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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83화 (83/108)

83.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황위에는 욕심을 낸 적이 없다.”

진원의 말이 거짓 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하진도 알고 있다.

하진은 한때 진원을 어리석다 생각했었고 또 동시에 그를 가엾다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는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믿고 진심을 털어놓으면 그것이 독으로 작용해 그 신뢰가 칼날이 되어 언젠가 제 심장을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진심을 보여 주는 것과 진심으로 믿다는 것. 황궁에서만큼은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진심을 보여 주는 진원은 그저 어리석었다.

진원이 그 어미인 화비의 절반 정도만 교활했더라면 아마 지금 황위에 앉아 있는 것은 하진 자신이 아니라 진원이었을 것이다.

욕심이 없고, 간교한 꾀를 모르고, 그저 순하기만 했던 사내라 일찍 요절했다.

아니, 요절한 줄 알았다.

“나는 다른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난 일에 더 이상 무엇 하나 연연하며 살아갈 생각도 없다. 더는 황족으로 살아갈 생각도 없고, 황궁과 엮인 채로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진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황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나는 그저 평범한 사내로 살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여인과 자식을 키우며 필부로 살아가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것을 들어주면 안 될까?”

어리석을 정도로 소박한 소망이다.

하지만 하진은 이 평범한 소망을 들어줄 수가 없다.

진원은 물론 그렇게 살려고 할 것이다.

그의 여자와 함께 어느 산속에 처박혀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만족할 그런 성품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건 진원의 생각이다.

진원을 따르는 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진원을 따르고 지금 진원을 돕고 있는 자들도 과연 욕심이 없을까.

지금 이 일은 진원 혼자서는 절대로 꾸미지 못하는 일이다.

애초에 독을 마시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진원을 숨겨 준 이가 있을 것이다.

그를 숨기고 그를 치료해 주고 그가 죽었다고, 그리고 화장시켰다고 거짓으로 고해 올린 이가 옹주에 있을 것이다.

옹주 성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조정에도 진원의 편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원이 무슨 수로 그 궁녀가 수태한 사실을 알았겠는가.

물론 출전하기 전에 이미 궁녀의 수태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진 자신의 옹주 시찰 날짜를 이미 사전에 입수한 것은 조정에 첩자가 있지 않은 이상은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다.

옹주 시찰 자체는 미리 결정되었지만 그 일정과 거치는 길목은 이틀 전에 결정되었다.

어느 길목으로 갈 것인지 정해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금와에서 쉬어 갈 것이라는 건 오늘 아침에야 금와에 전달되었다.

미리 알려 두면 위험한 자들이 함정을 파 놓을 수 있다며 홍문이 중간에 머물 곳은 반드시 반나절 전에 알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금와에서 쉬어 갈 것은 오늘 아침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진원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진의 일정을 손에 꿰고 있는 자 중에서 첩자가 있다.

금와의 객잔에 불을 지르고 자신과 은호를 납치하고, 그리고 분명 뒤쫓아 오는 이루를 누군가 교란하거나 막고 있을 것이다.

이건 단지 몇 사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꽤 거대한 세력이 진원의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 하진이 의심하는 것은 허연이다.

화비의 아비이자 진원의 외조부인 허연.

아직 조정에 실세를 가지고 있고 허연을 따르는 자들도 아직은 조정의 요직에 앉아 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는 화비를 모시던 궁녀들과 내관들도 있다.

그들이 허연을 지금 따르고 있고, 허연이 손을 써서 진원을 구하고 지금 이 모든 일을 꾸몄다면 허연은 과연 진원이 필부가 되어 초야에 묻히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아닐 것이다.

허연이 그저 외손자를 살리려고 이런 짓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허연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 정도로 위험한 짓을 고작 외손주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꾸몄겠는가.

아니다.

허연은 진원을 기어이 옥좌에 올리려고 할 것이다.

지금 진원은 허연의 달콤한 말에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 허연은 진원에게 이렇게 속삭였겠지.

하진을 납치하고 그를 위협해서 여자와 아이를 무사히 구해 낸 다음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아마 듣기 좋게 속였을 것이다.

사람을 원체 잘 믿는 진원이니 외조부의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허연은 그 정도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는 하진이 절대로 그들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며 여자와 아이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진을 죽이고 황제가 되어야 할 거라며 설득하려 들 것이다.

그게 아니면 진원이 모르는 사이에 하진을 죽이고 하진이 죽었으니 어쩔 수 없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고 종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계략을 꾸몄던 간에 허연은 진원을 황제로 만들려고 할 것이고 진원이 지금 무슨 약속을 자신에게 해 주든 허연은 절대로 자신과 은호를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진원이 바라는 대로 들어주면 자신과 은호는 죽는다.

자신과 은호가 살려면 진원이 바라는 것, 그 궁녀는 절대로 내 줘서는 안 된다.

그 궁녀는 진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형님.”

하진이 진원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필부로 살아가겠다는 형님의 말은 나도 믿고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형님에게는 행복이라는 것도 알지만 너무 늦었어.”

“늦었다니?”

늦었다는 말에 진원의 표정이 변했다.

‘늦었다.’

는 말에서 풍기는 불길한 여운을 진원이 알아차린 것이다.

“늦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 궁녀는 황궁에 두고 왔는데, 만약 옹주로 향하는 도중에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황궁으로 파발이 보내지고 파발을 받은 즉시 황궁을 전부 불태워 버리라는 명을 내리고 왔거든.”

하진의 눈이 서늘하게 웃었다.

“홍문을 두고 왔지, 형님. 홍문은 형님도 알고 있지 아마?”

“홍문이라면…….”

“어떤 일에도 홍문은 주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무정하고 판단력도 재빨라서 내가 습격을 받았고 생사가 불명이라는 걸 알게 되면 홍문은 황궁 전체를 불태워 버릴 거야. 내가 죽으면 홍문은 자기도 죽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다른 자에게 황궁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전부 태우는 쪽을 택하겠지. 나 역시 그걸 명령해 놓고 왔고. 황궁이 불탈 때 누구도 그곳에서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걸 말해 주고 싶군. 형님.”

하진이 진원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왜 이 위험한 길에 내 여자를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내 아이까지 잉태한 여자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황궁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야.”

하진의 말에 진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손끝이 덜덜 떠는 것이 하진의 눈에도 들어왔다.

사람은 겁에 질리거나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법이다.

무른 성격의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단 하나만을 원하는 사내에게 그 하나를 지금 당장 잃을 수 있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사내는 아마 미칠 것이다.

이제 칼자루를 잡은 쪽은 하진 자신이다.

허연이 뭐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아니, 허연은 지금 여기에 없을 것이다.

허연은 여기에 직접 올 정도로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다.

이곳에서 진원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에 성공하고 나면 허연의 심복 중 한 명이 자신을 기어이 죽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황궁에서 전해 들은 허연은 최대한 빨리 황궁을 제 손에 넣으려 들 것이 뻔하다.

아무리 자신을 죽여도 황궁에서 빨리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죽 쒀서 개 주는 것처럼 심창이나 다른 자들에게 황위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마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제일 위험해지는 것은 위연일 것이다.

후사가 없는 지금 황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위연이다.

그러나 진원이 살아서 황궁으로 돌아가면 황위는 위연이 아니라 진원의 차지가 된다.

허연은 위연을 구금하고 황위를 공석으로 비운 다음 진원이 환궁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좋겠지만, 허연은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고 진원을 너무 믿었다.

진원은 그 계획대로 움직여 줄 만큼 냉정한 사내가 되지 못하고, 자신은 그 수법에 당해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죽으면 형님의 여자도 죽어. 형님의 아이도 죽고.”

“어떻게 그런 짓을……!”

“내가 죽지 않으면 형님의 여자도 무사하겠지. 하지만 난 형님은 살려서 보내 줄 생각이 없어. 형님이 살아 있는 한 몇 번이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말이야. 형님이 만약 나를 풀어 주고 내 앞에서 죽는다면 형님의 여자는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겠어.”

약속.

약속을 지킬 마음은 없다.

자신의 생사와 관계없이 홍문은 황궁을 불태울 것이다.

지금쯤 이미 황궁이 불타고 있을 수도 있다.

최대한 늦추라고는 했지만 홍문이 일을 서둘러서 벌써 황궁이 불타고 그 궁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혹은 모레라도 황궁은 잿더미가 될 것이고 그 여자는 죽는다.

홍문은 절대로 그 여자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허락하고 홍문이 시작한 이상 그 여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진원은 그걸 모르니까,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여자는 살려야지. 안 그래?”

하진이 잔인하게 웃으며 진원을 노려봤다.

그 웃는 눈동자 앞에서 진원이 주먹을 쥔 채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그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며 하진이 생각했다.

착한 것은 죄라고.

제 것을 지킬 힘도 없이 그저 착하기만 한 것은 죄라고.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착해질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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