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꼭 이럴 때만 제가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홍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제가, 폐하께, 그렇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을 때는 지나가는 개소리로 들으시더니, 지금은, 제게, 좋은 수가, 없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퍽이나 기분 좋게, 물론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씀을 드릴 것 같습니까?”
일부러 딱딱 끊어서 말하는 것은 지금 기분이 최고로 좋지 않다는 뜻이다.
홍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여려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섞인 탓이다.
첫 번째는 하진이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황궁 안의 내관, 궁녀, 후궁들까지 전부 죽이려고 한 것.
두 번째는 자신이 뒤늦게 알고 달려갔을 때 이루를 내세워서 자신을 막은 것.
실은 이 두 번째가 더 불만이다.
이루가 자신을 막아섰다는 것이 열을 받게 만들었고 주은호는 들어가는데 자신은 못 들어갔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해 있는데 하진이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좋은 수가 없겠냐는 것이다.
좋은 수가 있어도 순순히 말해 줄 기분이 아니다.
“좋은 수는 많지만, 좋은 수가 나올 기분은 아니라서, 이것도 기분을 타는 것이라 일 년 정도 후에 좋은 수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 그때는 이미 좋은 수보다 진원 왕자의 자식이 먼저 나왔겠군요. 안타까워라.”
일부로 들으라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역시 기분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다.
“그만해라.”
결국 이루가 한 소리를 했지만 홍문은 이루에게도 지금 불만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하진과 이루가 사이좋게 쌍으로 홍문을 물 먹인 것이다.
“그만하라고? 그래, 그만하지. 이참에 아예 사직 상소도 내고, 아. 난 정식 관원이 아니라서 사직 상소도 필요 없구나. 괜히 서럽네. 누군 녹봉이라도 받는데 녹봉도 받지 않고 공짜로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아주 어떻게 그렇게 안면을 싹 바꿔서. 잘됐네. 승상 어르신 내려가신 곳에 나도 내려가서 승상 어르신 병세도 좀 봐 드리고 승상 어르신과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고 그렇게 말벗이나 하면서 한 사오 년 정도 지내다 와야지.”
“그렇게 서운했던 것이냐?”
홍문의 불만을 묵묵히 듣고 있던 하진이 한마디 던졌다.
“그러면, 입장 바꿔서 폐하께서 제 입장이라면 안 서운하시겠습니까? 솔직히 폐하도 서운하시지 않습니까. 연비마마께서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고 진원 왕자의 아이를 가진 궁녀를 숨겨 두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서운하셨잖습니까.”
“나는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이었을 뿐이지.”
퍽이나.
홍문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심창과 허연에게 누명을 씌워 이번에 숙청해 버릴까.”
“허허허허허허.”
하진의 말에 홍문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댔다.
한참을 웃던 홍문이 웃음을 뚝 그치고 하진을 쳐다봤다.
“죽이려면 진즉에 죽였을 겁니다. 화비를 죽일 때 굳이 허연을 살려 둔 것과, 심창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궁에 세력을 더 불릴 수 있게 내버려 둔 것은 그래야 제대로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죽여요? 숙청이요? 그럴 거라면 지금까지 제가 뭐 하러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이편 들어주고 저편 들어주고, 여기 조율해 주고 저기 조율해 주고 그랬겠습니까. 황궁에 폐하의 편만 가득 차면 일이 엄청나게 잘될 것 같으십니까? 천만의 말씀이라고 제가 귀에 딱지가 앉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는 흘려들으시고 지금 와서 딴소리를 하시면 저는 졸지에 불쌍한 인간 되는 겁니다. 그동안 혼자서 떠들어 댄 거니까요.”
“방법이 없으니 하는 말이지.”
“방법이 없긴 왜 없습니까?”
“그러면 너는 어떤 방법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홍문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 주자니 아직 기분이 덜 풀렸고 말해 주지 않자니 또 답답한 소리를 할 것 같다.
“실은 제가 조용하게 처리를 하려 했습니다.”
“조용하게는 아니지.”
옆에 있던 이루가 슬쩍 말을 얹었다.
이루는 홍문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홍문이 연환궁에 불을 질러서 후궁들과 함께 진원의 아이를 가진 궁녀까지 한 번에 처리하려고 했다는 것을 이루도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하진이 하려고 했던 것이나 홍문이 하려고 했던 것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홍문은 화재라는 사고를 빙자해서 일을 처리하려 했던 것이고 하진은 대놓고 모두 죽이는 방향을 택한 것뿐이다.
홍문이 화가 난 것은 그것이었다.
다 죽여도 좋다.
궁녀든 내관이든 후궁이든 다 죽여도 좋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죽이면 곤란하다.
죽여도 당위성을 가지고 죽여야 하고, 죽여도 사고를 위장해서 죽여야 한다.
폭군과 성군의 차이는 그것이다.
역대기에 폭군으로 기록된 황제들과 성군, 혹은 현군으로 기록된 황제들의 차이는 별것 아니다.
드러내 놓고 죽였느냐 뒤에서 몰래 죽였느냐 그 차이다.
“조용하게 하려고 했으니까 너는 입 좀 닥치고 있어 주겠어?”
홍문이 이루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겁을 먹을 이루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연비마마께서 아셨으니 조용하게는 틀린 것 같습니다. 연비마마께서 은근히 고집이 있으셔서, 주로 이상한 쪽으로 고집이 있으셔서 말입니다.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고 사람이 착하기만 하면 주위 사람들이 고생하는 법인데 연비마마께서는 주위 사람들을 고생시키실 분이시라. 게다가 지금은 홑몸도 아니시고,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고집은 은근히 세신데 또 마음은 약해서 마음으로 충격을 받으면 그게 몸으로 그 여파가 오시는 분이라서 만약 견아라는 그 궁녀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시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태중의 용종의 안위도 보장할 수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연비 마마께서 출산을 하실 때까지 그 견아라는 궁녀를 폐하께서 직접 격리시키고 감시하는 방법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하고 견아라는 궁녀나 그 태중의 아이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게 한다는 조건으로 출산과 그 이후를 보장해 주겠다고 회유를 하는 방법입니다. 일단 연비마마께서 출산을 하시는 것이 중요하니 말입니다. 연비마마께서 왕자 아기씨를 낳으시면 그때는 견아라는 궁녀가 진원 왕자의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두 번째 방법은?”
“죽여서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은호가 싫어하겠군.”
“사고로 위장하면 됩니다. 불운한 사고 말입니다. 사고까지 폐하께서 막아 줄 수는 없으니까요.”
“너는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낫다고 생각하느냐.”
“제게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불운한 사고 쪽입니다. 확실하고 깔끔하니까요. 무엇보다 뒤탈이 없으니 말입니다.”
“은호의 의심을 사지 않고 가능하겠느냐? 일단은 은호가 그 궁녀를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서 그것도 문제다.”
“맡겨 주시면 제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단,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제게만 맡겨 주시면 말입니다.”
“실패하면?”
“목을 내놓겠습니다.”
“그 목을 어디에 쓰라고.”
“벽에 장식하십시오.”
“그 얼굴을 매일 보라는 것이냐?”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홍문의 얼굴이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원래 이런 식의 모사와 술수는 홍문의 주특기다.
“그리고 폐하. 옹주 시찰을 언제쯤으로 잡으면 좋을지 날짜를 확정해 주셔야 합니다.”
진원 왕자의 자식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이제 슬슬 본격적인 일을 홍문이 끄집어냈다.
새 황제가 등극했으니 옹주나 파사, 동창 같은 주 관문 역할을 하는 성으로 직접 시찰을 가는 것이 전통이다.
즉위 초기에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움직임이 주를 이룬다면, 그 이후에는 외부의 세력들을 안으로 뭉치게 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것이 황제의 시찰이다.
일명 지방순시라고 불리는 그것을 통해서 황제는 각 지방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시찰을 간 성에서 백성들을 위한 은덕을 베풀어 황제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다.
“옹주는 지난번에 큰일을 치렀으니 순시의 첫 번째 순서가 되어야 할 겁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국사가 비어 있는 날로 정하면 되겠지.”
“순시에 연비마마를 모시고 가셔야 합니다.”
“은호를?”
뜻밖의 말에 하진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하진은 은호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갈 생각이 없다.
가장 안전한 곳은 황궁이다.
이곳에 있으면 자신이 그녀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황궁 밖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런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번에는 꼭 모시고 가셔야 합니다.”
홍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은호를 옹주로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하진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은호가 해를 입으면 그땐 후회해도 되돌릴 길이 없다.
그런 위험한 수를 두고 싶지는 않다.
“나 혼자 가겠다.”
“폐하.”
“이번만큼은 옹주가 황궁보다는 안전할 것입니다.”
홍문의 낮은 목소리에는 섬뜩함이 묻어났다.
옹주가 황궁보다 안전하다.
그 말이 갖는 의미를 하진이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니 연비마마를 모시고 가셔야 합니다. 마마께서도 오랜만에 황궁에서 나가셔서 옹주의 바람이라도 쐬시면 기분도 좋아지실 것이고…… 겸사겸사 다 좋지 않겠습니까?”
꿍꿍이를 담은 미소를 짓고 자꾸만 은호를 데리고 가라는 홍문을 보며 하진이 마침내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홍문의 말을 들어서 실패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홍문은 알아서 완벽한 계획을 꾸몄을 것이다.
그러라고 옆에 둔 것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홍문을 곁에 뒀다.
지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