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85화 (85/108)

85.

“흑흑흑. 우리 연비마마…… 흑흑흑…… 이를 어째…….”

사비가 펑펑 울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우리 마마, 우리 마마 몸도 약하신데, 흑흑흑…….”

코를 팽 풀고 다시 엉엉 우는 사비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는 이가 있었다.

어린 얼굴을 한 병사였다.

얼핏 보기에는 소년 병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궁녀 견아가 남장을 한 모습이다.

연비의 가마 곁에서 심부름을 드는 병사가 필요한데 연비가 소년 병사 쪽이 좋다고 하여 심부름을 들게 된 연환궁 경비를 보던 소년 병사, 라는 것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가마 곁에 있어야 연비도 안심이 되고 다른 병사들과 말을 섞을 일이 없어서 들킬 염려도 적었다.

“마마는 괜찮으실 거예요.”

견아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사비를 위로했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에 지금 다들 혼비백산해서 군영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제가 머물던 객잔에 갑자기 불이 나더니 황제와 연비가 납치되었다.

행렬을 이끌던 장군 이루와 그의 부하들이 지금 황제를 찾기 위해 납치범들을 추격해 갔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불타는 객잔 안에서 끌어낸 궁녀와 내관들이 한쪽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죽은 사람이 없어도 황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엄청난 사건이 되어 버린다.

만에 하나 황제가 살아 돌아오고 연비가 죽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곳 금와는 역모의 땅이 되어 잿더미가 될지도 모른다.

연비를 향한 황제의 총애는 상상 초월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 연비가 죽기라도 하면 황제는 이 땅 전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황제와 연비, 둘 다 살아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마마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실 거예요.”

견아가 진심으로 사비를 위로했다.

지금의 말은 진심이다.

견아는 연비가 자신을 돕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주고 있는지 알고 있다.

황궁 안에서 살아오며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진원 왕자였고 두 번째는 위연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연비다.

황궁 안에서는 좋은 사람은 살지 못한다.

좋은 사람은 죽거나 무시당하고 만다.

견아도 황궁에서 어려서부터 자랐다.

여덟 살에 황궁에 입궁해서 본 것들은 나름대로 많다.

황궁이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것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배신을 거듭하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착하기만 했던 진원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잘 봤다.

누구도 믿지 말자, 그것이 견아의 결심이었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진원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었다.

자신이 진원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들거나 그 아이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 황궁에는 딱 그 두 가지 부류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연비는 달랐다.

연비는 심 부인과도 달랐고 지금까지 견아가 황궁에서 만나 온 다른 사람들과도 달랐다.

황제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연비는 자신을 지켜 주려 하고 있다.

[여기에 있으면 분명 폐하께서 너를 해치려 드실 거다.]

황궁을 떠나기 전날, 연비는 그렇게 말했었다.

[옹주까지 가는 길이 네게는 무척이나 고단하고 험한 길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옹주까지만 가면 너를 보내 줄 수 있어.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필요한 돈은 내가 준비해 주마.]

옹주.

진원 왕자가 죽은 곳.

옹주를 벗어나면 드넓은 땅이 펼쳐져 있다.

그곳만 벗어나면 누가 어디로 가든지 추적하는 것은 힘들다.

이 나라는 광대하고 이 넓은 나라의 어느 구석에 누가 숨어 사는지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연비의 말이 맞았다.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고 아이를 안전하게 낳아 키우려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황궁을 빠져나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자 혼자 몸으로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살았기 때문에 황궁 밖 세상의 물정도 모르고, 할 줄 아는 일도 없다.

궁녀가 황궁 밖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토록 어렵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험한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연비는 황궁에서 도망치게 해 줄뿐더러 돈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연비전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연비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어의를 불러 자신의 몸을 살피게 했고 약을 지어 줬다.

심 부인에게 고초를 겪느라 상했던 몸을 치료해 주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옹주로 출발하기 전날, 견아는 연비전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안심하고 편안하게.

이곳은 금와, 금와를 지나 며칠 길을 더 가면 옹주다.

걷는 것이 힘들어도 며칠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힘을 냈다.

그런데 오늘, 갑작스럽게 일이 터졌다.

‘누가 대체…….’

납치된 황제와 연비.

그 일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황제의 목숨은 누구라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원 왕자가 독을 마시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선황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의 황제도 마찬가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 가장 위험한 것이다.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황제가 되면 황후를 맞이해야 하고, 후궁들도 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만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네게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겠고 나는 너를 상처 입힌 것 때문에 또 괴로워하겠지. 그리고 나를 상처 주려고 너를 노리는 일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황제가 되어야겠느냐?]

진원은 항상 그렇게 말했었다.

모친인 화비가 그를 불러다 놓고

‘황제가 되어야 한다.’

고 강조할 때마다 그는 늘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날이면 자신을 품에 안고 항상 한탄하듯 그렇게 말했었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살아야 행복한 것 아니겠느냐.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누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느냐. 황제가 불행한데 백성이 행복하겠느냐.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이대로 내 아우가 황제가 되고 나는 초야에 작은 집을 짓고 너와 살아가는 것만으로 족한데, 주위에서는 나를 그렇게 두지 않는구나.]

진원이 원했던 것은 필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견아도 원했던 것이다.

황궁의 궁녀들 중에는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 첩지를 받아 일생을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것이 꿈인 궁녀들도 많다.

하지만 견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무슨 행복이란 말인가.

무수하게 많은 여자들 중의 한 명이 되어서, 비단을 몸에 걸치고 진주와 금을 몸에 휘감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누군가를 미워하고 제 자리를 빼앗길 것을 염려해야 하고 자신을 찾아 주지 않는 사내를 원망해야 한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내와 아이를 낳고 매일 얼굴을 보고, 그를 위해서 옷을 짓고 그는 자신을 위해서 나무를 해 오는 그런 것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

그런 것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진원 왕자는 죽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그의 아이뿐이다.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할 수 있었다.

심 부인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연비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심 부인도 연비도 배신하고 팔아넘길 수 있었다.

그 착한 위연도 속여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그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아무도 몰래 도망칠 수 있다.

아니, 지금 도망쳐야 한다.

만약 정말 황제와 연비가 죽었다면,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후에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범인을 색출하려 들 것이고 내통자가 있나 조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비는 엄중해지고 자신이 여자라는 것과 궁녀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

당연히 의심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임신한 것까지 들켜서 자신이 어찌 될지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다.

불을 끄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황궁으로 파발을 보내고 황제를 찾기 위한 병사들을 꾸리고 있느라 어수선한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견아도 안다.

하지만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해서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다면, 자신은 사람이 아니다.

정말 사람이 아니다.

진원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이리와 승냥이 떼들과 다름없다.

죽은 진원이 자신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연비의 위험을 자신이 이용한다면 자신은 정말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연비에게는 은혜를 입었다.

아마 뱃속의 아이도 어미가 은혜를 갚는 사람이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 연비마마가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천신께 빌어요.”

견아가 사비의 손을 꽉 잡았다.

할 줄 아는 것은 이것뿐이다.

진원이 출정할 때도 자신은 고작 천신께 비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신은 들어주지 않았고 진원은 죽었다.

지금도 천신이 자신이 비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빌고 싶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면, 이 작은 염원이 모여서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천신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

“봉화가?”

연환궁을 둘러보던 홍문이 연환궁 안으로 뛰어 들어와 긴급한 소식을 알리는 내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봉화가 오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반란, 혹은 타국의 침략.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 시기에 봉화가 올랐다니,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침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역시나 반란 쪽이다.

‘하필이면 폐하께서 옹주로 가신 사이에…….’

큰 반란이 아니면 지방군이 진압할 수 있다.

옹주 쪽만 아니기를 바라며 다시 물으려는 홍문보다 내관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폐하께서 납치되셨다고 하옵니다.”

순간 홍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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