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황제의 입에서 황명이 떨어지는 순간 금환궁의 뜰에 꿇어 엎드린 수많은 궁녀들과 내관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수백 명에 가까운 이들이 비명을 질러 대자 금환궁 전체가 수라도의 형국으로 변해 갔다.
칼을 든 병사들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 엉켜들었다.
수백 명의 남녀들이 서로 뒤엉키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을 몇 계단 위의 어좌에 앉아 내려다보던 하진의 곁으로 이루가 다가선 것은 그때였다.
“폐하.”
이루가 허리를 숙여 하진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하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돌아가라 해라. 홑몸도 아닌데 흉한 것을 봐서 좋을 것이 없다.”
“소인으로서는 도무지 막아설 수가 없는지라…….”
“막아서지 못하는 거냐 아니면 막을 생각이 없는 거냐?”
흘긴 눈으로 이루를 노려본 하진이 작은 한숨을 들이마신 후 손을 들었다.
그가 손을 들자 당장이라도 칼을 내리쳐 금환궁의 뜰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만들기 직전의 병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땅에 머리를 처박고 귀를 막아라. 누구라도 고개를 쳐드는 놈이 있으면 그 목을 잘라 버리고 귀에서 손을 떼는 놈이 있다면 그 귀와 손을 함께 잘라 버려라.”
하진의 입에서 나오는 섬뜩한 목소리에 그때까지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 소리치던 이들이 땅에 납작 엎드렸다.
혹시나 살아날 수 있을까 싶어 땅에 머리를 처박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이들을 노려보던 하진이 이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가 손을 들자 금환궁의 중문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장수들이 연비를 하진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왔다.
두 명의 장수를 좌우에 두고 금환궁 안으로 발을 들인 은호가 잠시 멈칫거렸다.
금환궁의 뜰 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둘러싼 병사들은 칼을 빼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끔찍한 살육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은호의 뒷목으로 소름이 타고 올랐다.
‘설마……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하진이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하진이 앉아 있는 어좌로 가까이 걸어가는 동안에도 불길함은 은호를 떠나지 않았다.
은호가 하진을 만나기 위해 금환궁으로 직접 온 까닭은 심 부인 처소의 궁녀 때문이었다.
하혈을 하던 그 궁녀는 틀림없는 아이를 가진 여인이었다.
아이를 가진 그 궁녀를 심 부인이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손목을 자르려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하진을 만나 그 여부를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황후나 태후처럼 후궁을 책임지는 내명부의 어른이 없는 이상 궁녀의 처분은 황제의 명령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후궁이 사사로이 궁녀를 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 부인이 궁녀의 손목을 자르려 한 것에 대해 황제에게 직접 물으려 했다.
그런 다음에 조심스럽게 그 궁녀의 태중의 아이에 대해서도 의논하고 싶었다.
은호도 황궁의 궁녀가 회임을 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이 황제의 아이든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의 아이든 간에 그것이 몰고 올 여파를 알고 있다.
하지만 분란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를 가진 여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고, 그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호 자신의 안에도 남들에게 지금 밝히지 못하는 아이가 자라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아이가 소중하듯 그 궁녀의 아이도 소중한 생명이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하진의 앞까지 다가간 은호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황제의 앞에서 예의를 갖추려던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하진이었다.
“바닥이 차다.”
어좌에서 일어난 하진이 은호의 팔을 잡아 일으킨 다음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 좌우를 가렸다.
뜰에 엎드린 이들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냐?”
“폐하의 부름이 없이 감히 금환궁에 발길을 한 것이 죄가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사오니…….”
“너를 벌주고 나는 어찌 살라고. 너는 가끔 나를 일부러 놀려 대는 것 같구나. 내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날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말이지.”
“폐하,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라는 말에 은호가 살짝 당황했다.
자신은 한 번도 일부러 하진을 이용하려거나 골탕 먹이려 한 적이 없다.
“네가 굳이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이겠지.”
하진은 은호를 잘 알고 있다.
은호의 성격이 어떤지 거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이 하진이다.
주은호는 절대로 그녀 자신이 가진 지위를 남용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녀가 받는 총애를 무기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휘두를 성격도 아니고 권력을 무기로 삼아 그것으로 뭔가를 얻어 내려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타인을 함정에 빠뜨리고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던 주이염에게서 이런 딸이 태어났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주이염이 누군가.
하진은 주이염이라는 사내가 젊은 날부터 저지른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얼마나 가차 없이 그 길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죽여서 치워 버렸는지 그걸 어떻게 모르겠는가.
주이염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시체를 밟고 온 길이나 마찬가지다.
그 시체들 중에서 하진의 모친도 있었다.
주이염이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죽음을 방관한 공범 중에 주이염도 속해 있다.
그런 사내에게서 이런 딸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딸을 자신이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모순이 아닌가.
씹어 먹어도 시원하지 않을 원수의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주은호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오래 묵은 원한도, 가슴에 맺혀 있던 복수심도, 증오도 주은호 앞에서는 그저 지나간 시간의 별것 아닌 흔적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하진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까.
“말해 보아라.”
“폐하. 궁녀의 처분이 오롯이 폐하의 뜻에 달려 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궁녀가 손목을 잘리게 된 것을 보고 그 영문을 물으니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하여, 폐하께서 어찌 그런 잔인한 처분을 내리셨는지 여쭙고자 감히 죄를 무릅쓰고 폐하를 뵈러 온 것입니다.”
“손목?”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하진은 궁녀의 손목을 자르라 명령한 적이 없다.
그까짓 궁녀 한 명에게 신경을 쓸 일이 애초에 없다.
“심 부인 처소의 견아라는 궁녀가 도둑질을 했다 하여 손목을 자르라 하신 것이 아니옵니까?”
“심 부인.”
하진이 픽 웃었다.
“심창의 딸이 이제 황명까지 빙자한 것이냐?”
일순 싸늘해지는 목소리에 뜰에 엎드려 있던 은송의 얼굴에 새파랗게 질렸다.
내관과 궁녀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어도 은송은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궁녀와 내관들은 뜰의 뒤쪽에,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후궁들은 뜰의 앞쪽에 엎드려 있었다.
병사들이 에워싼 것은 내관과 궁녀들뿐이다.
이런 곳에 굳이 후궁들까지 끌어들인 것은 경고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후궁들 전부를 죽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싸늘한 말에 은송이 덜덜 떨었다.
[황명을 빙자]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은송도 알고 있다.
죄에 죄가 겹치면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은 없다.
게다가 지금 주은호가 말하고 있는
‘궁녀’
는 바로 그 아이를 가진 궁녀다.
‘그 계집이 아이를 가진 것까지 알고 있을까? 설마, 모르겠지…….’
만약 그 궁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되면, 그런 궁녀를 자신이 죽이려 한 것까지 알게 되면 정말 살아남을 길이 없다.
그 속에 품은 아이가 황제의 아이라면 더더욱, 모든 것은 끝이다.
자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창도 끝이 난다.
황제의 아이를 품은 궁녀를 죽이려 든 것은 대죄다.
그 궁녀가 품은 것이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나는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
“하오면 그 궁녀에 대한 처분을 거두시는 것으로 생각하여도 되겠습니까?”
“처분을 내린 적이 없는데 무슨 처분을 거두어. 그냥 네가 알아서 하거라.”
하진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은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연환궁에서 일어나는 내명부의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죽이든 살리든.”
죽이든 살리든.
그건 은호에게 내명부의 어른 자리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태후나 황후가 가질 수 있는 권한을 말이다.
“정말 신첩에게 내명부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까?”
하진은 은호가 조금은 놀랄 줄 알았다.
그러나 은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나는 한번 말한 것을 번복하지 않는다. 앞으로 내명부의 일은 네 몫이다.”
“그러하오면.”
은호가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진의 손을 살며시 끌어 내렸다.
그리고 금환궁의 뜰에 엎드리고 있는 후궁들과 궁녀들, 내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들에 대한 처분 또한 제 소관이 되는 것이옵니까?”
내명부에는 후궁, 그리고 궁녀들, 내관들까지 포함된다.
황궁 외적인 부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명부에 속한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지금 저들이 지은 죄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제가 치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쯤 되면 당황한 것은 하진이다.
설마 은호가 곧장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다.
그것을 번복할 수는 없다.
“언제 이렇게 영악해진 것일까?”
내뱉는 말에 악의는 없었다.
그저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놀라움,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
“누가 주이염의 딸이 아니랄까 봐 머리 쓰는 것은 꼭 제 아비를 닮았어.”
주이염에게서 이런 딸이 나와서 신기하다는 말은 취소다.
꼭 제 아비를 닮은 딸이다.
제 아비의 나쁜 것은 하나도 닮지 않고 좋은 것만 닮은 딸.
자신과 은호의 아이도 그렇게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진이 잠시 해 봤다.
자신의 나쁜 점은 닮지 않고 자신의 좋은 점과 은호의 좋은 점만 닮은 그런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 좋겠다고 말이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