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황제의 옹주 시찰이 결정되면서 금환궁이 바빠졌다.
황제가 황궁 밖으로 행차하게 되면 준비해야 할 것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금위군은 금위군대로, 금환궁의 내관들은 내관들대로 분주해졌다.
하루 이틀 걸리는 여정도 아니고 짧으면 이레, 길면 열흘도 걸리는 길이다.
황제가 이번 시찰을 이레로 정하긴 했지만 사람의 길은 모르는 법이다.
황제가 시찰을 갈 때는 작은 황궁이 움직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황제의 먹고, 입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황궁에서 준비한다.
옹주까지 가는 길도 그렇지만 옹주에 도착해서도 황제는 황궁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은 사용하지 않고, 외부에서 준비한 음식과 술에 손대지 않는다.
하다못해 물까지 황궁에서 길어 간다.
지금의 황제가 유독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황궁의 오래된 전통이다.
황제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황궁 안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황궁 안에서 황제가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기미 상궁이 그 음식을 먼저 기미하는 것이다.
황궁 밖으로 나가면 위험도는 더 올라가게 된다.
물, 술,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의복에 독을 묻혀 황제를 독살하려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독을 섞은 초를 태워 황제의 목숨을 노린 적도 있었다.
황제는 황궁을 나서는 순간 완벽하게 노출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으로 선대의 황제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황궁을 나선 적이 없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이지만 정작 암살당할 것이 두려워서 이 황궁을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
그리고 황제가 친정을 위해 옹주로 갔을 때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어김없이 있었고, 결국 죽은 것은 황제가 아니라 왕자 진원이었다.
만약 진원이 그 독이 든 술잔을 대신 받지 않았다면 죽은 것은 진원이 아니라 선황이었을 것이다.
“이 화려한 궁에 갇혀 사는 거지. 일생을.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 같은 곳에서 말이다.”
하진이 위연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술 한잔을 하자고 그를 부른다는 황명을 받든 태감에게 이끌려 금환궁으로 온 위연이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선택을 하는 거다. 황제라는 강력한 힘을 가지는 대신에 일생을 이 황궁에 갇힌 채로 살아갈지, 아니면 힘을 포기하고 새장 밖에서 일생을 두려워하며 살아갈지.”
“한 잔 더 올리겠습니다.”
위연이 하진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견아라는 궁녀를 먼저 숨겨 준 것이 너라고?”
“벌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폐하. 저는 그것이 잘못한 일이라는 생각은…… 어쨌든 진원 형님의 핏줄이니…….”
“황궁에서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 아직도 너는 황궁 무서운 것을 모르는구나. 애라서 그런 건가 보다.”
“형님, 저는 어리지…….”
“쓸데없이 정이 많은 것을 보면 어리지. 아직 어리지. 그러니 사리 분간도 못 하고 핏줄이라는 이유로 덜컥 온정이나 베풀고 그런 것이지.”
하진의 눈에 비치는 위연은 그저 어린애다.
뭐가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고, 제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그런 어린애다.
만약 위연이 조금만 더 영악했더라면 선황의 시절에 제 편을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황의 눈 밖에 난 태자의 편을 들었다가 언제 제 목숨까지 같이 달아날지 모르는데, 영악한 자라면 절대 자신의 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진원의 편에 있었겠지.
그런데 또 자신의 편이라고 하기에는 진원과도, 다른 왕자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던 것이 위연이다.
착한 것이다.
그런데, 착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진원도 그랬다.
진원은 위연보다 더 착했다.
하진이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착한 것은 살아남지 못한다.
지켜 줄 힘이 없으면 착한 것은 살아남지 못한다.
착한 자들은 모질지 못해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그런 착한 자들은 누군가 지켜 줘야만 하는데, 그 지켜 주는 힘을 갖지 못하면 착한 자들은 짓밟히기 마련이다.
제 모친이 그러했고, 진원이 그랬고, 위연도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착한 모친은 죽었다.
착한 진원 역시도 죽었다.
자신이 지켜 주지 않았으면 위연도 죽었을 것이다.
하진은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지킬 힘이 없다면 착한 것은, 무가치하다.
그것을 아직까지도 위연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착한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착한 것이 선한 것도 아니다.
착하면서도 약하다면 그건 차라리 죄다.
악보다 더한 죄다.
은호 역시도 착하다.
하지만 은호의 착함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은호를 지켜 주는 절대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완벽하게 들어맞아야 하는 한 쌍이다.
착한 것과 강한 힘.
“너도 가자, 옹주에.”
“하지만 폐하. 저는…….”
“어차피 여기서 할 일도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옹주에 가 본 적이 있느냐?”
“폐하. 저는 도성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날개는, 펼 수 있을 때 펴야 하는 법이다.”
하진이 술병을 거두었다.
위연과 자신은 다르다.
태생부터 다르다.
만약 자신이 황후의 몸이 아니라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태자가 아니었다면 운명은 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죽은 것은 자신이고 지금 황제가 되어 있는 것은 진원일까.
진원은 장자였지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화비의 평생의 한이 그것이었다는 것을 하진은 안다.
장자인 아들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지 못한 것.
부황의 평생의 두려움이 자신이 태자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부황은 자신을 태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진원을 태자로 삼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외척도 없고 지켜 줄 모후도 없었다.
혈혈단신으로 내던져진 자신은 부황에게 있어서 견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원은 달랐다.
진원에게는 화비가 있었고 허연이 있었다.
막강한 외척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진원은 장자이지만 태자가 되지 못했고 자신이 태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기가 막한 결과이지만, 모친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지켜 준 것이다.
만약 모친이 죽지 않았다면 외가의 세력이 약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외가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부황은 자신을 절대로 태자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친의 죽음이 자신을 태자로 만들었고,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서서 지금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피를 먹고 올라가는 자리다.
황제가 앉는 옥좌 아래에는 무수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도 붉은 땅 위에서, 시체의 산 위에서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와 눈빛을 받으며.
결국 힘이 독이 되고, 독이 힘이 되는 이 모순된 작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황제라면 위연은 아직 활짝 펼칠 날개가 있다.
가장 좋은 위치가 위연일 것이다.
욕심도 없고, 욕심을 현실로 만들어 낼 힘도 없다.
가볍다.
날개가 가벼워야 새는 날 수 있다.
날개가 무거운 새는 날지 못한다.
자신의 날개는 이미 무거워졌다.
피에 젖어 무거워진 날개는 퍼덕이며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없다.
“옹주로 갈 준비를 하거라. 진원의 자식 이야기는 다녀와서, 아니, 옹주에 가서 마저 하자.”
“알겠습니다, 폐하.”
위연이 제가 따라 준 술잔의 술을 전부 마시는 것을 보며 하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옹주에 다녀오면 더는 진원의 자식이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다 정돈되어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원망은 듣겠지만, 원망은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은 스쳐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원망도 그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다.
*
옹주로 향하는 황제의 어가가 황궁을 나온 것은 이틀 뒤의 오전이었다.
유독 날이 화창해서 어가의 행렬은 멀리서도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줄은 마치 황궁 전체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40마리의 말들이 끄는 마차, 그리고 어가의 앞과 뒤를 호위하는 금군의 병사들.
그 어가의 가장 앞에서 행진하는 깃발 든 기수들.
웅장하고 화려한 어가가 지나갈 때마다 백성들은 머리를 조아려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탄 마차의 바로 곁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무장 이루가 경계를 섰고 마차의 뒤로는 금환궁의 궁녀들과 연비전의 궁녀들이 뒤따랐다.
그 어가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황제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책사 홍문이었다.
아무도 홍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 두 사람, 하진과 이루를 빼고는.
*
“자…… 이제 모두 떠났고…….”
어가가 떠나고 시간이 꽤 흐르자 홍문이 기지개를 펴며 금환궁의 뜰로 나섰다.
정확히는 현무전의 뜰이었다.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 황제가 궁을 비우는 사이에 자유롭게 현무전을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손에 넣은 홍문이다.
현무전뿐만 아니라 금환궁, 은환궁, 연환궁을 비롯해서 황궁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손에 넣었다.
벼슬이 없지만 황제가 임시로 친권을 맡겨 놓았기 때문에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홍문은 황제의 대행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중요한 일은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말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홍문이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날이 아주 좋다.
비극적인 일은 원래 이렇게 화창한 날에 일어나는 법이다.
“연환궁이 조금 시끄럽겠군. 연비가 없어졌으니.”
원래 절대 강자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시끄러운 법이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연환궁의 절대 강자는 연비였다.
그러나 이제 연비가 황제와 함께 옹주로 갔으니 남아 있는 후궁들이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중에서 심 부인 은송이 가장 우세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심 부인이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질타를 들으며 그 위세가 꺾인 까닭이다.
“연환궁 자리에 무엇을 만들면 좋을까…….”
휘파람을 불며 홍문이 천천히 현무전의 뜰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