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폐하를 모신 후궁이라면 언젠가는 모두가 가게 될 곳이 강인사입니다. 저는 비록 강인사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은호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겁이 많다.
남들보다 몇 배나 겁이 많아서 조금만 무서운 상황이 벌어지면 겁을 먹고 움츠러들고, 겁을 먹으면 혀가 굳어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하는 것이 자신이다.
어렸을 때 부친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가 우연히 부친과 떨어져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커다란 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커다란 개가 저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다가올 때 비명도 지르지 못했었다.
비명만 지르면 근처의 어른들이 달려와서 그 무서운 개에게서 자신을 구해 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너무 무서웠던 탓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르는 소년이 개를 쫓아낸 후였다.
[입 뒀다가 뭐 해. 비명을 질러야 누가 도와주러 올 것 아니냐.]
그 말에도 제대로 대답을 못 했었다.
한번 겁을 먹으면 손발이 떨리고 입이 굳고 심하면 혼절하는 것이 예사였다.
겁 많은 성격은 어렸을 때도, 그리고 커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젓해야지, 이제는 용감해져야지, 어린애처럼 겁먹지 말아야지 몇 번이나 다짐을 했지만 그건 다짐을 할 때뿐이었다.
상황이 닥치면 언제 그런 다짐을 했냐는 듯 항상 겁을 먹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무섭지 않다.
조금 전 금환궁에서 하진을 마주할 때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그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넓고 넓은 금환궁 안에 가득한 사람들.
피부로도 느껴지던 그 섬뜩한 분위기.
병사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칼.
평소의 자신이라면 겁을 먹고 한 발자국 걸음을 떼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때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 안에 하진만 들어왔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진만 보이고, 하진의 목소리만 들렸다.
하진에게 집중하니 더는 무섭지 않았다.
[내가 무서우냐?]
예전에 하진이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무섭냐고.
지금 그가 다시 묻는다면 웃으면서 대답해 줄 수 있다.
세상에는 아직 무서운 것이 너무 많지만 단 하나 무섭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진을 무섭다고 해도 자신에게 있어서 하진은 조금도 무섭지 않은 단 한 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무섭지 않은 것은, 하진이다.
그가 무섭지 않은 까닭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 두려움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사랑에는 의심도, 두려움도, 불안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은호가 알 것만 같았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불길같이 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미치도록 간절하게 원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그건 사랑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고, 진짜 사랑은 이런 것이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아직 사랑에 대해 완전히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랑이 이런 것이라는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랑은 믿어 주는 것이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이며,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의심하지 않고, 사랑은 겁을 내지 않는 것이다.
사랑에 겁은 없다.
겁을 내는 것이 무슨 사랑이겠는가.
설령 가장 사나운 맹수라 할지라도, 그것이 두렵지 않은 것이 사랑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순간에도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
오래전 함께 외출했을 때 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던 부친은 은호를 거의 집 안에서만 살게 했다.
과보호라면 과보호라고 할 수 있는 그 울타리 안에서 은호는 외부인은 거의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 탓에 심하게 낯을 가리고 낯선 사람 앞에 서면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자신이 지금 낯모르는 많은 이들 앞에서 이렇게 차분하게, 조금도 떨지 않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호 스스로도 신기했다.
만약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라고 했으면 절대 못 했을 것이다.
“강인사에서 후궁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자식도 만날 수 없고, 가족들과도 만날 수 없고, 하다못해 친정의 아비가 세상을 떠나도 그 장례에조차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창살은 없지만 감옥과도 같은 곳이라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름이 없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 강인사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강인사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할 겁니다.”
은호가 저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후궁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아름다운 처녀들이었다.
입고 있는 화려한 옷보다 미모가 더 아름다운 처녀들이 수십 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강제로 선황의 황후가 되었듯이 저 처녀들 중에도 분명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후궁으로 들여보내진 이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 후궁이 되고 싶었나요. 부친이 후궁이 되어야 한다며 궁으로 들여보내는데 그것을 어찌 거역하겠어요.]
위연의 생모인 강비는 그렇게 말했었다.
[한번 궁에 들어온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폐하의 눈에 들어야 하고 승은을 입어야 하니, 어떻게 하겠어요? 결국은 후궁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는 수밖에.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남을 죽여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 황궁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답니다. 순진하게 입궁을 했지만 황궁에서 서서히 괴물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강인사에서 좋은 말동무가 되어 주었던 강비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좋은 사람이었다.
[죽은 화비도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요. 화비와 제가 비슷한 때에 입궁을 했었기 때문에 화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줍음도 많고 겁도 많은 성품이었는데 그 아비인 허연이 계속 압박을 해 대고 다른 후궁들에게 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을 거라 생각해요. 남들보다 악독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더 독해지고, 더 악랄해지고, 더 잔인해지고. 그래야만 살아남으니까. 황궁에서는 꽃이 피지 못한답니다, 마마.]
강비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던 것을 은호가 떠올렸다.
황궁에서는 꽃이 피지 못한다.
황궁에는 마물이 산다.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어 괴물로 만들어 가는 마물이 산다.
그 마물이 무엇인지 은호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황궁에 사는 그 마물은 바로, 두려움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독기를 만들어 내고, 욕심을 불러오고, 결국에는 사람의 마음은 집어삼킨다.
지금 저 처녀들이 악하면 얼마나 악하겠는가.
저 처녀들이 독하면 또 얼마나 독하겠는가.
저 처녀들이나 은호 자신이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다.
황궁이라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좀 더 웃으면서, 좀 더 행복하게, 좀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처녀들이다.
그런 처녀들을 황궁 안으로 몰아넣고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는 것은 그녀들의 아비들이다.
그녀들을 통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자들이다.
결국에는 가엾은 희생의 제물일 뿐이다.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
지금 은호는 후궁들을 그저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견제나 경계 같은 것은 없다.
사람 대 사람으로, 한 사람의 여인으로 같은 여인을 대하며 그저 안쓰럽고 측은하다.
“강인사는 황후가 아닌 후궁들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 중에서 강인사에서 생을 마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고개 숙인 후궁들은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심 부인.”
은호가 은송을 불렀다.
“네, 마마.”
은송이 고개를 숙인 채로 겨우 대답했다.
지금 은송은 연비의 속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자신들을 불러 놓고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강인사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습니까?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외부인은 일절 만나지 못하고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만 흔들리는 그 깊은 산에서 홀로 마지막을 보내고 싶습니까?”
“그, 그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은송이 대답할 말을 찾아 진땀을 흘렸다.
강인사.
그런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
미쳤다고 그런 곳에서 죽겠는가.
젊어서는 황궁에 갇혀 살다가 늙어서 강인사에 갇혀 살라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연비의 말처럼 피해 갈 도리가 없다는 것도 안다.
황후가 되지 못하는 이상, 강인사는 정해진 마지막이다.
“강인사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 마마.”
“그렇다면 황후가 되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은송의 숨이 막혔다.
“황후는, 되실 수 있겠습니까?”
연비의 물음이 은송을 짓눌렀다.
황후가 될 수 있겠냐고?
누가.
지금 이 황궁에 누가 황후가 될 수 있을까.
아까 금환궁에서 황제가 연비에게 하는 것을 모두가 지켜봤다.
연비는 이미 황후나 다름없다.
황제의 안중에는 연비 외에는 없다.
그런데 누가 감히 황후가 되겠는가.
“제가 묻잖습니까. 황후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되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적어도 강인사를 피할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그 말에 담긴 진심이 무엇일까?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