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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77화 (77/108)

77.

“그것들이 얼마나 무시를 해 대는지 모릅니다.”

밖에서 돌아온 궁녀가 은송의 발 아래에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지난번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은송은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은송이 황제에게 노골적인 질타를 들은 후에 충격을 받아 몸져누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은송은 몸져눕지도, 그렇다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다.

어차피 황제는 은송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

단둘이서 몸을 섞기를 했나 오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 은송에게 있어서 황제는 낯선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

황제와 자신은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존재다.

그건 이 연환궁의 후궁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낯선 타인.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 한자리에 모였을 뿐 이곳에 서로를 잘 아는 이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연환궁은 황궁 안에서 격리된 공간이다.

보통은 격리된 자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며 친밀해지기 마련이지만 이 연환궁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서로 잡아먹을까 그 생각만 하는 이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이곳이다.

은송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왜 미워해야 하는지, 왜 물어뜯어야 하는지, 왜 죽여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그냥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죽이고 물어뜯고 끌어내리려고 했다.

자신이 올라설 자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 연환궁에 있는 모두가 아마 그런 생각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잔뜩 품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모두가 그저 이리와 승냥이 떼로만 보일 뿐이다.

당연한 것이고, 또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송은 그 생각을 버렸다.

은송은 머리가 똑똑하다.

똑똑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상황 판단이 빠르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는 태세 전환도 빠르다는 뜻이다.

될 것 같으면 목숨을 걸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되게 하려고 애를 쓰겠지만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것을 어떻게 되게 해 보겠다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시간 낭비에 노력 낭비다.

한마디로 헛짓거리다.

은송은 황제의 사랑받는 후궁이 된다든지, 아니면 황후가 된다든지 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연비가 있는 이상은 어림도 없다.

황궁에는 사랑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만약 제 눈으로 본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건 광기다.

사랑이나 광기나 종이 한 장 차이라면, 어차피 그것이 그것.

저 연비에게서 황제를 빼앗을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연비가 아닌 후궁에게 황제가 눈길이나 줄까?

황제의 승은까지도 아니고, 황제와 대면하여 마주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부지런히 몸단장을 하며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 여기는 후궁들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들이다.

왜 그걸 모를까.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연비의 말이 맞다.

이대로 있다가는 황제의 눈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연환궁에 처박혀 존재감 없는 귀신처럼 늙어 가다가 훗날에 황제가 죽게 되면 강인사로 쫓겨나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 뻔하다.

젊어서는 연환궁을 무덤으로 삼고, 늙어서는 강인사를 무덤으로 삼아 살아 있지만 시체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연환궁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이미 정해진 운명이다.

연비만 살아남겠지.

황후가 되어 연비는 이곳을 떠나 은환궁의 주인이 될 것이고 최후에도 연비와 그녀가 낳은 아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부인께서 그리 무시를 받으시는데…… 정말 분이 터지고 원통해서…… 부인께서는 심 대인의 따님이신데 그것들이 함부로 굴다니, 억울하고 또 억울합니다.”

억울할 것도 참 많다.

그런 것도 참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황궁 안에서 궁녀 생활을 어찌했는지 모를 일이다.

은송은 지금 제게 눈물로 참소하는 이 궁녀의 머릿속을 뻔히 꿰뚫고 있다.

정말 억울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궁녀들에게 있어서

‘힘’

이라는 것은 제가 모시고 있는 후궁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후궁을 부추겨서 싸움을 붙이고, 그 싸움에서 이기게 해야 궁녀들도 머리를 들고 다니는 법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자신의 성질을 긁을 말을 해서 싸움을 붙이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웃기는 거지.’

그런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지금 은송의 머릿속에는 이 황궁을 벗어날 생각뿐이다.

이곳에 들어온 것은 황후가 되기 위해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쥐고 휘두르기 위해서 심창의 양녀가 되었고 입궁을 했다.

강인사에서 늙어 죽어 가는 생귀신이 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곳을 벗어날 궁리를 해야 한다.

자신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심창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닌 연비다.

연비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럴 수 있는 마음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후궁들과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라 연비와 어떤 식으로 손을 잡아 이 황궁에서 나갈 것인가 그것을 궁리할 때다.

‘나갈 거야. 이런 곳 따위, 누가 있을 줄 알고.’

물론 심창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연비의 힘이 필요하다.

‘사람이 좋긴 하지…….’

연비의 심성이 좋다는 것은 은송도 인정한다.

보기 드물게 착한 여자다.

처음에는 그 착한 것이 바보처럼 보일 정도였다.

바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아니면 너무 순진하게 자란 아가씨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고정관념은 지난번에 깨졌다.

바보도 아니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순진하게 자란 아가씨도 아니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고,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고, 제 손에 쥔 힘이 어떤 것인지도 충분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휘둘러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여자다.

그러면서도 그 손에 쥔 것을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쓰지 않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만약 연비가 쥐고 있는 그 힘이 자신의 손에 쥐어졌다면, 은송은 주저 없이 후궁의 모든 여자들의 목을 쳤을 것이다.

가차 없이 잔인하게.

그러나 연비는 그러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고 있다.

승자의 아량을 넉넉하게 베풀고 있고 그것을 손에 쥐는 자는 아마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유를 얻을 것이고 멍청한 것들은 이 연환궁에 갇혀서 언제 찾아올지, 평생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바라며 늙어 갈 것이다.

‘연비가 언제쯤 돌아오려나…….’

지금 연비는 황제와 함께 옹주로 갔다.

옹주에서 언제 돌아올지는 아직 모른다.

연비가 옹주에서 돌아오면 연비전으로 먼저 찾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웃어 주자.

자신이 절대 그녀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녀를 언제든지 도울 마음이 있다고 말하자.

그리고 그녀의 힘을 빌려 이 빌어먹을 황궁에서 나가자.

심창 따위, 황제 따위, 그런 것 따위 그냥 개나 주워 먹으라고 하고 자신은 여기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황궁과 화려함과 후궁과 권세에 대해 자신에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얼굴을 발로 걷어차 버릴 것이다.

시원하게 말이다.

‘장사나 해 볼걸…….’

친부의 뒤를 이어 장사꾼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엄청나게 큰 장사꾼이 되어 돈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차선의 방법이다.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권세 있는 자에게는 못 당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속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다 무상하다는 것을 안다.

머리 좀 숙이고 살아도 자유롭게 사는 쪽이 낫다.

‘그런데 그 궁녀는 어떻게 되었지?’

문득 그 임신한 궁녀를 은송이 떠올렸다.

아직 그 궁녀의 뱃속의 아이 아비가 누군지 모른다.

연비가 데려갔다고만 들었다.

그 아이의 아비는 누구일까.

황제? 가능성은 낮다.

아주 낮다 못해 희박하다.

황궁의 무사들? 그럴 수도 있다.

‘연비의 성격이라면 몰래 그 아비 되는 무사와 짝을 지어 황궁에서 내보내 줄지도 모르겠군. 이미 내보내 줬다던가…….’

“그만 징징 짜고 나가 보아라.”

제 발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는 척하고 있는 궁녀에게 은송이 눈매를 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우는 척하던 궁녀가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물러났다.

“징징거리는 것들이 제일 싫어.”

침상에서 일어난 은송이 기지개를 폈다.

창밖을 내다봐도 어제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연환궁의 풍경은 변하는 것이 없다.

마치 고인 물과 같다.

앞으로 시간이 일 년,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이곳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고인 물일 것이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일어나는 사건도 없고, 가슴 두근거릴 일도 없고.

이곳에 살면 그렇게 무감각한 돌이 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응?”

은송의 눈이 조금 낯선 것을 발견했다.

연환궁은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바로 눈에 띈다.

지금처럼 말이다.

지금 은송의 눈이 발견한 것은

‘낯설면서도 새로운 것’

이었다.

“뭐야. 저 못생긴 건.”

은송이 입술을 비틀었다.

‘저 못생긴 것’

이란 다름 아닌 홍문이었다.

“못생긴 데다 키도 작잖아.”

저런 볼품없는 사내가 왜 연환궁을 얼쩡거리는 것일까.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무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궁의 관리도 아니고 내관도 아니다.

평상복을 입었는데 연환궁에 들어왔다?

수상하기 짝이 없다.

어느 후궁의 숨겨 놓은 내연의 사내, 이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러기에는 너무 못생겼다.

“눈을 버리겠군.”

빨리 아름다운 것을 봐서 저 못생긴 얼굴로 더러워진 눈을 정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저기는…….”

저 볼품없는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들어간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연비전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였다.

저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어지는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연비전.

지금 연비전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텅 빈 연비전에 가는 것일까?

‘도둑이라고 여기기엔…… 황궁에 도둑이라니. 그럴 리가 없고.’

무척이나 수상하다고 여기며 은송이 목을 길게 뺐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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