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연비전은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연비는 지금 황제의 어가를 따라 옹주로 향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을 것이다.
청소를 위해서 내관들이나 가끔 드나들까.
연비의 궁녀들은 연비를 수발들기 위해 전부 함께 황궁을 나갔다.
“조용하군.”
텅 빈 연비전을 둘러보던 홍문이 이곳에 정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디다 숨겼을까…….”
홍문이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궁녀다.
견아라는 이름을 가진 궁녀. 진원의 아이를 품고 있는 여자.
그 궁녀를 연비가 어가 행렬에 데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 두고 갔다는 뜻인데, 연비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후궁에게 부탁하고 갔을 리는 없다.
원래는 심 부인 처소의 궁녀라고 했다.
심 부인 처소에서 곤혹을 치르는 것을 연비가 발견하고 데려와 어의에게 보였고…….
“연환궁 책임 상궁에게 맡겼을까?”
그럴 수도 있다.
연환궁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상궁은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궁녀다.
물론 그녀는 하진의 사람이고, 하진이 태자였을 시절부터 하진의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고는 했었다.
주은호가 처음 입궁해서 은환궁에 있을 때, 자객이 든 것처럼 꾸며 은환궁의 궁녀와 내관들을 전부 죽이고 새로운 이들로 교체할 때도 그 상궁이 도와주었었다.
황궁의 일은 내부에서 긴밀하게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름이 뭐였더라…….”
크게 마주칠 일이 없어서 책임 상궁의 이름까지 기억을 하지는 못한다.
“모르게 하는 편이 뒤탈이 없겠군.”
물론 그녀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진을 위해 홍문이 은밀히 저지른 짓에 몇 번 동참하기도 했었다.
이제 와서 서로 깨끗한 척할 일이 없다.
“참 오래된 궁인데…….”
홍문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들었다.
웅장한 금환궁, 우아한 은환궁, 그리고 화려한 연환궁.
오래된 궁궐이다.
오래된 만큼 무수한 피와 눈물이 곳곳에 스며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소리 없이 죽어 나간 후궁들과 궁녀들이 몇 명이고, 이 황궁에서 아비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식들이 몇 명이겠으며, 이 황궁에서 자식의 손에 죽임당한 황제들은 또 몇 명일까.
이곳은 매일매일이 살육의 현장이고, 매일이 소리 없는 전장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오늘 잡았던 손으로 내일 비수를 찌른다.
자식과 아비가 서로를 미워하고,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를 증오한다.
살을 섞고 있지만 머릿속은 상대를 어떻게 죽을까 고심하고, 덕담을 나누면서도 상대의 허물과 약점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우스운 것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보다 좋은 쪽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 황궁에는 그런 것이 없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백 년 전에도 일어났고, 백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오백 년 전에도 일어났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황궁의 역사도, 후궁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되풀이되고 있고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붉은 꽃을 심은 자리에는 꽃이 지고 난 후에도 다시 붉은 꽃이 피기 마련이다.
알게 모르게 뿌려진 씨가 그곳을 점령하기 때문이다.
이 황궁이 그렇다.
오랫동안 뿌려진 씨가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은 잿더미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다 태우고, 다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잿더미에 씨를 심으면 그 재를 양분 삼아 새로운 싹이 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길이 일어야 한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이.
“어릴 때부터 한 번 정도는 불장난이 하고 싶었지.”
홍문이 픽 웃었다.
어렸을 때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불장난이었다.
그러나 불장난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렸었다.
“불길이라…….”
문득 오래전의 기억이 스쳤다.
시뻘건 불길이 모든 것을 태우던 그때의 기억이 홍문을 스쳤다.
아주 오래전, 홍문에게도 가족이라는 것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이제는 전부 잊었지만, 한때는 가족과 함께 살았던 적도 있었다.
[영특한 아이인데…… 살이 껴서…… 이것 참…….]
지나가는 도사라는 인간이 그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불길한 바람은 불었었다.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몰살당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홍문이다.
일가친척이 없어서 이웃집에 맡겨졌고, 이웃집 사람은 홍문을 노비로 팔았다.
그때가 고작 일곱 살 때였다.
팔려 간 곳에서는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다.
주인집 아들이 책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글을 익혔다.
나중에는 주인 아들 몰래 그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
한 번 읽은 책은 다 외웠다.
주인 아들의 서가에 있는 책을 다 읽고 나중에는 주인의 서가에 있는 책까지 몰래 읽었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들켜서 죽도록 맞은 적도 있었다.
어린 도둑을 집 안에서 키웠다며 주인은 홍문의 손목을 자르려고 했었다.
노비 주제에 책을 읽었다는 죄로 손목이 잘리게 되었다.
처벌을 받기 전날 밤, 홍문은 집에 불을 질렀다.
손목을 잘리기 싫어서 집에 불을 질렀다.
한밤중에 일어난 불길은 모든 것을 태웠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사람은 죽지 않았지만 집은 전부 타 버렸다.
집을 태운 노비를 주인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 때려 죽여도 항변할 수가 없었다.
집과 가산을 전부 잃은 주인은 당연히 홍문을 때려죽이려고 했다.
무자비한 몽둥이세례를 받으며 홍문은 그곳에서 제가 죽는 줄 알았다.
머리통이 깨지고 어깨뼈가 부서지고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손가락은 마디마디 뼈가 조각났다.
그렇게 맞아 죽는 줄 알았다.
책 한 권 제대로 못 보는 노비로 사느니 차라리 맞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몽둥이질을 멈추게 만든 것은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소년이었다.
홍문보다 고작해야 서너 살 많은, 그런 소년이었다.
열 살의 홍문보다 고작해야 서너 살이 많이 보이던 열서너 살의 소년.
그러나 눈매는 당당하고 어깨는 오만하며 세상에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은 홍문 자신과는 사뭇 달랐었다.
[어린것이 눈매가 독하구나.]
저는 더 독한 눈매를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눈매를 평가하던 그 소년이 바로 하진이다.
[너는 사람도 죽일 수 있느냐?]
초면에 그런 것을 묻는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죽이라 하면 죽일 수 있느냐?]
사나운 눈매에 눈동자 가득한 독기.
[내가 세상을 전부 태우라고 하면 왜, 라고 묻지 않고 전부 태울 수 있느냐?]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세상을 전부 태워 버릴 것처럼 보이던 소년.
[나는 나와 함께 썩은 시궁창에 떨어져 줄 친구가 필요한데, 그럴 수 있겠느냐?]
보통은 사람을 꼬실 때,
‘나와 함께 위로 올라가겠느냐.’
라든가
‘나와 함께 세상을 정복하자.’
라든가,
‘나와 함께 가장 높은 자라에 올라가자.’
이런 말로 꼬셔야 하는데 하진은
‘함께 시궁창으로 떨어지자.’
고 꼬셨다.
방법이 아주 틀렸었다.
그런데 그 틀린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함께 시궁창으로 떨어지자는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하진과 함께 한 십수 년은 말 그대로 시궁창이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고, 온갖 추악하고 비겁한 일을 서슴지 않고 했다.
나쁜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도 죽였다.
힘을 가진 자만 죽인 것이 아니라 힘없고 불쌍한 자도 죽였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이득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만 따졌다.
방법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어린 시절에 하진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
고 했다면,
‘바른 길을 가자.’
고 했다면 그 손을 절대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옳은 세상, 정의로운 세상, 바른 세상,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독한 자가 살아남아도 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한 것은 주관적인 기준으로 결정된다.
누군가의 선이 누군가의 악이고, 누군가의 옳음이 누군가의 그름이다.
그것을 누가 결정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홍문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혐오한다.
홍문이 주이염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사내에게는 선악이 없기 때문이다.
선악을 따지지 않고 철저하게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아온 주이염이라는 사내를 좋아한다.
주은호의 아버지인 주이염을 홍문은 인간적으로는 존경한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서 그에게 약을 지어 준 까닭도 그런 것이다.
가식적이지 않은 인간이다, 주이염은.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위해서 손을 더럽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다.
모순되게도 그런 사내에게서 주은호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이 우습지만, 주은호는 주은호, 주이염은 주이염이다.
주은호가 만들고 싶어 하는 황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문 자신이 만들고 싶은 황궁도 있다.
주은호와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
뜻도 다르다.
결정적으로 하진은 자신의 뜻을 지지한다.
주은호가 아니라 자신을.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인다.
하진이 황궁을 비운 사이에, 이곳을 전부 불태워 버릴 것이다.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그건, 거대한 불장난이 될 것이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