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80화 (80/108)

80.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렸다.

“저어, 폐하…….”

제게 부딪쳐 오는 입술을 밀어 내며 은호가 얼굴을 붉혔다.

“상현까지는 가셔야…….”

아직 옹주는 둘째 치고 상현까지도 가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다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면 오늘은 상현까지 가지도 못할 것이다.

황궁을 출발해서 겨우 금와까지 와서 멈추고 내일 상현으로 향한다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이다.

“여기서 하루 머물러 간다고 해서 누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느냐? 내가 황제인데?”

하진의 눈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먼저 도발한 건 너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너는 네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전부 나를 도발한다는 사실을 이제 좀 알았으면 좋겠다. 어찌 이렇게 눈치가 없어.”

“그러면 제가 벙어리처럼 있으면 되는 건가요?”

“굳이 그래야 하겠느냐?”

“제 말이, 제 눈빛이 폐하를 도발한다면 제가 차라리 눈 감고 말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할 때마다 이렇게 길이 지체된다면 그걸 어찌 하겠습니까. 바깥의 저 많은 사람들이 저 한 사람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이 마음에 편하지 않습니다.”

“신기하단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어떻게 주이염에게서 이런 딸이 나왔을까.”

“제 아버님의 흉을 보시는 겁니까?”

은호가 살며시 눈을 흘겼다.

“냉정하게 말하면 주이염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

“…….”

그 말에 은호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진을 조금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보통은

‘제 아버님은 좋은 분입니다.’

라는 대답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은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길 때 은호가 살며시 눈을 내리며 조용하게 입술을 열었다.

“좋은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 아버님이 결코 좋은 분이 아니셨다는 것을 저도 알지만, 그럴지라도 저는 아버님의 딸인지라 아버님을 나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마치 폐하께서 모두에게 좋은 분이 아니시지만 제게는 더없이 좋은 분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네 아비가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느냐?”

주은호는 모를 줄 알았다.

주이염이 그동안 무슨 일을 저질러 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도 주은호는 죽을 때까지 모를 줄 알았다.

아니,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

주이염이 저지른 짓을 은호가 안다면 아마 은호의 마음은 병들어 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책 없이 착한 여자라서 빛과 어둠의 양면 중에서 어두운 쪽은 평생 보여 주지 않으려 했었다.

어두운 면은 자신이 전부 가로막아서 좋은 쪽만 보여 주려고 했었다.

상처받지 않게 말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게 은호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주이염이 그동안 저질러 온 짓들도 은호는 모르게,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지금 황궁에는 홍문이 남아 있다.

홍문은 자신이 은호를 데리고 황궁을 비운 사이에 황궁 전체에 큰불을 낼 작정이다.

그 불과 함께 온갖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태울 작정이다.

낡고 더럽고 추잡한 것들을 전부 태우고, 그 잿더미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낫다는 홍문의 의견에 하진도 동감하고 있다.

하지만 은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원망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건 은호 평생의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은호에게는 그것을 불행한 사고로 알릴 작정이었다.

그 정도로 은호의 눈과 귀를 막고 가려서 나쁜 것은 그 눈에, 그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지금 은호는 전부 알고 있다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 자신이 저지르려 하는 짓을 안다는 것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충분히 상처거리가 될 만한 주이염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아는 것일까.

어느 정도 선까지 알고 있을까.

누가 은호에게 그런 것을 알려 줬을까.

연환궁의 후궁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은호를 상처 주기 위해서 주이염의 과거를 일부러 알려 줬을 수도 있다.

간교한 것들이니 말이다.

특히 심은송. 심창의 딸이 더욱더 간교하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기를 바라세요?”

“주은호.”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버님이나 폐하를 여전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주은호는 당돌한 성격이 아니다.

당돌함과는 거리가 멀다.

목소리는 작고 여리며 무서운 표정은 아예 짓지를 못한다.

그러나 주은호의 목소리에는, 다정한 눈동자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든지 간에 지금 제게 소중한 분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고, 다만 앞으로는 변해 갈 수 있기를 제가 옆에서 돕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은호의 손이 하진의 손등 위에 얹어졌다.

하진의 손에 비하면 그녀의 손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았다.

“저는 이 손을 좋아합니다, 폐하.”

하진의 큰 손을 은호가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고,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도 알지만, 이제는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니 더는 이 손이 피를 묻히는 손이 아니라 이제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손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자비로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

“두려움으로도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공명정대하게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그거면 되지 않느냐.”

“공명정대의 잣대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할 수는 없잖습니까.”

“잣대가 공평하지 못하다?”

“이미 만들어진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 법이 옳다 여겨졌기에 만들어졌을 겁니다. 아니면, 어쩌면 그 법들은 힘이 있는 자들이 힘이 없는 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 법과 관습들이 아직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는데 그 법들에 의해서 공명정대하게 하시면, 만약 그 법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이 공명정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은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도 단호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폐하.”

은호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기회를 찾지 못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꺼내야 할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 기회를 하진이 만들어 줬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를 찾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폐하. 오랫동안 황궁에 내려온 악법을 폐하께서 이제 없애 주십시오.”

“악법?”

“한 번 입궁한 후궁들이 황제께서 붕어하시고 난 다음에 강인사로 보내져 강인사에서 일생을 마치게 하는 법 말입니다.”

“그것이 악법이다 그것이냐?”

“일생 그곳에 갇혀 혈육도 만나지 못하고 죽어 가게 되는 것이 어찌 좋은 법이라 하겠습니까. 일생을 황궁에 갇혀 살다가 마지막에는 강인사에 갇혀 살아야 하는 삶이라면, 몇 대 전의 황제께서 순장으로 그 무덤에 후궁들을 전부 산 채로 생매장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후궁들을 왜 강인사에 가두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저는 잘 모릅니다.”

“후궁들은 귀족의 딸들이다. 딸을 황제의 후궁으로 보낼 정도의 귀족이라면 당연히 세도가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세도를 가진 친정, 그리고 황제의 여자. 거기다가 황제의 아들까지 낳았다고 하면 충분히 그 안에 욕심이 들어 있을 것이고, 그런 후궁들이 황제가 죽었다고 해서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황제의 붕어 후에 태자가 황제로 즉위한다 하더라도 선황의 후궁들은 끊임없이 그 자리를 노릴 것이 아니겠느냐. 황제의 음식에 독을 타고 황제의 갓 태어난 어린 자식을 죽이고. 그런 일이 없었을 것 같으냐? 그런 일은 수없이 황궁에서 일어났다. 오죽하면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을 넘기는 것이 축복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선황의 후궁들은 황제를 죽이고 그 어린 자식을 죽이면 자기 자식들, 그러니까 친왕들에게도 황제가 될 기회가 올 것이라 여기고 그런 짓을 무참하게 저질렀다.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강인사가 지어진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이 일절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면 새로운 법을 정하십시오.”

“새로운 법?”

“네, 폐하.”

“무슨 법 말이냐?”

“일부일처의 법을 새로 만드십시오.”

“일부……일처……?”

처음 들어 보는 말에 하진이 아연실색했다.

그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일처라니, 그런 것을 꺼낸다는 것이 다소 의외였다.

이 나라에 일부일처는 없다.

일부다처가 오래전부터 허용되어 온 나라다.

그런데 일부일처라고?

그것도 황제가?

물론 하진은 은호 외에는 어떤 여자도 제 여자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

누구도 품에 안을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부일처를 법제화시키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일처를 법제화시키면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설 것이다.

그건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짚단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짓이다.

지금 은호가 제게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이다.

가장 위험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를 지금 건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

투둑.

이상한 소리에 이루가 층계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지금 2층은 황제가 머물고 있다.

이 객잔 전체에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객잔 주위에 몇 겹으로 병사들을 경계 세웠다.

그만큼 호위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계단 아래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객잔 안에 금군의 병사들 외에 다른 자들은 없다.

황궁에서 데려온 내관과 궁녀들, 그리고 금군의 병사들이 이 객잔의 전부다.

그런데 조금 전 이상한 소리와 함께 잠깐 눈을 스친 것은 낯선 옷자락이었다.

수상한 자가 틀림없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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