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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72화 (72/108)

72.

“부인!”

창백한 낯빛으로 돌아온 은송을 처소의 궁녀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부축했다.

금환궁으로 부름을 받았다며 화사하게 장식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처소를 나섰던 은송은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기진맥진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은송을 그녀의 처소 나인들이 버선을 벗기고 머리의 장식을 벗기고 어깨와 다리, 그리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아…….”

은송이 다 죽어 가는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니 맴돌았다.

아비의 배경만 믿는 아무것도 못 하는 계집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의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가 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에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은송도 안다.

그건, 진심이라는 힘이다.

적어도 연비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은송도 느꼈다.

사람이 진심을 말하면 듣는 쪽은 그 말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은송은 그 본심을 더 잘 구분해 낼 수 있다.

‘진심이라니……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미친 것도 아니고…….’

아마 오늘 연비 앞에 머리를 숙였던 후궁들은 전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연비는 미쳤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대담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황후는 되지 못하겠지…….’

은송은 입궁할 때 황후가 될 수 있다 자신했었다.

자신의 미모, 그리고 화려한 언변과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머리까지.

그래서 심창의 양녀가 되었고, 후궁들 중 한 명이 황후가 된다면 그건 자신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오늘 황궁의 모든 후궁들, 그리고 궁녀들은 누구도, 어느 누구도 황후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제의 잔인함, 그러나 그 잔인함이 연비 앞에서는 눈 녹듯이 자취를 감췄다.

그것을 보고 누가 모르겠는가.

연비의 무엇이 황제를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섬뜩하리만큼 사나운 황제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자신 있게 나서겠는가.

하지만 연비는 그것을 해냈다.

연비는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황제를 앞에 두고 두려움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연비에게서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없었다.

거기서 이미 보이지 않는 벽이 보였다.

다른 후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은송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황제와 연비가 서 있는 그 공간을 자신들과 분리시키는 그 벽이 보였다.

남아 있던 일말의 희망이 사라졌고 이제는 지친 마음뿐이다.

황후가 되기 위해, 가장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는데 남은 것은 이 연환궁에 갇혀 남아 있는 수십 년을 살아가는 삶이다.

연환궁에서 적어도 이, 삼십 년을. 그리고 황제의 사후 황궁을 나가 강인사에서 죽을 때까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갇혀 살아야 하는 삶이 이제 곧 시작된다.

연비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젊어서는 황궁에 갇혀, 나이 들어서는 강인사에 갇혀.

일생 동안 보는 얼굴이라고는 황궁에서는 후궁들과 궁녀들, 강인사에서는 평생 이를 갈고 으르렁거리던 후궁들이 전부다.

그런 삶을, 과연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강인사로 보내진 후궁들의 절반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들었다.

그럴 만하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그 지긋지긋하게 묶인 삶을 벗어나지 못하니,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그 모습은 곧 자신들의 모습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노년의 때는 순식간에 닥쳐올 것이다.

‘결국 그 방법 외에는 없는 걸까…….’

은송이 눈을 감았다.

연비가 제안한 것은 너무 무모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들을 후궁으로 들여보낸 귀족들이, 후궁들의 아비라는 자들이 그것에 동의하겠는가.

아닐 것이다.

후궁들 중 몇 명이나 야심을 가지고 작정을 한 다음에 후궁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을까.

아마 극소수일 것이다.

그저 귀족의 딸이면 부족함이 없는 상대를 만나 호화로운 삶을 영유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딸을 황궁으로 들여보낸 그 이면에는 아비 된 자들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딸의 행복이 아니라 그들의 욕심이다.

그런 자들이 딸을 위해서,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 품었던 욕심을 버리라고 하면 몇 명이나 그것을 따를까.

멀리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심창.

은송의 양부인 심창의 경우에 양녀이긴 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욕심을 버려 달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줄까?

안 들어줄 것이다.

오히려 겁박을 해 올 것이다.

욕심에 삼켜진 이들은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은송 자신이 그 욕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욕심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혼인 무효라…….”

은송이 중얼거렸다.

연비의 진심은 이해했다.

굳이 자신들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연비다.

연비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누구나 인정하는 승자다.

승자는 패자에게 가혹해도, 잔인해도 누구 하나 원망할 수가 없다.

그게 승자의 특권이다.

그런데 승자인 연비가 긍휼을 보이는데 그것이 진심이 아닐 리가 없다.

비굴할 이유도 없고, 자신들에게서 받을 도움이나 이익이 전혀 없는 연비가 굳이 자신들에게 그런 오해를 살 만한 말을 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라는 뜻이다.

[혼인 무효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선황 폐하와 혼인했다는 사실을 무효화시킨 그것입니다. 제가 대례를 올리긴 했지만 한 번도 선황 폐하와 동침하지 않았고 여전히 순결하다는 이유를 들어 혼인을 무효화시켰던 탓에 지금 제가 황궁에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 적용되었는데 두 번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기다림 이후에 황제 폐하의 승은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희망하시는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될까요? 오 년? 십 년? 십오 년? 그때 여러분들의 나이는 몇 살이겠습니까. 그때도 여전히 폐하의 총애를 끌 수 있을까요?]

잔인해 보이지만 그 말은 현실이었다.

지금도 얻지 못하는 총애를 십 년 후에 얻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여러분께서 폐하께 혼인 무효의 청을 올리신다 하면 저 역시 여러분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더 아름답게 활짝 펼 수 있는 여러분들이 이 황궁의 높은 담 아래에 갇혀 시들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믿어 볼까…….’

누군가를 믿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은송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사람을 믿는 일이다.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거의 모든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믿는다는 것, 진심을 보인다는 것, 남을 돕는다는 것. 특히, 아무런 돌아올 이득이 없이 순수하게 남을 돕는다는 것.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연비에게서는 가식과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정한다.

연비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견아인가 하는 년은 연비께서 데려갔다고?”

“네, 부인…….”

“명줄이 긴 년이구나.”

이제는 다 귀찮아졌다.

견아라는 궁녀의 뱃속에 든 것이 누구의 씨인지, 연비가 진짜 회임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그런 것은 이제 다 귀찮다.

그저 지금은 목숨을 건진 것으로 만족하고 두 다리를 뻗고 쉬고 싶다.

금환궁에서도, 연비 앞에서도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지금 당장 죽을 정도로 급한 일이 아니면 깨우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 은송이 눈을 감았다.

지금 바라는 것은 악몽만 꾸지 않는 것이다.

꿈에 황제가 나오면 그것이 곧 악몽이다.

이제 황제의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다.

절대로.

이젠 절대로 황제 따윈 꼴도 보기 싫다.

*

견아는 지금 겁을 먹은 채로 덜덜 떠는 중이었다.

심 부인에게 꼼짝없이 죽임당한다 생각했는데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첩첩산중이라고 자신을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연비였다.

연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 연비.

만약 자신의 아이가 왕자 진원의 아이라는 것을 연비가 알게 되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지금의 황제는 진원의 생모인 화비와 견원지간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진원의 아이를 품었다고 하면 살려 두겠는가.

아이도 자신도 죽은 목숨이다.

‘어떻게 하지? 누구 아이라고 하지?’

살아남으려면 아이의 아비를 숨겨야만 한다.

그때였다.

“마마께서 들어오신다.”

엄한 목소리의 궁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연비전의 궁녀가 아니라 연환궁의 책임 상궁이었다.

엄하기로 소문난 책임 상궁이었다.

“하문하시는 것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네, 네, 마마님…….”

견아가 덜덜 떨며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심 부인 처소에서 죽을 뻔한 탓에 지금 견아의 몸은 엉망이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몸의 여기저기가 아팠다.

하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한다.

견아의 눈앞으로 옷자락이 쓸려 지나갔다.

그리고 고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어찌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는 것이니. 홑몸이 아니라 들었다. 얼굴을 들어라.”

“감히 천한 것이 어떻게…….”

“괜찮으니 머리를 들 거라.”

그 말에 견아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아비가 누구냐, 그것부터 물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연비의 물음은 견아의 예상을 빗나갔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힘들면 어의를 부르마.”

“네?”

어의를 불러 준다고?

한낱 궁녀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서?

대체, 연비는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신을 회유해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아니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나?

심 부인의 약점을 원하고 있나?

그런 의심을 하고 있을 때 연비가 다시 말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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