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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67화 (67/108)

67.

“황제는 무치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수치스런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결국에는 천한 것들이 황실과 황제를 더 업신여기지 않겠느냐. 내 말이 틀린 것이냐?”

금환궁의 뜰에는 내성사신을 비롯한 황궁의 각 요직을 맡아 보고 있는 관원들까지 동석하고 있었다.

지금의 분위기에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가 없는 것은 장소를 압도하는 황제의 기 때문이었다.

기에 눌려 숨이 막힌다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제대로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황제가 내뿜는 기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눈매만 사납게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그의 심기 역시 사납게 노기를 머금고 있음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날벼락을 맞은 것은 심 부인이었다.

금환궁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현무전으로 곧장 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끌려 온 곳은 현무전이 아니라 금환궁의 뜰이었다.

“심 부인은 내게 한 말을 다시 해 보아라.”

“폐, 폐하.”

은송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고개를 들라 명할 때까지는 들 수가 없다.

이 금환궁에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모두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한다.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연환궁에서는 제법 말을 잘하더니 금환궁에서는 어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해.”

“천한 것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인지라…….”

“말은 중요하지.”

하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의 얼굴에는 도무지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대신 해 주랴?”

꿇고 있는 무릎 위에 얹어진 심 부인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애써 단장한 손톱과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가락지가 함께 떨렸다.

“대신, 내 입에서 그 말이 나가게 되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섬뜩한 경고였다.

그 경고 앞에서 은송이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은 제가 살고 봐야 했다.

궁녀들 따위야 어찌 되던 일단 제가 살고 봐야 나중을 기약하지 않겠는가.

“폐하.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것을 말씀드리자면, 천한 것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선황 폐하의 옥좌를 물려받으며 그 계집 또한 물려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은송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좌중이 술렁거렸다.

금환궁 뜰의 좌우에 늘어서 있는 황궁의 관원들은 사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불려 나온 이들이다.

다만 황제가 금환궁의 뜰에 후궁을 부르는 일은 무척이나 드문 것이라 무슨 일이 있다는 것만 짐작했을 따름이다.

만약 누군가 역심을 품었다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법을 어긴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관원들이 금환궁의 궁으로 불려 나오지 않고 정식으로 국청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국청이 열리지 않고 그저 금환궁의 뜰로 나오라는 명령에 황제가 특별히 하명할 것이 있나 그 정도로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심 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다고 하나, 그 말은 명백하게 황제의 위신을 땅으로 추락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황의 계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보다 더 황제를 업신여기는 말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황제를 패륜으로 모는 말인 동시에 장차 황실의 가계도에 의혹을 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현 황제가 선 황제의 계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계집’

이 가리키는 것은 누가 봐도

‘연비 주은호’

가 명백했다.

그렇잖아도 주은호에 대해서는 후궁으로 책봉할 당시부터 좋지 않은 말들이 많았었다.

황후 책봉 무효까지 이끌어내며 강인사로 보내졌다가 다시 황제의 후궁으로 돌아온 주은호가 진짜 선황의 승은을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그 진위 여부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주은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 자신이 선황의 승은을 입었다고 말할 리가 없다.

그래서 황궁 안의 거의 모든 이들이 주은호가 선황의 승은을 입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은 없었다.

선황의 황후를 제 후궁으로 삼을 정도로 주은호를 향한 황제의 집착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사나운 맹수와 비슷하다.

그 수염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다.

수염을 건드리면 그 파장은 건드린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숨죽여야 하는 곳이 황궁 아니던가.

그런데 어떤 겁 없는 것들이 감히 선황의 유산 운운하며 황제의 위신을 깎아내릴 말을 한 것일까.

이건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다, 자기들끼리의 수다였다, 농담이었다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패륜에 관계된 것이다.

패륜이다.

이 말을 그냥 넘긴다면 황제는 스스로 패륜을 저지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황제가 패륜을 인정한다면 주은호의 몸을 타고 태어나는 황손 역시 그 정당성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주은호가 회임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향후에 다시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질 것이 뻔했다.

선황의 자식이냐 아니면 현 황제의 자식이냐.

현 황제의 자식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자라는 내내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고, 훗날에 황위에 오를 때 누군가로부터 후계의 정당성을 지적받으며 스스로를 변론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선황의 유산을 물려받으며 그 계집도 물려받았다.]

그 말이 가져올 파장은 절대로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까닭은 그런 것이었다.

관원들이 서로 표정을 살폈다.

모두 바짝 긴장하고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선황 폐하로부터 계집을 물려받았다라…….”

하진의 손가락이 어좌의 팔걸이를 툭, 툭 쳤다.

신경질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하진의 질문을 받은 은송이 숨을 삼켰다.

“신첩은 절대 그런 생각은 품지도 않았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선황 폐하께 계집을 물려받으시다니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러면, 너는 주은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제의 질문이 노골적으로 변했다.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건 마치 쥐를 구석으로 모는 뱀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다.

“폐하. 신첩은…….”

“주은호가 한때 내 어머니였지.”

하진이 차갑게 웃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은송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정식으로 황후 책봉식을 치르고 황후가 되었으니 내 어머니가 된 것이지. 나도 그 책봉식에 참석을 했었고 어머니께 절을 올렸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참 어리고 아름다운 어머니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목소리 하나하나에 차가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은송을 찔러 왔다.

그건 마치 독이 묻은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그리고 초야에 서북의 반란이 일어나 선황께서 옹주로 떠나셨는데, 자 묻겠다. 그 초야의 밤에 선황께서 주은호와 동침을 했겠느냐. 하지 않았겠느냐?”

은송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장이다.

주은호가 선황과 동침했다고 하면 황제가 패륜을 저질렀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비께서 초야에 승은을 입지 않으셨다고 그때 은환궁의 궁녀들이 전부 증언을 하였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주은호가 선황과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지?”

“네, 폐하.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묻겠다. 선황께서 옹주에서 돌아오시던 밤, 주은호를 현무전으로 친히 부르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황께서 화비에 의해 비명에 가셨는데, 그때 주은호는 선황께 승은을 입었을까?”

“그,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너는 주은호가 황후였다고는 하지만 처녀였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렇군.”

하진이 픽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모습을 본 태감이 금군 병사에게 눈짓을 하자 금군이 은송과 함께 불려 온 심 부인 처소의 궁녀 한 명을 앞으로 떠밀었다.

“아아…….”

앞으로 떠밀린 궁녀가 돌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덜덜 떨었다.

황제가 제게 어떤 것을 물을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저년이냐? 유산 운운한 것이?”

은송이 제 옆에 엎드린 채로 덜덜 떨고 있는 궁녀를 곁눈으로 흘깃거렸다.

“네, 폐하. 맞사옵니다. 제게 그런 무엄한 말을 알려 준 것이 저것입니다.”

일단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밟고 올라가야 한다.

“부, 부인…….”

궁녀가 흙빛으로 얼굴이 질려 은송을 쳐다봤지만 이내 병사의 손에 의해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꺄악!”

바닥에 처박힌 궁녀의 이마가 터지며 붉은 피가 바닥으로 흘렀다.

“묻겠다. 네가 그 더러운 혀로 내가 선황에게서 계집을 물려받았다고 말한 년이냐?”

“폐, 폐, 폐하…… 주,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지.”

하진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죽을죄지. 잘 아는구나. 그래, 죽을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죽여 줄까?”

“폐, 폐하…… 제, 제발 목숨만…….”

“이상하구나. 네 입으로 지금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 놓고서, 이제는 살려 달라고?”

“폐하…… 부디…….”

“나는 자비로우니, 긍휼을 베풀어 줄 수도 있다.”

조금도 자비롭지 않은 목소리로 황제가 말했다.

“네게 그 말을 지껄인 연놈들이 누군지 말하면 자비를 베풀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네게서 그 말을 듣고 낄낄거리며 웃은 연놈들의 이름도 말이다.”

자비.

자비를 베풀어 준다.

지금 궁녀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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