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64화 (64/108)

64.

“심 부인 처소에서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이제 막 단장을 하려는 은호에게 사비가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했다.

사비는 연환궁에 엄청 빠르게 적응을 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비전에 있지 않으면 항상 연환궁을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염탐(?)을 했다.

사비가 주로 염탐하는 곳은 심 부인 처소로, 지금 사비의 생각으로 은호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이 심 부인이기 때문이다.

심 부인만 없으면 은호의 연환궁 생활이 무척이나 평온하고 아무도, 감히 은호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심 부인이 눈에 가시처럼 밟힌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은호가 자고 있을 때 심 부인 처소의 그 가증스런 궁녀가 약 그릇을 들고 와서 그 야단을 떨었지 않았던가.

마침 황제가 은호와 밤을 보내고 연비전에서 기침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못된 궁녀와 머리카락을 잡고 싸웠을 것이다.

물론 싸웠다면 자신이 이겼다.

개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비다.

싸움은 자고로 기선 제압.

머리카락부터 잡아 뜯고 그다음에는 박치기로 얼굴에 코피를 터트린 다음에 물어뜯는 순서다.

이 방법으로 사비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오늘 아침의 그 재수 없는 궁녀도 묵사발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랬더라면 그 여우 같은 심 부인이 또 그걸 빌미로 은호를 괴롭혔겠지만 말이다.

그때 딱 황제가 나타나 줘서 일이 일단락되었지만 그 소란에 은호가 깨지 않고 푹 잠들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황제가 떠난 후에 잠에서 깬 은호는 황제가 그 약을 전부 마셔 버렸다는 말에 그저 작게 웃기만 했다.

사비는 심 부인 처소의 궁녀와 있었던 실랑이를 은호에게 말하지 않았다.

은호의 성격이라면 분명 저를 혼낼 것이니 말이다.

은호가 깨어난 직후에 조반을 먹는 틈을 타서 사비는 얼른 심 부인 처소를 엿보고 왔다.

황제가 심 부인 처소로 간 것을 알아서 거기서 뭘 하나 훔쳐본 것이다.

원래 훔쳐보기도 사비의 주특기다.

설마하니 황제가 심 부인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사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심 부인이 보통 여우가 아니다.

그건 여우 중의 여우다.

그저 착하게 대해 줘서 감동받을 그런 여자는 절대로 아니다.

잘해 주면 오히려 잡아먹으려고 드는 그런 부류의 여자다.

심 부인 처소에서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황제가 심 부인을 금환궁으로 부르고, 황제가 돌아간 후 심 부인이 곱게 단장하고 금환궁에서 온 태감을 따라나선 것까지 보고 사비는 돌아오려고 했었다.

너무 기가 막힌 상황이라 얼른 은호에게 알려 주고 대비책을 세우려고 돌아오려고 할 때 사비는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심 부인 처소의 궁녀들이 한 궁녀를 끌어내고 손목을 자른다 어쩐다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난리?”

머리장식을 꽂으며 은호가 사비를 쳐다봤다.

“무슨 난리?”

“지금 궁녀 하나가 금비녀를 훔쳤다고 손목을 자르라고 한 모양입니다.”

“손목을 잘라?”

은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심 부인이 얼마나 표독스러운지 금비녀 하나를 훔쳤다고 손목을 잘라 궁에서 내친다고 하는데, 아유. 얼마나 불쌍한지…….”

“손목을 자르는 건 어떤 경우냐?”

은호가 제 머리를 빗어 주고 있는 궁녀에게 물었다.

황궁의 법도에 대해서는 자신이나 사비보다는 황궁에 오래 있었던 궁녀들이 더 잘 아는 법이다.

“도둑질을 했을 때는 감찰 상궁이 그 잘잘못을 가려 보통은 황후마마나 태후마마께 아뢰어 벌을 주는데, 도둑질의 벌은 손목을 자르는 것이옵니다.”

“황후나 태후가 부재 시에는?”

“그런 경우에는 감찰 상궁이 태감께 알려 황제 폐하의 재가를 얻어 벌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폐하께서 궁녀의 손목을 자르라 명령하셨단 것이냐?”

“그건 소인도 잘…….”

“사비야.”

은호가 조용히 사비를 불렀다.

“네, 마마.”

“심 부인 처소로 가자구나.”

“네? 마마.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까짓 궁녀 하나 손목이 잘린다고 마마와 무슨 상관이랍니까? 그래 봤자 심 부인 처소의 궁녀인데…….”

“사비야.”

은호가 사뭇 엄하게 미간을 구겼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엄하고 화가 묻어 있어 사비가 얼른 어깨를 움츠렸다.

“상관이 없다니. 아직 잘잘못도 가려지지 않았는데 손목부터 잘려야 하겠느냐? 네가 그런 처지였다 생각해 보거라. 그게 어찌 상관없는 일이야.”

“마마…….”

은호가 제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라 사비가 잔뜩 주눅 들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란다.”

“네…… 마마…….”

사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황궁이 그런 곳이라 해도 너와 나도 거기에 물들면 어찌하겠니. 붉은 곳에 있다고 해서 제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버리면 어쩌겠니.”

은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음을 굳게 잡아야 길을 잃지 않는 법이란다.”

황궁은 미로와 같은 곳이라서, 잠시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잠시라도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 길을 잃기 마련이다.

이 미로와도 같고, 이 독이 든 항아리와도 같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그 최후는 비참해질 것을 은호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 황궁에서 비참하게 끝이 난 이들은 거의 전부 길을 잃은 사람들이리라.

길을 벗어나면 안 된다.

마음이 흔들려서도 안 된다.

다만 자리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황궁에서는 승자가 될 수 있다.

은호가 바라는 승자는 다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은호가 생각하는 승자라는 것은, 누구도 행복해진 적이 없다는 이 황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싹트지 못하도록 그 싹만 보여도 잡아먹고 만다는 이 두려운 황궁에서 기어이 행복해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기어이 다정함을 찾아 이어 가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칼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 수 있다.

힘은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

간교한 계책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권위가, 그렇게 해서 받는 경외가,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모든 것들이 정말 행복을 가져다줄까?

아닐 것이다.

선황을 보라.

선황은 의심투성이에 욕심이 하늘을 찔렀었다.

그 욕심을 은호는 바로 앞에서 경험했었다.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심하던 그것까지도 경험했었다.

칼과 힘으로 모든 것을 누려 온 선황의 마지막이 어떠했던가.

자신의 칼에 찔리고, 화비의 칼에 찔리고, 그리고 아들에게 버림받아 차가운 무덤에 묻혔다.

누구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강인사에 함께 있던 선황의 후궁들 중에서 누구도 죽은 선황을 위해 우는 사람도, 선황을 기억하며 좋은 지아비였다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다못해 선황의 자식들 중에서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있던가.

그의 신하였던 이들 중에서 그를 기리는 자가 있는가.

없다.

살아서는 그렇게 막강한 권세를 누린 선황이지만 그가 죽은 지금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은호는 그런 삶은 싫다.

그리고 하진이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은호는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부친의 보호 아래에서 은호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건 은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재산이다.

그러나 하진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진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진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하진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걸 은호는 안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행복에 가치를 둔다면, 자신이 하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칼을 내려놓는 것이다.

독을, 내려놓는 것이다.

독으로 독을 이긴다는 말을 은호도 알고 있다.

칼로 칼을 이기고 힘으로 힘을 이기고.

하지만 영원히 칼을 들 수는 없고, 영원히 독을 피할 수는 없다.

칼보다 강하고, 독보다 강한 것은, 그리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은 마음이다.

은호는 그것을 믿는다.

황궁에 물들지 않는 것이, 황궁에서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라는 걸 믿는다.

황궁을 뒤덮고 있는 저 어둠이 걷히고, 마침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이 올 것이라는 걸 믿는다.

“심 부인 처소로 가자.”

아직 그 궁녀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아직은 그 손에서 피가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 준다면, 그 궁녀는 이 황궁에서 은호 자신이 구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

*

“아악! 제발! 제발! 아직 부인께 드리지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부인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가 부인이 들으시면 좋아하실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견아가 비명을 질러 대며 울었다.

궁녀들이 차가운 눈으로 견아를 흘겨보며 그 손목을 기어이 형틀 위에 올려놓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양쪽 손목을 밧줄로 묶고 형틀에 고정시킨 다음 궁녀들이 손목을 자를 작두를 올렸다.

이 작두의 칼날 한 번이면 손목이 싹둑 잘려 나갈 것이다.

“아아악! 악! 제발! 제발!”

제 손목 위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작두의 칼날을 본 견아가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연비에 대해 다 말하겠습니다! 연비가 품고 있는 아이가 누구 아인지 저는 압니다! 안 다구요! 제발 심 부인을 만나게…… 읍!”

그때 궁녀 한 명이 견아의 입 안으로 헝겊을 밀어 넣었다.

“읍! 읍!”

발을 버둥거리며 견아가 고개를 저었다.

실핏줄이 터진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싸늘한 표정으로 궁녀가 작두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사나운 호통 소리에 궁녀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작두 형틀이 놓인 뜰에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연환궁의 책임 상궁이었다.

연환궁의 모든 것을 일일이 관리하는 상궁이 들어서자 궁녀들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숨을 죽였다.

“누구의 명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누가 감히 사사로이 궁녀의 손목을 자르라 시킨 것이냐!”

“마마님, 그것이…….”

궁녀들이 진땀을 흘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폐하의 명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그것이…….”

“아니면 심 부인이 이리 시킨 것이냐?”

아직 첩지도 받지 못한 후궁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전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궁녀들이 저마다 눈치만 볼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마마님!”

책임 상궁 가연의 뒤에 서 있는 어린 궁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저, 저기……!”

어린 궁녀가 가리키는 손끝에 형틀에 손이 묶인 견아가 있었다.

정확히는 견아의 치맛단이었다.

그녀의 치맛단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혈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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