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런 것이냐?”
하진의 눈매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은호는 하진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진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물론 은호가 그것을 이용하거나 했던 적은 없다.
자신에게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적도 없다.
다만 화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을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게 사랑해 주어서 과분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결코 자신에게 화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 하진의 표정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진원 형님의 아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잘 모릅니다.”
“알 리가 없겠지. 그저 불쌍한 아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네가 어찌 알겠어.”
“폐하.”
“황위가 어떻게 계승되는지 알고 있느냐?”
“네?”
“지금 내가 죽으면 황위는 누구에게 계승될까?”
“위연 전하가 아니십니까?”
“틀렸다.”
하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차가웠다.
“황위는 황제의 형제가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랫대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황제의 자식. 그러나 내게는 자식이 없으니 내 경우에는 조카가 이어받겠지. 그리고 지금 내게는 조카가 없다. 앞으로 태어날 예정인 조카를 제외하고는.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폐하.”
은호가 하진의 노여움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했다.
자신은 진원 왕자와 그의 혈육, 그리고 생명을 품은 한 여인을 인간적으로 외면할 수 없어서 구하려고 했지만 하진에게는 그것이 어떤 식의 위협인지 바로 이해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만약 하진에게 변고가 생겨 옥좌가 비게 되면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는 무섭게 일어날 것이다.
진원 왕자의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핏덩이가 계승 일 순위가 될 것이고, 은호 자신이 낳는 아이는 계승 이 순위가 된다.
만약 하진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당연히 계승 순위에 가장 가깝겠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하진이 죽으면, 그리고 견아가 먼저 아이를 낳고 자신이 늦게 출산을 하면 황위는 견아가 낳은 진원의 아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 하진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진원 형님이 후사를 남기고 죽었다는 것을 만약 좌복야 허연이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겠느냐.”
하진은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그 화를 전부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지금 당장 진원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그 궁녀를 칼로 베어 버리고 싶을 충동을 느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면 은호가 무서워할 것을 알기에 다만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본성대로 나갔다가는 은호는 절대 자신을 다시 보려 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만큼 자신의 본성은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허연은 내 자식이 절대로 태어나지 못하게 할 거다.”
하진을 진짜 화나게 만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뒤를 누가 계승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어이 은호를 해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허연이 자신을 노리지 못할 것은 알고 있다.
허연이 아니라 심창이라 해도, 그 외에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을 직접 노리지 못할 것은 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호를 노릴 이유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불씨는 거의 꺼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화비가 죽고, 진원이 죽으면서 불씨는 꺼졌다.
아니, 꺼졌다고 다들 믿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진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는 아직 재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진원의 유복자라는 이름의 불씨가 말이다.
허연이나 심창은 자신이 주은호 외에는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신이 자식을 보게 되면 그건 주은호의 배를 빌려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진원의 자식이 태어나게 되면, 아니 태어날 예정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은 주은호다.
주은호만 죽으면 하진이 자식을 낳을 가망성이 희미해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진원의 유복자가 후계가 된다.
지금 살아 있는 다른 친왕들에게는 자식이 없다.
우습게도 유독 의심이 많았던 선황이 제 자식들에게 약을 먹여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위연도 그중의 한 명이다.
물론 공공연하게 약을 먹인 것은 아니다.
신년 하례회에서 자식들에게 황은으로 약을 내렸고 그 약 안에는 사내의 생식을 막는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내린 것이라면 물 한 그릇도 마시기 싫었던 하진과 유난히 의심이 많았던 화비로 인해서 진원 왕자만이 그 화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물론 왕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하진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때 그 독을 만들었던 어의의 자백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연도 그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라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진에게는 조카들이 없다.
앞으로도 조카들은 태어날 일이 없다.
굳이 조카들이 태어난다면 그건 배다른 누이들의 몸에서 태어나는 조카들밖에 없고 그 아이들은 계승의 자격이 없다.
결국에는 진원의 씨와 자신의 씨, 그들만이 자격을 가질 수 있고, 지금 진원의 씨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은호가 화를 입게 된다.
그것이 하진을 노하게 만든 이유였다.
주은호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하진에게 있어서는 자비를 베풀 수가 없는 대상이다.
그게 진원의 여자라고 해도, 진원의 태어나지 않은 유복자라고 해도 그것을 용납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선택을 해야 하는데,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진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은호에게 물었다.
은호의 눈빛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성품이 선하기 때문이다.
[착한 것이 아니라, 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사람이라는 것은 잊고 싶지 않아서 그런단다.]
그런 것을 가리켜 착하다 한다는 것을 이 여인은 모르는 것일까.
그런 것이 착한 것이다.
끝까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러나 가끔 하진은 일부러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려 할 때가 있다.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사나운 짐승이 되어 짐승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다.
진원의 유복자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 화근의 씨를 죽여 버려야 할 때다.
“심창과 허연을 비롯한 진원과 관계된 모든 이들을 죽이는 것과, 아니면 진원의 태어나지 않은 유복자 한 명을 죽이는 것. 너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폐하.”
둘 다 끔찍하고 무서운 짓이다.
은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하진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당혹해하는지 충분히 느꼈다.
이런 일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은호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이런 끔찍한 일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게 됐다.
이 황궁과 자신의 실체를 말이다.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이제 은호는 알게 될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가, 그녀가 몸을 섞는 사내가 실은 괴물 중의 괴물이고, 가장 잔인한 귀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걸 알게 되면 은호는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처음 은호를 만났을 때 은호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하진은 기억하고 있다.
추하고 더러운 짐승을 쳐다보듯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봤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귀신을 대하듯이 자신 앞에서 그렇게 떨었던 그녀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떨지도 않고 이제는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다시 겁을 주고 떨게 만든다면, 그녀는 다시 자신에게 웃어 줄까.
예전처럼 무섭지 않다고 말해 줄까.
“여자를 죽이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다. 여자의 배를 가르고 아이만 꺼내던가, 아니면 유산시키는 약을 먹여서 아이만 지우겠다고 말이다.”
“폐하. 제발…… 다른 길은 없습니까? 황궁 밖으로 내보내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게 하면…….”
“세상에 비밀은 없다.”
“폐하. 그 아이가 진원 왕자의 아이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그 궁녀가 아이의 아비가 진원 왕자라고 했을 뿐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정말, 증거가 없을까?”
하진의 눈매는 서늘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서늘했다.
“황궁에서 오래 산 궁녀들을 너무 얕잡아 보는구나. 정말 증거가 없을까. 진원이 제 여자에게 증표 하나를 주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전투에 나가면서.”
하진의 목소리가 은호의 귀를 울렸다.
“옹주의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면서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원이 제 여자에게 증표 하나 남기지 않고 갔을 리는 없다.”
“제가 이해시키겠습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람은 말이다, 원치 않아도 부는 법이고 힘없는 갈대야말로 그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넘어지는 법이지. 그리고 그 여자는 갈대다. 힘이 없어서 바람이 부는 대로 휘청거리는 갈대. 그런 여자에게 내 여자의 목숨을, 안위를 맡기라는 거냐?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하진의 목소리는 단호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들어주지 않을 것을 은호도 깨달았다.
아무리 간청을 해도 이번만큼은 하진이 자신의 부탁을, 간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재앙의 불씨는, 끌 수 있을 때 꺼야 하는 거다. 전부를 태우기 전에.”
은호가 제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하진은 이러는 것이다.
그러나 견아와 그녀의 아이는, 누가 지켜 주겠는가.
누가.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