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이른 아침, 심 부인 처소의 궁녀들이 새벽부터 달인 약이 담긴 그릇을 받쳐 들고 연비전으로 들어왔다.
“심 부인께서 연비마마께 올리는 탕약이옵니다.”
심부인 처소의 궁녀가 올린 탕약 그릇을 건네받은 사비가
‘흥’
하고 새촘하게 돌아섰다.
“저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탕약을 줬으면 그만이지 뭐가 또 할 말이 있는지 물러가지도 않는 궁녀를 보고 사비가 눈을 흘겼다.
생각 같아서는 손에 들고 있는 탕약을 궁녀의 얼굴에 부어 버리고 싶은 사비였다.
은호가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당부를 해서 참고 있는 것이지 자신은 은호처럼 착하지 않다.
은호에게 못되게 구는 것들은 자기 성질대로 할라치면 전부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지만 자신은 어쨌든 은호의 몸종이고 지금은 궁녀로 입궁했다.
“심 부인께서 연비마마가 탕약을 드시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라 하셔서…….”
“뭐야? 마마를 감시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마마께서 약을 드시지 않고 버리실까 봐? 어머나, 누가 알면 사약을 내리는 줄 알겠네. 우리 마마가 무슨 죄인이라 사약을 받고 그걸 마시지 않고 버릴까 봐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거 좀 무례한 거 아닌가?”
사비가 호들갑을 떨었다.
안쪽에서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심 부인께서는 그저 연비마마께 약이 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드신 후에 마마께서 불편해하지 않으시는지 그것도 알고 싶으신…….”
“그게 감시하는 게 아니고 뭐예요? 아니, 약이 당연히 쓰지, 그러면 단 약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다고? 그리고 첩지도 받지 못한 아랫사람이 첩지를 받은 윗사람에게 약을 올리면 윗사람이 그 성의를 받아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어디서 시건방지게 확인을 해, 확인을? 왜? 안 마시고 버리면 우리 마마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그것이 아니오라…….”
심 부인 처소의 궁녀가 변명할 말을 찾아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고 미간을 퍽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기분이 워낙 나쁜 것이다.
자신은 황궁에서 팔 년째 궁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엊그제 갓 입궁한 풋내기 따위가 지금 제게 눈을 부라리며 성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궁녀 사이에서도 위계질서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황궁의 법도도 모르는 저 하룻강아지 같은 것이 지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지가 연비의 사가에서 온 몸종 출신의 궁녀면 단가?
그러면 질서를 무시해도 되는 건가?
탕약을 마시는 걸 보고 간다는데 그게 뭐가 대수라고 눈까지 부라려 가며 저런 위세를 떤단 말인가.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심하긴 뭐가 심해? 딱 봐도 뻔히 알겠는데. 아닌 말로 우리 마마가 이 약을 안 드시면 그땐 어쩔건대? 우리 마마가 이 약을 굳이 드셔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이 약이 아니더라도 폐하께서 온갖 좋은 것을 우리 마마께 죄다 내려 주시는데 고작 이런 약 따위. 우리 마마가 착하신 탓에 심 부인의 낯을 봐서 일부러 받아 주시는 것도 모르고 뭐? 확인을 해? 누가 알면 심 부인이 우리 마마의 윗 상전인 줄 알겠네. 아직 승은도 못 받은 주제에.”
승은도 못 받은 주제에.
그 말에 궁녀의 이성이 끊어졌다.
“이년이!”
발끈한 궁녀가 사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연비마마는 선황 폐하의 승은도 받고 황제 폐하의 승은도 받았으니 퍽이나 좋겠다! 두 황제의 승은을 골고루 받았으니 승은을 받지 못한 우리 심 부인이 만만하게 보인다더냐?!”
“이게 터진 입이라고 말을……!”
궁녀의 입에서 은호를 향한 막말이 나오자 사비도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지금 은호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당한 것이다.
“터진 입? 네까짓 게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알기나 해? 폐하께서 옥좌를 물려받으실 때 연비마마도 물려받으신 거라고 다들 말하고 있어. 효심이 지극하셔서 선황이 쓰던 여자까지 물려받으셨다고!”
“이년이 정말!”
사비가 들고 있던 탕약 그릇을 궁녀의 얼굴에 집어 던지려고 할 때였다.
탁.
“아까운 약을 쏟아서 무엇 하려고.”
탕약 그릇을 든 사비의 손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하진이었다.
“폐, 폐하…….”
손목을 잡힌 사비가 당황해서 뺨을 붉혔다.
사비보다 더 혼이 나가게 놀란 것은 심 부인 처소의 궁녀였다.
“폐, 폐…….”
궁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안색이 된 것은 아직 연비전에 황제가 머무르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연비전의 밖에는 황제가 행차할 때면 늘 따라다니던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곁을 항상 지키는 호위도 보이지 않았던 탓에 궁녀는 황제가 아침 일찍 돌아간 것이라 여겼다.
‘저, 전부 다 들었을까?’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황제가 전부 들었다면 자신의 목은 달아날 거다.
지금 자신은 연비만 조롱한 것이 아니라 황제도 조롱했다.
선황이 쓰던 여자를 물려받았다는 말은 황제에 대한 조롱이다.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연비전에 황제가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연비전의 궁녀들이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고 고자질을 해도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황제가 들었다, 전부.
“폐, 폐…….”
궁녀가 와들와들 떨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궁녀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것이 심창의 딸이 연비에게 바치는 그 탕약이냐?”
하진이 사비의 손에서 탕약 그릇을 빼앗았다.
“써 보이는군. 쓴 것은 딱 질색인데.”
미간을 찡그리며 하진이 단번에 그릇에 든 탕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빈 그릇을 사비의 손에 되돌려줬다.
“쓰군.”
입술에 묻은 약의 흔적을 손가락으로 닦던 하진이 바닥에 주저앉은 궁녀를 쳐다봤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내가 선황 폐하에게서 뭘 물려받았다고?”
그 얼굴에 그려지는 섬뜩한 미소에 궁녀가 지독한 공포로 물들었다.
이 궁녀는 황제의 용안을 보는 것이 지금이 처음이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황제는 눈을 뗄 수 없는 미남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 소문은 틀렸다.
황제는, 지금 궁녀의 눈에 비친 황제는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 미소는 그녀에게 그렇게 비쳐졌다.
*
“부인! 부인!”
상궁이 호들갑을 떨며 뛰어 들어오자 아침 단장을 하고 있던 은송이 눈을 흘겼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탕약을 먹고 그 계집이 죽기라도 한 것이냐?”
물론 탕약을 먹고 연비가 죽었을 리는 없다.
연비에게 보낸 약은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다.
머시고 죽으라고 독약을 보낼 정도로 자신은 어리석지 않다.
“부인! 지금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상궁은 얼굴 가득 감격해 있었다.
드디어 황제가 심 부인 처소로 오고 있는 것이다.
“폐하께서?!”
은송이 놀라 벌떡 일어섰다.
심창에게서 머잖아 황제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할 거라고 약속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하지만 시간이 무엇이 중요한가.
아침에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어쩌면 차를 마시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난밤에 연비가 황제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 단장도 다 못 했는데 이를 어쩌지?”
은송이 얼른 거울을 들여다봤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주 나쁘지도 않다.
‘사향 주머니를 어디에 뒀더라…….’
하필이면 지금은 사향 주머니도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녀에게 사향 주머니를 찾아오라고 하면 그 전에 황제가 이를 것이다.
‘지금은 달거리 전이니까…….’
오늘 만약 승은을 입을 수 있다면 회임을 할 확률은 무척이나 높다.
한 번, 한 번이면 된다.
그때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은송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라고 할 때까지는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다.
그것이 황궁의 법도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고개 숙인 은송의 앞으로 황제가 지나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라.”
반가운 소리에 은송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의자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선물은 잘 받았다.”
“선물……이라니요 폐하?”
선물?
자신이 황제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었나? 없다.
후궁은 함부로 황제에게 물건을 바칠 수 없다.
그런데 무슨 선물을 말하는 걸까?
“쓴 약을 싫어하지만 네가 정성으로 달인 것이라 해서 그 마음을 생각해서 마신 것이다.”
‘설마…….’
설마 황제가 그 탕약을 마신 것일까?
연비에게 보낸 탕약을 황제가 대신 마셨다고 하면…….
‘교활한 것.’
은송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순진한 얼굴을 한 연비가 무척이나 교활한 수를 생각해 낸 것이다.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면서 폐하를 이용하다니. 여우 같은 것.’
제가 바친 약을 먹으면 복중의 아이에게 해가 될 것 같고, 약을 버리면 투기를 한다는 소문이 돌 것이니 그 약을 황제에게 마시게 한 것이 틀림없다.
황제가 마셨다고 하면 아무도 말을 못 할 것이니 말이다.
오히려 황제가 마셨다고 하면 감격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의도가 있던 약이라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기회가 되어 폐하를 모실 수 있다면 차라리 잘된 걸까?’
전화위복이라고 어쩌면 좋은 기회가 온 것일 수도 있다.
“폐하께서 드실 줄 알았더라면 더 귀한 약재를 더하였을 것입니다.”
“사내에게는 우황이 좋다고 하지. 녹용도.”
“제 친정 아비가 폐하를 위해서라고 하면 세상을 전부 뒤져 사내에게 좋은 약재를 찾아 올릴 것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힘이 남아도는데 그 좋은 약을 먹고 힘이 더 좋아지면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까?”
“폐하. 폐하께서는 이 연환궁의 모든 후궁들의 태양과 같은 분이시니 저희들에게 골고루 은총을 내려 주시기 위해서는…….”
“아, 하긴.”
하진이 은송의 말을 끊었다.
하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선황께 물려받은 여자를 위해 써야 하나? 내가 비록 효자는 아니지만 선황께서 물려주신 여자이니 선황을 생각해 더 힘써서 돌봐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호의적은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늘하고, 사나운 웃음이었다.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짐승의 웃음, 흡사 그것과 비슷했다.
“너도 내가 선황께 여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대답을 요구하는 그 물음에 은송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황제의 용포 아랫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붉은 피.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생각하기 싫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