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위연 전하께서 네 걱정을 많이 하시더구나.”
“네?”
위연이라는 이름에 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실낱같은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위연은 자신의 태중의 아이가 진원 왕자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아이라고 핑계 댈 수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위연이다.
황제의 배다른 아우로 황제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어쩌면 위연이 정말 자신을 구해 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을 받기도 전에 심 부인에게 들켰고 지금은 연비의 앞에 끌려왔다.
위연이 연비에게 사실을 말한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연비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다.
진원 왕자는 지금의 황제와 가장 대척점에 있던 화비의 아들인 동시에 선황의 장자였고, 옹주에서 독살당했다.
다들 진원 왕자를 독살한 것이 지금의 황제라고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을 견아도 들었다.
진원 왕자는 살아 있을 때 지금의 황제를 제치고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로 주목을 받기도 했었다.
만약 지금의 황제가 진원 왕자를 독살했다면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황권에 위협이 되는 형님을 독살하고 황위에 오른 지금의 황제가 만약 그 죽은 왕자의 핏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 저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진원 왕자가 그랬듯이 자신도 독살당할지도 모른다.
연비가 황제에게 이르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심 부인보다 더 위험한 것이 황제다.
그런데 위연은 왜 연비에게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일까.
위연도 결국에는 못 믿을 사람이었을까?
“위연 전하께서 조금 전에 나를 찾아오셨다. 그분은 성품이 어지시고 선량한 분이라서 도움이 필요한 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분이시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런 분이 내게 도움을 청하셨을 때는 정말 다급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살려 준다는 걸까 죽인다는 걸까?
지금 견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뱃속의 아이를 살리는 것.
이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누구의 편도 들 수 있고, 누구의 종도 될 수 있다.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아이는 견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진원 왕자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렇기에 그의 아이는,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 아이는 견아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보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비의 비밀을 심 부인에게 알리려 하면서까지 아이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연비가 자신의 아이를 지켜 준다면, 마음을 바꿔 연비에게 충성할 수 있다.
충성의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이를 지켜 주는 자는 무조건 자신에게는 은인이다.
“나는 진원 전하를 딱 한 번 뵌 적이 있단다. 내 혼인식에서 그분을 딱 한 번 뵈었는데 좋은 분이라는 것이 느껴졌단다.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네시는데 내 눈을 바라보며 건네는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황궁에는 정말 좋은 분들도 많이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단다.”
“……네…….”
견아가 다른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듣는 진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 까닭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아들이었고, 좋은 주인이었으며, 좋은 형제였을 것이다.
그는 으스대는 법이 없었고, 그는 사람을 얕잡아 보고 함부로 구는 법이 없었다.
인자했고 너그러웠다.
황제의 장자였고 세도가 하늘을 찌르는 화비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했고 폭군이었던 부황을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애를 썼었다.
아첨하는 법을 모르고, 비열한 방법을 몰랐다.
그런 사내였다.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내는 그런 사내였었다.
모질지 못하고 야심이 없어서, 결국에는 독살당하고 말았다.
독살당하고 시체조차 돌아오지 못했다.
옹주에서 그의 시신이 돌아오기로 했지만 곧이어 일어난 선황의 죽음으로 그의 죽음은 묻혔고, 그의 시신은 옹주에서 불태워졌다고 들었다.
왕자인 그가 봉분이 갖춰진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졌다.
견아는 그것이 서러웠다.
그리고 지금 생전의 그에 대해 말하는 연비의 목소리를 통해 진원 왕자를 다시 만났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그리워해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가 떠올라 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좋은 분이시지만…….”
감히 천한 궁녀의 신분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에게 함부로 말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잘 알고 있지만 견아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제는, 이제 다시는 볼 수가 없어서…… 제 아이는 태어나도 그분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서…… 저는 그것이 그저 서럽고…… 아이에게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 줄 수도 없는 것이 또 슬퍼서…… 저는 그래서 그저 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마. 저는 그저…… 전하와 저는 그저 다른 것을 원한 것이 아닌데 저는 사랑하는 이를 빼앗겼고…… 아이는 아비를 빼앗겼습니다, 마마.”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진원 왕자를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 주는 연비가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겠는가.
화비가 그렇게 죽고 난 후에 진원 왕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해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까 무서워서 누구도 진원 왕자를 위해 제를 올려 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진원 왕자의 억울한 죽음을 다시 조사해 달라고 청하는 사람도 없다.
진원 왕자라는 이름을 다들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한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 것일까.
그는 그저 좋은 사람이었고 모두에게 다정했던 것이 전부였는데 누가 그를 죽였으며, 왜 모두 그를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서러워도 누구에게도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연비의 입에서 그리운 진원 왕자의 이름이, 그 생전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단 한 번 만났다는 연비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그를 수십 번 수백 번 만났을 이들은 그를 외면하고 있는데 말이다.
“저는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마마. 저는 다만 이 아이를…….”
“나도 안다. 우리의 사정이 다르지 않은데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니.”
“마마…….”
견아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누구라도 너와 네 아이를 해치지 못하게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니, 무서워하지 마라.”
천천히 다가온 연비가 엎드린 채로 흐느껴 우는 견아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견아는 연비를 이렇게 가까이에서는 처음 봤다.
눈동자가 진원 왕자를 닮아 있었다.
선한 사람의 눈동자였다.
이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딱 두 번 본다.
진원 왕자와 연비.
이런 이들은, 좋은 사람이다.
그것만큼은 알 수 있다.
“일단 눈물을 그치고.”
연비가 조용히 웃었다.
“어의에게 진맥을 받자. 어의도 비밀을 지켜 줄 것이니 무서워하지 말고. 알겠지?”
“네, 마마.”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만 무사히 낳고 나면, 그 후에는 연비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연비가 자신의 아이를 구해 준다면 자신은 연비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이다.
그렇게 은혜를 갚을 것이다, 반드시.
*
“마마!”
사비가 난리가 났다.
지금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뭔가 싶어서 사비는 지금 엄청나게 흥분했다.
“마마!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당장 그 고약한 것을 물고를 내고 아이를 떼어 내야…….”
“사비야.”
흥분하는 사비를 향해 은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엄한 목소리였다.
“너는 어찌 그리 무정하니.”
“마마! 지금 정을 따질 때입니까?! 진원 왕자는 화비의 아들입니다. 모르시겠어요? 화비 그년이 황제 폐하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다지 않습니까. 폐하를 죽이고 그 진원 왕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발악을 하다가 아들이 죽고 반미쳐 버린 그런 못된 년인데, 그런데 그 진원 왕자의 씨를 살려 주신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오나, 마마!”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네가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았으니 너는 사람이 나쁘다, 사람이 무정하다, 사람이 악하다 쉽게 말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상황이 되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만약 네가 화비 마마의 입장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아들이 황제가 되지 못하면 죽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누가 괴물이 되지 않겠니.”
은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사비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사람이 악해지고 싶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란다. 사람이 괴물이 되고 싶어서 괴물이 되는 건 아니란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몰리는 거란다. 나도 겪어 봐서 아는데 황궁은 무서운 곳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어쩌겠니. 나만 죽으면 괜찮은데 내가 죽으면 내 자식도 죽으니 어쩌겠니. 날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을 위해서 그리 모질고 독해져야 하는 것을 어떻게 나쁘다고 손가락질만 하겠니.”
“마마는 너무 착하셔서 그래요…….”
사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착한 것이 아니라, 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사람이라는 것은 잊고 싶지 않아서 그런단다.”
“네, 마마…….”
“우리가 아무리 모진 곳에 살고 있어도 사람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자. 그래야지, 사비야?”
“네…….”
“그러면 이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거라.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알아서,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
난데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사비가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언제 온 것인지, 그곳에 황제가 서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이다.
진원 왕자와 그 아이에 대한 것까지, 전부.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