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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59화 (59/108)

59.

“듣기로는 심창의 딸이 네게 보약을 달여 올렸다고 하던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하진이 꺼낸 말에 은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연환궁에서 일어난 일을 하진이 어떻게 알까 싶다.

“폐하. 연환궁의 일은 연환궁 안에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내 하진이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연환궁의 책임 상궁이 하진의 사람이다.

연환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그녀의 귀에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녀가 아마 하진에게 지체 없이 알렸을 것이다.

이렇게 눈으로 보지 못하는 순간까지 자신은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진이라는 이 사내의 팔 안에서 자신은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사비는 심 부인이 일부러 녹용과 우황을 섞은 약을 달여 올려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고 분을 냈지만 은호가 그 일에 조금도 분내거나 걱정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기 전에 이렇게 벌써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지켜 주려는 이가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그 일은 하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하진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할지는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분명 약을 올린 심 부인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진의 성품은 은호 자신에게만 다정하다.

하진은 제 사람에게만 호의를 보일 뿐, 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그저 엄하고 무서운 황제이다.

분명히 심 부인에게도 가혹하게 할 것이 틀림없다.

물론 하진이 심 부인에게 가혹하게 되갚아 주면 그건 어떤 의미로 통쾌할 수 있다.

심 부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일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고 하진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마다 하진이 자신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처리해 준다면 하진이라는 이름에는 악명이 쌓일 것이고 자신은 황제의 뒤에 숨은 비겁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은 싫다.

하진을 위해서 용감해지겠다 결심했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진에게 떠넘겨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오명을 더 쌓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내버려 두라? 어째서지?”

하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버려 둬 달라는 은호의 청에 관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제가 알아서 잘 처신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다?”

하진의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이 사내가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을 은호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견하구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그래, 심창의 딸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품계가 네가 위니 윗전을 능멸한 죄를 물어 곤장을 치겠느냐 아니면 직접 채찍이라도 들겠느냐.”

“폐하.”

은호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전 연환궁에서 그런 일들이 곧잘 벌어졌다는 뜻이다.

[황궁은 말입니다, 마마. 독이 가득한 항아리와 같습니다.]

강인사에 있을 때 강비는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그 독이 너무 지독해서 더 강한 독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황궁이랍니다. 그래서 황궁에서는 누구나 독기를 품기 마련이지요. 그중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가 독을 품은 자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도 예외랄 것 없이 말입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섬뜩한 독을 품고 있지요. 그래서 황궁에서는 절대로 속마음을 내비치지 말아야 하고, 황궁에서는 누구라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슬프게도.]

슬프게도.

강비는 그 말을 사용했었다.

[슬프게도.]

그 말에는 은호도 동감한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 독을 품어야 하다니.

살아남기 위해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다니.

그런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 사내 하진은 그렇게 슬프게 살아온 사내다.

하진이라는 이 사내의 삶을 보면 서럽고, 아프고, 슬펐던 삶이다.

이 사내의 화려하고 위엄 있는 겉모습만 보면 누가 그리 생각할까만은, 이 사내의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 무척이나 많이 아팠을 것이다.

[내 딸 은호에게.]

부친이 사직 상소를 내고 낙향하고 요양을 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던 그날, 은호는 부친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나중에 읽어 보라며 준 그 편지를 은호는 벌써 열 번도 더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종이에 눈물이 떨어져 얼룩이 졌지만, 그래도 또 읽었다.

그건, 황궁의 이야기였고, 부친의 이야기였으며, 하진의 이야기였다.

하진이 절대로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을 진실.

황궁의 누구도 알지 못할 진실.

어쩌면 가해자였을지 모르는 부친이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그 진실.

부친은 그 편지를 쓰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편지를 읽는 딸이 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 편지는 부친의 치부를 드러내는 편지였다.

누구나 소중한 사람에게는 치부를 감추고 싶은 법이다.

자신의 가장 추하고 더러운 부분은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부친은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처럼 모든 진실을 그 편지에 써 놓았다.

은호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부친의 악행, 부친이 저지른 수많은 일들, 그리고 거기에 희생된 하진의 이야기까지.

그것을 알고 나니 하진이라는 이 사내가 더없이 아프게만 보였다.

이 사내가 가시가 돋친 것은 아팠기 때문이리라.

아파서, 상처를 받아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만들어 내고 이빨을 갈고 발톱을 내미는 법을 배웠던 것이리라.

그렇게 해서 이 사내는 독으로 가득 찬 이 황궁에서 살아남았지만, 이 사내에게 남은 것 역시 독뿐이리라.

독으로 가득 찬 사내.

거기에 자신이 독을 더할 수는 없다.

이 황궁에 만연한 독에 자신도 독을 더할 수는 없다.

독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이 사내는 숨을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사내는 지금까지도 황궁의 독에 질식하며 살아왔는데 자신의 곁에서도 질식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적어도 자신은 이 사내에게 맑은 바람이고 싶다.

황궁 전체를 바꾸는 크고 청명한 바람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내의 곁만이라도, 이 사내의 숨만이라도 트이게 하는 아주 작은 바람구멍이고 싶다.

제 품에서 이 사내가 조금은 크게 숨을 쉬고, 조금은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은호가 바라는 것이다.

자신은 힘이 없어서 무엇 하나 이 사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독으로 가득한 이 황궁에서 적어도 숨결은 되어 줄 수 있다.

그런 자신이 심 부인을 독으로 대하면 자신 역시 이 황궁을 물들이고 있는 독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그것이 은호가 심 부인을 악으로 갚을 수 없는 이유다.

“좋게 생각할 거예요.”

“좋게?”

“저를 염려해서 심 부인이 귀한 약재를 섞어 약을 달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회임한 여인에게 우황이 나쁜 것이라는 건 어의가 아닌 나도 아는데, 그걸 받아먹겠다는 것이냐?”

“심 부인이 제가 회임한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영악한 것들은 눈치도 빠른 법이지.”

지금 하진은 틈만 노리고 있다.

은호가 조금만 무서워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 심 부인이라는 것을 요절을 낼 틈.

하진은 심 부인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심창의 딸일 뿐이다.

영악하고 가증한 욕심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다 살고자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리 만드신 분이 폐하이신데 어찌 심 부인을 탓하십니까. 살아남으려 그러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 탓이다? 이젠 내 탓으로 모는 것이냐? 그러면 내가 심창의 딸을 품에 안았어야 한다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심 부인을 품에 안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은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보며 하진이 짓궂게 웃었다.

마음이 너그러운 것처럼 굴다가도 다른 여인을 안는다는 말에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자신이 그녀에게 그런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것이 여간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착하고 순한 이 여자가 표정을 바꿀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다른 여자를 안는다는 말만 입에 담아도 표정이 바뀔 정도로 이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고, 또 자신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욕심도 없고, 야망은 더더욱 없고 정치적인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자신만은 탐내고,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이 여자의 단 하나의 욕심이 자신이라는 것보다 더 지독한 희열이 있을까.

슬슬 골려 주고 싶어졌다.

아니, 조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확인하고 기분 좋아지고 싶어졌다.

“내 탓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군. 오늘 밤에는 심창의 딸의 처소로 가서 심창의 딸을 안아 주어야 다시는 네게 투기를 부리지 않겠구나.”

침상에 느긋하게 누워 있던 하진이 몸을 일으키려는 낌새를 보이자 은호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이건 또 무슨 앙큼한 짓일까?”

은호가 먼저 이렇게 품 안으로 안겨 든 것은 처음이다.

“가지 마시어요.”

가슴에 얼굴을 푹 파묻고 가지 말라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은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이 눈매를 휘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다.

은호가 제게 가지 말라고 사정하는 날도 온다.

지금이라도 당장 은호를 금환궁으로 데려가고 싶다.

은환궁도 아닌 금환궁, 현무전으로 데려가 그곳에 가둬 두고 밤낮으로 은호만 보고 살고 싶다.

물론 그러면 무능한 황제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경국지색인데.

경국지색에 자신의 아이를 품은 여인이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는데.

“그래서, 약은 어찌할 생각이냐?”

대답 여하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말투를 풍기자 은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분께 드릴 것입니다.”

“응?”

“폐하께서 매일 저를 찾으시니 낮에는 정사를 돌보시고 밤에는 저를 돌보시느라 폐하의 옥체가 상하는 것이 무척이나 염려가 되지만 저는 친정에서 챙겨 줄 이도 없어 폐하께 드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지라, 때마침 심 부인이 저를 위하여 귀한 약을 지어 올렸으니 그 약을 제가 먹는 것보다는 폐하께 드려 폐하의 옥체를 먼저 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심 부인도 기뻐하겠지요. 심 부인이 올린 약을 폐하께서 드시는 것이니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슴에 폭 안긴 채로 새가 지저귀듯 속삭이는 은호를 바라보던 하진이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는 언제 이렇게 똑똑해진 것일까.

언제 이렇게 귀엽게 영악해진 것일까.

악하지 않게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아는 여자가 되었을까.

점점 더 빠져들 수밖에 없게, 이렇게, 사랑스럽게.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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