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65화 (65/108)

65.

‘그러니까 여기 와 여기를 막고…….’

홍문이 황궁의 배치도를 놓고 고민에 잠겼다.

지금 홍문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몸이 여덟 개, 머리가 네 개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할 일은 많은데, 정말 할 일이 많은데, 지금도 충분히 할 일이 많은데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기분이다.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할 일이 잔뜩 들어 있는 자루를 들고 그걸 머리 위에서 펑펑 뿌려 대는 그런 기분?

하여간에 지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열 개였는데, 자고 일어나니 그 일이 열다섯 개로 늘어 있고, 그리고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면 갑자기 일이 스무 개로 늘어나 있다.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것도 없는데 황궁에서 어쩌면 가장 바쁜 것이 홍문일 것이다.

홍문은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태자 시절이었다면 상관없지만 이제 황제가 되었는데 왜 하진이 아직도 홍문을 곁에 두고 있는지 그걸 이해할 수 없다는 수군거림들이 거의 전부였다.

하진의 태자 시절 홍문은 그의 학동이었다는 인연으로 곁에서 그를 수발드는 책사 정도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조언을 해 주는 관원들이 그 곁에 얼마든지 있다.

더는

‘책사’

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홍문을 바라보는 시선들이다.

책사란 명칭 자체가 상당히 호의적인 표현이고 보통은 모사꾼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하는 것이 모사가 더 많다는 것을 홍문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진이 정사의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태자의 위치였고, 무엇보다 하진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정사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생존에는 모사가 필요하다.

교활하고 치밀한 모사가 생존에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하진이 태자였을 때 홍문은 스스로 모사꾼이 되기를 자처했었다.

그러나 지금 하진에게 더는 모사꾼은 필요하지 않다.

하진은 이제 더는

‘생존’

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이제 하진은 생존이 아니라 다스림에 치중해야 한다.

나라는 황제 혼자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관리라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니 말이다.

황제 혼자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가리켜 독재라고 한다.

독재는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견제와 더불어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 절충이라는 과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무시해서는 절대 좋은 황제가 될 수 없다.

하진에게는 확실히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건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하진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하진의 몸에는 선황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건 비단 선황의 피에 국한되지 않고 수백 년간 내려오는 황실의 피다.

역대 황제들 대부분은 끝이 좋지 않았다.

그 피에 폭군의 성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폭군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황족의 몸에 흐르는 피에는 그 씨앗이 들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몸 안에

‘악’

의 씨앗을 품고 있겠지만 황족의 경우는 그것이 두드러지게 심하다.

잔인하고, 포악하며, 탐욕스럽다.

역대의 황제들이 그러했다.

피를 즐겨 보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선황의 경우가 그러했고, 하진에게서도 그런 것이 종종 드러난다.

홍문은 하진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오래 겪어 왔다.

하진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진은 지혜롭고, 느긋하며, 멀리 보는 현안을 가졌지만 그런 그에게서도 문득문득 감출 수 없는 폭군의 기미가 드러나곤 했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그를 거스르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그건 선황을 빼닮았다.

그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그는 일말의 자비심도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이다.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우고 화려하게 타올라 끝내는 스스로도 태워 버릴 수 있는 그런 불이다.

그런 씨앗이, 폭군의 씨앗이 그의 몸에 흐르는 피 안에 들어 있다.

씨앗은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비가 내려 싹을 틔울 기회를 말이다.

환경과 조건만 주어진다면 하진은 언제라도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폭군이 된다면, 그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 더 끔찍한 괴물 같은 폭군이 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그의 폭군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홍문은 생각하고 있다.

자신은 모사꾼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가리켜 모사꾼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모사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사도 아니다.

책사도, 모사꾼도 얼마든지 다른 이들이 대체할 수 있다.

홍문은 스스로를 하진의 누름돌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가 폭군이 되지 않도록, 그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누르고 방향을 조절해 주는 역할이 자신에게 맡겨졌다고 말이다.

자신이 할 역할은 분명하다.

씨앗 위에 비가 내리지 않게 막는 것이다.

하진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폭군의 본능이 눈을 뜨지 않게, 그 주변의 위험 요소들을 전부 치워 버리는 것 말이다.

“같은 날에 동시에 서문에서 불이 나면…… 서문에는 서고가 있으니 황궁 안의 모든 시선이 일단 서문에 쏠리겠고…….”

지금 홍문은 황궁 안에 불을 지를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황궁을 태워 버리려는 목적은 아니다.

홍문의 목적은 단 하나다. 연환궁을 태워 버리는 것.

연환궁에는 연비가 있다.

연비를 죽이려는 건 아니다.

연비를 죽였다가 그 후 폭풍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홍문이 처리하려는 것은 심 부인이다.

물론 심 부인 한 명을 처리하기 위해 연환궁 전체를 태워 버리는 것은 미친 짓처럼 보일 것이다.

심 부인 한 명을 죽이려면 그냥 이루를 이용해도 된다.

이루라면 증거도 목격자도 남기지 않고 심 부인을 죽여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심 부인 한 명을 죽이면 그것은 반드시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심 부인의 뒤에는 심창이 있다.

그리고 심창과 허연은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

화비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허연은 아직도 건재하다.

심창은 그런 허연의 힘이 필요할 것이고, 허연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심 부인이 반드시 하진의 아들을 낳아야 한다.

둘 사이의 변수는 주이염이다.

아직 그들은 주이염의 병에 대해 모르고 있다.

물론 주이염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이염의 힘을 필요로 한다.

만약 주이염이 제 편을 들어 준다고 하면 심창과 허연은 서로를 버릴 것이다.

그런 주이염의 딸이 연비고, 심창의 양녀가 심 부인이다.

심창으로서는 심 부인이 연비와 척을 지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그건 심창의 정치적인 입장이고, 심 부인으로서는 지금 가장 걸림돌이 바로 연비다.

심 부인은 심창이 뭐라고 하든 기어이 연비를 해치려 들 것이다.

연비가 화를 입으면, 하진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 뻔하다.

연비는 하진을 폭군으로 이끄는 촉매제와 같은 존재다.

연비가 화를 입으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하진에게로 이어진다.

일이 이래저래 복잡하게 꼬여 있다.

게다가 연비는 지금 회임 중이다.

아직 연비의 회임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 되지만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봐서는 아무래도 심 부인이 눈치를 챈 것이 분명하다.

심 부인이 연비의 회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굳이 녹용과 우황을 넣은 약을 달여 연비전에 들여보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직 심 부인이 심창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심창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심창의 성격으로 봐서는 곧장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니 말이다.

연비의 회임을 이용해서 분명 자신과 거래를 하려 들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까지 심창이 잠잠한 것으로 봐서는 심창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심 부인이 저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지금 홍문이 하려는 일은 심 부인을 처리하는 동시에 심창의 약점을 틀어쥐는 것이다.

연환궁과 서문에 동시에 불을 지르면 불을 끄려는 자들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다.

서문에 먼저 불을 내고 그쪽에 시선이 집중되게 한 다음 연환궁에 불을 낸다.

연환궁은 구조상 불이 났을 때 입구가 막히면 달아날 길이 없어진다.

담이 너무 높아서 담을 넘을 수가 없고, 입구를 제외하면 뒷문도 없다.

게다가 입구는 한 번에 두 명 정도가 지나갈 정도로 비좁다.

그런 비좁은 통로를 통과해야만 연환궁의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그러니 입구에 불을 놓고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불길이 타들어 가게 하면 연환궁 안에서는 누구도 밖으로 도망치지 못한다.

후궁들은 전부 그 불길 속에서 타 죽을 것이다.

대신 단 두 명만 살려 낸다.

연비와 심 부인.

불을 지른 것은 심 부인으로 몰아갈 것이고 그렇게 증거를 조작할 것이다.

대신 심창을 불러 그의 위신을 생각해서 비밀에 붙여 주겠다는 조건으로 허연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할 것이고, 심 부인은 자결을 종용하면 된다.

연환궁에는 거의 모든 귀족들의 딸들이 후궁으로 입궁해 있다.

그녀들이 한날한시에 전부 불에 타서 죽는다면 당분간은 다른 귀족들도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낼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다.

후궁들도 처리하고, 심 부인도 처리하고, 그리고 연비도 연환궁에서 빼내고, 이만하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탓에 연환궁의 후궁들과 궁녀들이 전부 불에 타 죽겠지만.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홍문이 픽 웃었다.

자신도 하진 못잖게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을 홍문도 알고 있다.

어쩌면 하진보다 자신이 더 뱀처럼 차가울지도 모른다.

죄책감도 모르고, 후회 따위는 더더욱 모른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때였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홍문이 얼굴을 들었다.

달려온 것은 다름 아닌 위연이었다.

위연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형님 폐하께서!”

위연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에 홍문이 벌떡 일어섰다.

기가 막힌 말이 위연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황제가 황궁 안의 모든 궁녀들의 목을 베려 한다는 말이었다.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이런 미친.”

물론 욕설의 대상은 하진이었다.

홍문이 위연을 떠밀고 뛰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홍문의 발은 무척이나 느렸다.

아주 느렸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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