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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61화 (61/108)

61.

촤아악―!

차가운 물이 끼얹어졌다.

“사, 살려 주시옵소서!”

물을 흠뻑 뒤집어쓴 궁녀는 심 부인 처소의 견아였다.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찬물을 뒤집어쓴 견아가 사색이 되어 살려 달라 소리쳤다.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살고 싶으면 그 뱃속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말하라 하지 않더냐!”

심 부인 은송의 얼굴은 서슬이 퍼랬다.

“궁녀의 몸으로 배태한 것이 죄가 되는 것도 몰랐던 것이냐! 말해라! 아비가 누군지!”

임신한 것을 들킨 견아가 서슬 퍼런 은송의 목소리에 바들바들 떨었다.

“어떤 놈과 붙어먹은 것이냐!”

궁녀가 임신한 것은 죄가 된다.

그 뱃속 아이의 아비가 황제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황제의 승은을 입어 잉태한 것이라면 죄가 아니라 봉작을 받고 후궁이 될 수 있는 기회지만 아이의 아비가 황제가 아니라면 그게 누가 됐던 간에 그건 명백한 죄다.

간혹 궁녀들이 황궁의 무사들과 눈이 맞고 배가 맞아 임신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궁의 궁녀들에 한해서였다.

외간 사내를 만날 수 있는 다른 궁의 궁녀들이나 사내와 배가 맞아 임신을 하지 외간 사내를 전혀 만날 길이 없는 연환궁의 궁녀들에게는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연환궁에 후궁들이 입궁하고 궁녀들이 배치된 것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다른 궁에 있을 때 임신을 했을 수도 있었다.

“저년이 어느 궁에 있었다더냐?!”

은송의 목소리에는 뿔이 돋쳐 있었다.

가뜩이나 황제가 연비만 찾아서 화가 나 있던 참이다.

그런 차에 궁녀가 임신을 했다.

물론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 고작해야 병사 나부랭이의 아이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절대로’

라는 일은 세상에 없다.

황제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는 없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황제에게 한 번 정도 승은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잉태한 시기를 봐서는 몇 개월 전이다.

아직 황제가 태자였을 시기다.

황제가 태자였을 때 배가 맞아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궁녀들은 많고 많으며 그 직후에 무수한 일이 있어서 황제가 잠시 잊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황제가 태자 시절에 저 궁녀를 안았고 그래서 임신한 것이라면, 저 뱃속에 있는 것이 황제의 씨라면 문제가 된다.

최초로 황제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저 미운 연비보다 더 빨리 해산을 하게 될 것이 뻔하고,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비나 빈까지도 될 수 있다.

그런 꼴은 절대로 눈 뜨고 보지 못한다.

“여기로 오기 전에 왕자궁에 있던 계집이옵니다.”

“왕자궁? 어느 왕자궁?”

“진원 왕자의 궁에 있던 나인이라고 하옵니다.”

“진원 왕자가 누구냐?”

은송이 처음 듣는 이름에 눈을 흘겼다.

이전의 황궁 사정에 대해 은송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진원 왕자라는 이름도 당연히 처음 들었다.

“선황의 장자로 선대 화비마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 지금은 출궁하였을 것 아니냐.”

“출궁이 아니오라 옹주에서 독살당해 죽으셨습니다.”

“아, 그 독살당했다던 왕자가 진원 왕자더냐?”

서북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친정을 나갈 때 함께 출정한 왕자가 옹주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문은 은송도 들어 알고 있다.

“그 왕자궁의 궁녀였다는 것이지?”

왕자궁의 궁녀.

“그 죽은 왕자라는 자가 폐하와 어떤 관계였다더냐. 우애가 깊어서 폐하의 왕래가 잦았다더냐?”

만약 황제가 태자 시절 그 진원 왕자라는 자의 궁에 자주 출입을 했다면, 그러다가 저 발칙한 궁녀와 배가 맞았다면 저 뱃속 아이의 아비는 황제다.

“그다지 왕래가 없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황궁의 누구나 알고 있듯이 폐하께서는 화비마마와 척을 지고 계셨던 차라…….”

“그래?”

은송의 시선이 다시 묶인 견아를 향했다.

“너와 배가 맞은 사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으면 그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을 줄 알거라.”

그 말에 견아의 얼굴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니 얼른 말하는 것이 좋아.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은송이 손에 채찍을 들었다.

채찍질은 은송이 즐겨 하는 것이다.

채찍으로 누군가를 매질하면 그 우월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누군가를 자신의 발아래에 복종시킨다는 쾌감은 은송을 늘 취하게 만든다.

그래서 권력을 원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손에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짜릿한 황홀함은 없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제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벌레처럼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말하지 않으면 지금부터 혼을 내 줄 거다.”

찬물을 뒤집어쓴 견아를 향해 은송이 채찍을 휘둘렀다.

촤악―!

“아악!”

채찍이 뱀처럼 몸에 휘감기자 견아가 비명을 질렀다.

채찍은 연거푸 견아의 몸을 휘갈겼다.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견아가 일곱 번째 채찍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혼절한 견아를 노려보던 은송이 차갑게 말했다.

“가둬 놓아라. 내일 아침 다시 혼을 낼 것이다.”

궁녀들이 혼절한 견아를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을 보며 은송이 잔인하게 웃었다.

연환궁에서 후궁이 궁녀를 죽이는 것은 내명부의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궁녀는 후궁과 마찬가지로 내명부에 속해 있다.

내명부에 속한 이들을 살리고 죽이는 건 전적으로 태후와 황후의 소관이다.

태후도 황후도 없는 지금은 황제가 직접 관여할 뿐이다.

후궁이 궁녀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만약 후궁전에서 궁녀가 죽는 일이 벌어지면 후궁이 죄를 받게 된다.

아직은 궁녀를 죽일 권한은 없다.

그러나 혼낼 권한은 있다.

혼을 내다가 죽으면? 그때는 병으로 죽은 것처럼 위장을 하며 된다.

감찰 상궁의 눈은 적당히 피하면 그만 아닌가.

지금은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만약 병사 나부랭이의 아이라면 황제에게 고해 처벌을 받게 하면 그만이고, 황제의 아이라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황제가 알기 전에 아이와 궁녀 모두 처리해야 한다.

“폐하께서는 아직 연비전에 계신다 하더냐?”

견아가 끌려 나간 후 은송이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제 수발 상궁을 노려봤다.

“아버님께서는 곧 폐하께서 내 처소에 드신다고 하셨거늘…… 대체 일을 어떻게 하시는 건지…….”

심창은 분명히 빠른 시일 안에 황제가 처소에 들 것이라 말했었다.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어렵게 얻어 낸 약속이니 그 한 번에 황제를 사로잡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황제는 보란 듯이 연비의 처소에만 들고 있다.

“내일은 이곳으로 드실 것이옵니다.”

상궁이 은송의 비위에 맞춰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그것이 은송을 기분 좋게 해 주지는 못했다.

“약은 달였느냐? 내일 아침에 가져갈 약 말이다.”

“네, 부인.”

녹용과 우황을 넣어 달인 약.

보통의 사람에게는 몸을 보하는 약이 되겠지만 임신한 여인이 먹으면 화가 된다고 했다.

우황이 임신한 여인과 뱃속의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건 의원에게 들어 이미 확인했다.

그 멍청한 연비는 거절도 못 하고 그걸 마실 것이다.

마시지 않으면 연비가 투기한다고 소문을 낼 작정이다.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가 깊다고 해도 투기는 엄격히 금하는 것.

그것도 먼저 첩지를 받은 후궁이 첩지를 받지 못한 후궁을 투기한다고 소문이 나면 연비도 처지가 곤란해질 것이다.

*

“으응…….”

혼절했다가 깨어난 견아가 극심한 통증에 몸을 떨었다.

채찍에 맞은 곳이 뼈가 으스러진 것처럼 아팠다.

“흑…….”

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고 싶지 않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아이를 잃고 싶지도 않다.

대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그저 진원 왕자와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진원 왕자가 죽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신분 때문에 왕자비는 되지 못해도 그의 첩실이 되어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죽고, 선황이 죽고 화비가 죽었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친왕 위연이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나서자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위연은 그가 황제에게 말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조금이 언제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조금만 기다리면 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만약 위연이 황제를 설득하지 못하면?

도리어 진실을 알게 된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을까?

아니다.

위연은 자신이 품은 아이가 제 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입을 꾹 다물면 아무도 이 아이가 진원 왕자의 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뱃속에 품은 아이가 진원 왕자의 아이라는 것을 들키는 순간 아이도 죽고 자신도 죽는다.

견아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심 부인에게 들켰다.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심 부인은 저를 죽일 기세다.

이대로라면 반드시 죽는다.

‘죽기 싫어…….’

위연은 지금 자신이 이런 지경에 몰려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위연에게 알릴 방법도 없다.

나중에 위연이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은 이미 시체가 되어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 뻔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지금 견아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살아남는 것.

‘뭘 어찌해야 심 부인이 나를 살려 줄까…….’

지금 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건 황제도 위연도 아닌 심 부인이다.

이 꽉 막힌 연환궁 안에서, 그것도 심 부인 처소에서 그녀의 궁녀인 자신의 목숨 줄은 심 부인이 쥐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비를 말하면 심 부인은 자신을 기어이 죽일 것이다.

‘심 부인이 원하는 것이 뭘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준다면 자신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

심 부인이 원하는 것.

황후가 되는 것?

아니면 정적을 제거하는 것?

심 부인의 정적이라면 당연히 연비다.

연비를 제거할 단서를 제공한다면 심 부인은 자신을 살려 줄까.

‘연비…….’

견아는 연비가 황후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본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다.

위연에게서 들은 것이 있다.

황제와 연비에 대해서 위연이 그도 모르게 흘린 사실이 있다.

그걸 심 부인에게 말하면 자신을 살려 줄까?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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