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폐, 폐하. 그것은 그저 아랫것들이 떠들어 대는 헛소문에 불과한 것이라…….”
“아랫것들이?”
“네, 폐하. 원래 아랫것들이란 상전에 대해 음험한 험담을 하며 헐뜯는 것을 즐겨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렇게 떠들어 대는 것들의 말이 귀하신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들이 그리 방자하게 떠들어 대는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그래서, 너는 그 방자한 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감히 폐하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말을 한 것들은 혀를 뽑고 인두로 입술을 지져 다시는 그런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옳은 줄 아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만 벗어나면 된다.
‘어떤 것들이 입을 함부로 놀려서…….’
황제가 선황의 여자를 물려받았다는 말은 은송이 제 처소의 궁녀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정확히는
‘선황의 여자였던 주제에 지금의 황제까지도 넘보는 웃기는 년’
이라며 연비에 대해 험담한 말이었다.
‘선황 덕분에 유산처럼 물려졌으면 강인사에서 늙어 죽지 않는 것을 감지덕지로 알고 바짝 몸을 낮출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
라고 궁녀들에게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그 입 가벼운 것들이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떠들어 댔길래 그 말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일까.
‘찢어 죽일 것들…….’
이 상황만 모면하고 나면 당장 궁녀들을 소집해서 전부 물고를 낼 생각으로 은송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물론 입방정을 떤 당사자는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황제의 옷자락에 묻은 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혀를 뽑고 입술을 지진다…….”
황제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은송은 지금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서운 적이 없다.
황제가 사납고 거친 성정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오싹할 정도로 무서울 줄은 몰랐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자신이 황제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그저 자신의 미모에 사로잡힐 쉬운 사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을까.
하지만 연비가 한 것을 자신이 못 할 까닭이 무엇인가.
“아랫것들이야 혀를 뽑고 입술을 지지면 된다 하지만, 그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한 윗전에게는 어떤 벌을 내려야겠느냐.”
자신을 지목하고 있다.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한 윗전.
“아랫것들의 입을 어찌 전부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너그러이 봐줘야 한다?”
“폐하. 황궁은 넓고 이 넓디넓은 황궁에서 천한 아랫것들이 얼마나 윗전들을 헐뜯어 대겠습니까. 그것이 귀에만 들어오지 않을 뿐 그 수많은 험담들을 누가 어찌 전부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도 이 황궁 안에서 나를 헐뜯고 있는 놈들이 있는데 그것들도 단속하지 못하는 내가 누구를 벌주느냐는 그런 말이냐?”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은송의 뒷목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대답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은송은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겼었다.
똑똑하고 잔꾀가 많고 처세술이 뛰어나다 스스로 자만하고 있었다.
멍청한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사람의 생각도 읽을 줄 알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현란한 말솜씨와 아름다운 미모로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늘 자신만만했었다.
심창도 자신의 당당함과 똑똑함을 겸비한 미모를 마음에 들어 했었고 자신이라면 황제를 사로잡아 황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양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뭘까.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사나운 맹수 앞에 내던져진 먹잇감이 된 이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폐하, 저는 다만…… 그만큼 아랫것들의 입단속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황궁 안에서 나를 헐뜯는 놈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군. 계속 모르고 있었다면 모를까, 안 이상에는 계속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뭐지? 대체 왜 저런 말을…….’
은송은 황제가 저런 말을 하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냥 내 처소의 궁녀들을 벌주겠다고 내가 먼저 선수를 칠까? 그 참에 그 견아라는 년도 같이 죽여 버리고…… 아니, 아니야. 아직 그년 뱃속의 아이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긴, 그 아비가 누군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참에 그년도 같이 죽여 버리면 오히려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은송이 결심했다.
“폐하. 제가 아랫것들을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책임을 지고 그것들의…….”
“금환궁에 와 본 적이 있느냐?”
“네?”
놀란 은송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금환궁.
후궁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곳.
황후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
그마저도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다.
“금환궁 구경을 하고 싶지 않느냐?”
황제가 웃었다.
웃음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지금 은송은 그 차가운 미소보다는 그의 말이 더 신경 쓰였다.
금환궁 구경.
그건 자신을 금환궁에 데려가 주겠다는 걸까.
왜? 왜 이런 상황에서?
“폐하, 신첩은…….”
“차비를 하고 있거라. 곧 태감을 보낼 것이니 금환궁에서 보자.”
그 말을 한 하진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하진이 밖으로 나가자 은송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갑자기 전신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압력이 사라지며 몸의 기운이 플린 것이다.
“부인!”
궁녀들이 달려와 은송을 부축해서 침상에 눕혔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다.
“폐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곧 태감을 보내실 것이니 단장부터 하자.”
금환궁으로의 초대.
이건 어떤 후궁도 받지 못한 것이다.
누가 있어서 금환궁으로 초대받아 봤겠는가.
그런데 황제가 자신을 초대했다.
‘역시…… 내 언변과 미모에 반하신 거야…….’
자신이 황제의 질문에 잘 대처한 것이 틀림없다.
당황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한 것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리라.
그저 얼굴만 예쁘고 멍청한 후궁들이나 얼굴은 예쁜데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늘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쓰러지는 그런 병신처럼 약한 것들과 자신은 다르다.
자신에게는 오만한 당당함이 있다.
자신에게는 뛰어난 머리도 있다.
자신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장사꾼의 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분명 엄청나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황제가 알아봐 준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정치에는 동반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황제는 멍청하지 않다.
그저 인형처럼 얼굴만 고운 황후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황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멍청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황후보다는 배짱도 있고, 똑똑하고, 정치적인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는 황후를 원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거라면 자신이 딱 적임이다.
“금환궁이라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은송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금환궁…… 금환궁이라니…….”
아직 승은을 입지 못한 것이 뭐가 대수겠는가.
황제가 직접 금환궁으로 자신을 부른 이상, 이것보다 더한 자랑거리는 없다.
그래, 연비는 실컷 황제에게 다리나 벌려 주라고 그러자.
다리를 벌리는 여자와 머리를 쓸 줄 아는 여자는 다르다.
어떻게 격이 똑같겠는가.
연비가 다리만 벌릴 줄 안다면 자신은 머리를 쓸 줄 안다.
황제도 그걸 알아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금환궁으로 자신을 부른 이상 승은을 내리지 않을 리가 없다.
‘어쩌면 금환궁의 현무전에서 승은을 입게 될지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현무전에서 승은을 입다니.
황제의 침전에서 황후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자신이 황궁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어쩌면 좋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궁녀들에게 몸단장을 맡기던 은송이 문득 견아를 기억해 냈다.
“그 임신한 년을 끌고 와라.”
그래.
기쁜 일은 기쁜 일이고, 처리해야 할 것은 처리해야 한다.
‘그년 뱃속의 아비는 분명 황궁의 병사일 거야. 폐하의 씨는 아닐 것이고, 설령 폐하의 씨라도 상관없지. 아니,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폐하의 씨면 더 문제가 되니까 아예 죽여 없애 버려야지.’
은송이 결정을 내렸다.
뱃속 아이의 아비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누구와 배를 맞대고 아이를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반드시 화근이 된다.
그러니까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
아이도, 궁녀도.
*
“꺄악!”
끌려온 견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초췌한 모습으로 견아가 은송의 발 아래로 기어갔다.
찬물 세례를 맞고 채찍질까지 당한 후에 갇혀 있었던 견아는 다 죽어 가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 목숨만 살려 주세요…….”
그렇게 맞고도 유산을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끝까지 네년이 배를 맞춘 놈이 누군지 불지 않으면 너를 죽일 수밖에.”
몸단장을 하는 채로 견아를 흘깃 노려보며 은송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차피 죽일 생각이다.
다만 어떻게 죽일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어찌 죽일까…….’
“오늘 아침에 내 장신구 중에서 금비녀가 사라졌더구나.”
핑계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네 처소 네 옷더미에서 나왔다지?”
이제 잠시 후면 다른 궁녀들이 견아의 처소에 들어가 그 옷더미에 금비녀 하나를 쑤셔 넣으면, 그게 증거가 된다.
원래 죄와 증거는 조작하면 그만이다.
그런 수법으로 많은 궁녀들이, 후궁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 이곳 연환궁 아니던가.
“도둑질은 손목을 자르는 것이 황궁의 법도. 손목을 자르고 황궁에서 내쫓는 것이 법도라고 알고 있으니, 법도대로 가야지. 당장 저년의 양쪽 손목을 자르고 황궁 밖으로 내쫓을 준비를 하거라. 내명부의 감찰 상궁에게 저년의 죄를 알려 주고 손목은 여기서 잘랐으니 내쫓는 것은 감찰 상궁이 알아서 하라고 이르는 것도 잊지 말고.”
손목이 잘린 궁녀가, 그것도 임신한 채로 황궁 밖으로 쫓겨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황궁 밖으로 내쫓기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당장 손목부터 자르거라.”
은송이 일어섰다.
“내가 돌아왔을 때 저년의 잘린 손목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너희들의 손목도 달아날 줄 알고 있거라.”
문밖에 태감이 이르렀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금환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태감이 온 것이다.
우아하게 처소를 나가려는 은송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견아였다.
“부인! 부인께 아뢸 말이 있습니다!”
“놓지 못하겠느냐?”
“부인! 부인께서 들으시면 반드시…….”
“더러운 손으로 누굴 만져?!”
은송이 견아를 발로 걷어찼다.
그 발에 걷어차인 견아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은송이 밖으로 나갔다.
“부인! 부인!”
사라지는 은송을 향해 견아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자신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직 자신에게는 마지막 무기가 있다.
연비에 대한 것.
연비와 황제에 대한 비밀을 자신은 알고 있다.
“부인―!”
그때 궁녀들이 견아의 손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그녀들의 손에는 서늘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