닐 이유가 없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그것을 움직이는 자가 있고, 그자를 손에 잡으면 벌어지고 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모든 것의 원리는 그런 것이다.

‘심창, 허연…….’

누구에게 득이 있을까.

황제가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으로 치면 아무도 없다.

진짜 아무도 없다.

심창이든 허연이든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죽어서 득을 볼 사람은 없다.

심창의 딸이 후궁이긴 하지만 아직 자식을 보지 못했다.

자식을 낳지 못한 후궁은 황제의 후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 황제가 죽어서 득을 볼 사람이라면 위연이다.

‘위연 전하는 아니시고.’

물론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겠지만, 위연은 아니다.

하진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황제가 될 일 순위는 위연이고, 위연이 황위를 물려받지 않으면 다른 친왕들에게로 그 자리가 넘어간다.

그리고 그걸 바랐더라면 하진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죽이지 않고 납치했다.

하진을 납치해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허연이 폐하를 납치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만약 허연이 견아라는 궁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면 하진을 죽였을 것이다.

먼저 그 궁녀를 확보해 놓고 그 아이의 존재를 제 손에 넣은 다음 하진을 죽이고 그 아이로 하여금 황제가 되도록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연이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고, 아이를 확보했을 경우다.

아직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왕자일지 공주일지 그것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진짜 진원 왕자의 아이인지 그건 또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단순히

‘내가 진원 왕자의 아이를 품었다.’

는 궁녀의 말만 믿을 수는 없다.

허연을 이 일의 배후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수가 있다.

그러면 심창?

하진을 납치해서 심창이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일까.

심창이 지금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 부인이 황제의 승은을 입고 황제의 자식을 낳는 것이다.

그런데 황제를 납치해서 심 부인에게 승은을 내려 달라고 청을 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심창도 황제를 납치해서 얻는 것이 없다.

그러면 제삼자가 있다는 걸까.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도 아니다.

원한을 따지면 한두 명이 아니다.

단순히 원한으로 따지자면 수백 명의 원한이 있을 것이다.

‘허연.’

홍문이 허연으로 결론을 내렸다.

무리수가 있어도 배후는 허연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황제의 납치로 이득을 보는 것은 허연 말고 아무도 없다.

황궁 내부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황제의 옹주 시찰에 대해서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으며 금와와 옹주까지 제 사람을 심어 놓고 황제를 납치할 계획을 꾸밀 수 있는 사람.

‘허연이 견아라는 궁녀의 존재를 안다고 치고, 아이의 존재를 안다고 치면…… 폐하를 납치하고 연비의 목숨을 위협해서 그 아이를 진원 왕자의 아이로 인정하라는 교지를 내리게 할 수도 있겠지. 황제의 정식 교지가 내려지면 그 후에 황제가 죽어도 교지의 효력은 있으니까 태어나는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폐하의 후계에 있어서 일 순위가 될 것이고,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데…….’

훙문이 연환궁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만약 여기에 견아라는 그 궁녀가 없다면 허연이 그 여자를 데리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이 일의 배후가 허연이라는 뜻이겠지.’

일은 간단하다.

견아라는 궁녀를 찾아야 한다.

연환궁에 그녀가 없다면, 이 일은 허연의 짓이고, 그렇게 되면 허연을 고문해서라도 하진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견아라는 궁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연비마마의 처소를 살펴보고 그곳에 없으면 연환궁을 전부 뒤져서라도 그 궁녀를 찾아내라. 안 되면 황궁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할 것이다.”

홍문이 보고를 올린 금군의 부장에게 명을 내릴 때였다.

“내가 알고 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에 홍문이 당황해서 뒤를 돌아봤다.

누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새 뒤에 여자가, 그것도 심 부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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