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폐하! 폐하! 잠시만 좀 멈춰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진에 비하면 다리가 아주 조금 모자라게 짧은 탓에 하진과 이루가 성큼성큼 걸을 때 그 두 배의 걸음을 걸어야 하는 홍문이 목소리를 높이며 뒤쫓아갔다.
“폐하! 조금만 천천히 가시면……!”
그러나 홍문이 그렇게 말할수록 하진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보폭이 큰 데다 걸음마저 빠르자 뒤쫓아가는 홍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하진의 뒤쪽에 바짝 뒤따라가던 이루가 뒤를 힐끗 돌아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쓰윽 흔들고 다시 돌려 버린다.
‘저 인간들이……!’
이쯤 되면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인간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폐하!”
안 되겠다 싶어 홍문이 후다닥 뛰어가서 하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황제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엄하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무엄이고 자시고 따질 때가 아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촐싹거리는 것이냐? 얼굴은 낮술을 마신 것처럼 벌겋고.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러는 것이냐? 그러면 이참에 푹 쉴 수 있게 휴가라도 줄까? 주이염이 요양을 위해 낙향을 한다고 하는데 거기 잠깐 따라갔다 오겠느냐?”
지금 홍문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진이 시침을 뚝 뗐다.
“폐하. 제발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저와 상의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너는 나와 상의하고 일을 했더냐?”
“폐하.”
“그리고 내가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냐?”
이렇게 나오면 홍문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도의적으로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 오늘 황궁에서 피바람이 일어났다.
다행히 주은호가 그걸 막았기에 망정이지 황제는, 하진은 정말로 그 미친 짓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게 절대 위협용이라던가 힘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홍문은 안다.
하진은 진심으로 다 죽이려고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주은호 때문은 아니다.
주은호와 선황에 얽힌 소문 때문에 내관들과 궁녀들, 그리고 여차하면 후궁들까지 전부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는 건 홍문도 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하진은.
아마 그건 핑계일 것이고 집권 초기 지금의 황제가 선황 못지않은 괴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공포로 사람들을 짓누르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선황은 그것에 성공했다.
선황은 옥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리는 수십 년 동안 오로지 공포로 모든 이들을 지배했었다.
누구에게도 자비가 없이, 피도 눈물도 없이.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가혹한 공포의 통치 아래에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선황의 재위 내내 나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끊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진은 선황이 사용했던 그 방법을 사용하려 한 것이다.
지지기반이 없는 재위 초기의 황제들이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한번 칼을 휘두르고 나면 젊은 인재들은 새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드러내 놓고 칼을 휘두르느냐, 숨긴 채로 칼을 휘두르느냐의 차이다.
홍문이 휘두르는 칼은 어둠 속에서 숨어서 휘두르는 칼이다.
죽는 사람은 있어도 죽이는 실체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진이 휘두르는 칼을 모두에게 보란 듯이 휘두르는 칼이다.
황제 스스로 모두와 벽을 쌓게 되는 것이다.
한 번 그 칼을 휘두르고 나면 이후에 어떤 선정을 펼쳐도 한번 씌워진
‘폭군’
이라는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홍문이 가장 꺼려 하는 것이다.
“지금 산재한 문제들이 수두룩한데 왜 굳이 지금 주위를 온통 적으로 만들려 하십니까?”
“언제 하나하나 가시를 쳐 내겠느냐. 한 번에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리고 그 잿더미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폐하. 가시는 하나하나 뽑아 내야 하는 겁니다. 불을 지르면 멀쩡한 나무들도 다 타 버립니다.”
“홍문아.”
하진이 홍문의 어깨를 손으로 꾹 눌렀다.
형편없이 왜소한 어깨를 누르는 손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굵었다.
“벽을 치면, 기둥이 울리는 법이다.”
“벽을 치면…….”
벽을 치면, 기둥이 울린다?
“가볍게 툭.”
하진이 홍문의 어깨를 한 번 더 툭 건드리며 낮게 속삭였다.
“치면.”
목소리에 미소가 묻어났다.
“알아서 흔들리는 법이지.”
“폐하?”
그때 하진의 손이 홍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거친 힘이 실린 손은 마치 홍문의 어깨뼈를 부서뜨릴 것처럼 짓눌렀다.
“이제 모두가 알게 되겠지. 아비보다 더 미친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예전에 저들이 마음대로 짓밟고, 조롱하고, 헐뜯고, 곤경으로 몰아붙였던 그 태자가 실은 그 아비보다 더 미친놈이라는 걸 이제 다 알게 되겠지. 황제가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이 황궁에는 심창이, 그리고 허연이 남아 있다. 그것들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서 여전히 힘을 과시하고 있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그것들이 내 자식도 잡아먹으려 들 것 아니겠느냐. 내 어미를 죽였던 것처럼 내 여자를 죽이고, 내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겠지.”
하진이 잡고 있던 홍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아마 홍문은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하진의 손은 아팠다.
“벽을 치고, 기둥을 흔들어서 나는 이 황궁을 무너뜨릴 생각이었지. 전부 무너뜨리고 새로 짓자고 말이야.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느냐?”
하진의 말에 홍문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할 말은 많지만 그중 어떤 대답도 하진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진이 원하는 대답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사내는 아직 오래전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도 오래되어서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사내만은 잊지 못하는 원한이 있다.
“그래도, 너무 과하시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홍문이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하진이 그저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혹은 주은호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전부 치워 버리기 위해서 그런 살육을 벌이려 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빗나갔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오늘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 품어 왔던 것을 실현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을 홍문이 이제야 깨달았다.
다른 것들은 전부 핑계거리일 뿐,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이 사내는 기어이 이렇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걸 주은호가 막아섰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 사내는 기어이 오늘의 일을 다시 만들어 낼 것이다.
이 사내의 바람은, 황궁이, 이 천 년을 내려온 황궁이 무너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 거대한 독 항아리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 어쩌면 이 사내의 소망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터를 짓겠지.
귀신도, 괴물도 살지 않는 새로운 터를.
*
“나는 황궁에 입궁하기 전에 강인사에서 지냈습니다.”
연환궁으로 돌아온 은호가 후궁들이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궁들은 전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들은 조금 전 엄청난 일을 당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 황제가 궁녀와 내관들을 전부 죽이려 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후궁들까지 전부 몰살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황제를 능욕한 죄.
죄명은 그것이었다.
황제가 선황에게서 여자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말은 목이 달아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이다.
후궁들은 자기들끼리, 혹은 제 처소의 궁녀들에게 우스개처럼 그 말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건 자신들이 사랑받지 못한 까닭이었고 주은호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그리고 오늘 자신들이 혀를 잘못 놀린 대가로 목이 달아날 뻔했다.
다행히 목숨은 구명했지만 이 일로 황제의 눈밖에 완전히 나 버린 것은 사실이다.
이제 황제가 자신들을 찾아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이전에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귀족들의 딸을 후궁에 들여놓고 한 번도 승은을 허락하지 않은 황제의 처사에 딸을 들여보낸 귀족들이 항의라도 할 수 있었고 그러면 그 항의를 이기지 못하고 황제가 한 번 정도는 침소를 찾아와 승은을 베풀어 줄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완전 물거품이 되었다.
이미 자신들은 모두가, 황궁의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그것도 황제를 능멸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 까닭으로 황제가 자신들의 처소를 찾지 않는다 해도 이제 누가 그 일에 대해 항의할 것인가.
황제는 이것으로 후궁들의 처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얻었고 후궁들이나 귀족들은 거기에 항의할 명분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목숨 줄을 쥔 것은 주은호다.
그녀에게 내명부의 전권을 황제가 허락한 것이다.
“강인사는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선황 폐하를 모시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는 곳입니다.”
주은호의 목소리는 얌전했다.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얌전해서 후궁들은 주은호가 독하지 못한 성격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아마 눈물로 호소하면 이기지 못할 그런 성품일 것이다.
정에 한없이 약하고 정에 흔들리는 그런 성격.
차라리 주은호의 성격이 그래서 다행이라고 후궁들이 생각했다.
그래서 금환궁에서 자신들이 살아났고, 앞으로도 저 성격을 이용하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지금 후궁들은 어떻게 하면 앞으로 주은호를 이용해서 황제에게 접근할까, 어떻게 해서 이 황궁에서 자기 자리를 굳힐까 그것만 생각했다.
주은호가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봤자 앞으로 잘 지내자, 서로 투기하지 말자, 그런 소리 아니겠는가.
그런 착한 척하는 말 외에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앞으로 여러분들이 말년을 보낼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 말이 후궁들의 귀를 건드렸다.
담담하고 얌전한 목소리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경고가 실려 있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