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57화 (57/108)

57.

“마마!”

“사비야!”

사비를 보는 순간 은호가 체통도 잊고 달려 나가 사비를 얼싸안았다.

사비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두 달도 채 되기 전이지만 마치 1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끌어안은 은호가 사비를 안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마, 그만 놓아주셔요. 주위에서 보고 흉을 볼 겁니다.”

사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은호는 계속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다.

*

“안 그래도 주인 어르신께서 먼 길 떠나실 준비를 하시면서 마마를 혼자 두고 가시는 것을 못내 마음 걸려 하셨어요.”

“아버님은 어떠하시니?”

며칠 전에 주이염을 만났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친은 얼굴이 앙상하게 여위어 있었다.

부친은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이고, 쉼 없이 달려와서 그런 것이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게 은호의 짐작이다.

부친은 병이 든 것이 틀림없다.

병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이 걱정을 할 것이 분명하니 자신에게는 숨긴 것이다.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은호는 눈치가 없지 않다.

부친의 병은 자신이 집을 떠나온 동안 부친의 곁을 지켰을 사비가 더 잘 알 것이다.

“주인 어르신은…….”

사비가 말을 망설였다.

말을 해도 좋을지 어떻지 몰라 갈등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대체 얼마나 편찮으신 거니?”

“어르신께서 마마께는 절대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비야.”

은호가 한 번 더 재촉하자 그제야 사비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르신께서 각혈하시는 일이 종종 있으셨어요.”

“각혈? 피를 토하셨다는 것이니?”

각혈했다는 말에 은호의 얼굴이 굳었다.

피를 토했다는 것은 중한 병에 걸렸다는 뜻이다.

“식사를 잘 못 드시고, 밤에 주무시는 것도 괴로워 보이셨어요. 밤중에 계속 기침을 하시고…….”

“의원은? 의원은 대체 뭘 하고?”

“의원이 다녀갔지만 별 차도도 없으시고, 이제는 의원도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병이 그리 위중하신데 의원을 오지 말라고 하시다니…….”

“의원은 더는 부르지 않고 계신데 최근에 손님이 자주 찾아오셔서 병을 봐주고 계시긴 합니다.”

“손님?”

“네,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어르신을 찾아오셔서 맥도 짚어 보시고 어르신의 환후에 대해 묻기도 하시고, 약도 놓고 가시는데 하는 행동이 꼭 의원 같긴 하지만 또 의원이 아닌 것도 같고,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마마.”

“의원이 아닌데 의원 같기도 하다고?”

부친의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생각을 해 보다가도, 자신이 부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은호가 살짝 좌절했다.

부친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부친이 어떤 이들과 교류를 해 왔는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것은 알 필요가 없다고 부친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었지만, 그럴지라도 자신은 부친의 일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

이제 와서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였더라면 부친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알아차리고 다른 방도를 찾아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마마. 요양을 가시는 곳은 정말 공기도 좋고 물도 맑은 곳이라고 했어요. 그곳에 가시면 분명 건강해지실 거예요.”

“그렇겠지. 아니, 그래야겠지.”

지금에 이르러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은호는 잘 안다.

만약 의원이 손을 쓸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의원을 오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친은 현명한 이다.

자신보다 더 깊게 생각하고 더 옳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은호가 믿었다.

“건강해지셔서 돌아오시겠지. 그래야…….”

그래야, 자신이 낳을 아이도 안아 보시겠지.

그 말은 은호가 속으로 삼켰다.

자신이 부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부친이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날, 이 자리에서 변함없이 의젓하게 있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을 부친에게 보여 주는 것.

그것 외에는 없다.

“그건 그렇고 마마. 폐하께서는 잘해 주세요? 후궁은 무척이나 힘든 것이라고 하던데…… 후궁들끼리 음식에 독을 타서 먹이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인형을 가지고 저주도 하고…….”

“사비야.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다니는 것이니?”

사비의 다소 엉뚱한 말에 은호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아니, 마마. 정말이라니까요. 보약이라고 들여보냈는데 그 안에 맛도 안 나고 나중에 흔적도 남지 않는 독을 타서 보낸다고 해요. 그렇게 몇 달 동안 조금씩 죽어 가게요. 그리고 미워하는 후궁의 머리카락을 몰래 가져다가 인형을 만들어 그 인형에 바늘을 찔러 저주해서 죽이기도 하구요. 낮에 처소를 비웠을 때 몰래 들어와서 베개 아래에 저주 부적을 숨겨 놓고 가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일은 없어.”

“그건 마마가 모르셔서 그래요. 우리 마마 큰일 나시겠네. 앞으로는 제가 마마 곁에 꼭 붙어서 마마를 지켜 드릴게요.”

주먹을 꽉 쥐고 다짐하는 사비를 보며 은호가 웃고 있을 때였다.

“마마, 심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연비전의 상궁이 들어와 아뢰었다.

연환궁에 들어온 후 다른 후궁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달 정도는 누구와도 만나지 마라.]

하진이 했던 당부를 은호가 떠올렸다.

“마마, 심 부인이라면 우복야 심창의 딸이 아닙니까? 마마를 엄청나게 싫어할 텐데 왜 찾아왔을까요?”

사비가 얼른 눈을 흘겼다.

입궁하기 전에 이미 연환궁의 후궁들에 대해서 전부 공부(?)를 하고 들어온 사비였다.

어떻게든 은호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연환궁에 입궁한 후궁들의 집안에 대해 나름 조사를 한 것이다.

“우복야의 딸?”

“네, 마마. 우복야 심창이라는 자는 주인 어르신의 정적 같은 자인데 엄청나게 고약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 고약한 자의 딸이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마마를 찾아왔을까요? 그년이 뭐라고 말하던 마마는 대꾸도 하지 마세요. 분명 마마께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것이 얄미워서 말꼬리를 잡고 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그런 년들은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물러가라고 하면 또 문전 박대 당했다고 난리를 칠 것이니…….”

“사비야.”

사비가 하는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 은호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네 말대로 조심할 테니 너도 날 도와주렴.”

이렇게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사비가 있어서 은호는 유난히 마음이 편했다.

물론 혼자였다 하더라도 이제 더는 누군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일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의연하게 있기로 부친과 약속했다.

그리고 다시 입궁할 때부터 용기를 내기로 결심을 했다.

그 결심과 각오를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은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하진이, 그리고 부친이 영향을 받고, 무엇보다 자신의 안에는 하진의 아이가 있다.

이 아이를 지키는 것 역시 자신에게 달렸다.

이제는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서 용감해져야 하는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보호만 받아 왔지만 이제는 보호를 해야 한다.

“심 부인을 안으로 모시어라.”

상궁에 그렇게 말한 은호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바라봤다.

*

심 부인 은송은 깜짝 놀랄 만한 미인이었다.

은호가 난꽃 같은 미인이라면 심 부인은 작약 같은 미인이었다.

같은 여인이 봐도

‘곱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미모를 가진 심 부인은 은호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해 왔다.

“하루라도 빨리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괜히 구설수에 오를까 봐 조심을 하였습니다. 괜히 연비마마께 아첨하려 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저뿐만 아니라 마마도 곤란하실까 하여서요.”

심 부인 은송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품계 상으로는 은호가 심 부인보다 위다.

은호는 첩지와 봉호를 받았고 심 부인은 아직 첩지를 받지 못했다.

후궁들의 품계와 서열은 엄격한 것이라 비와 빈, 그리고 부인 간의 간격은 분명했다.

심 부인이 첩지를 받고 비가 되기 전에는 은호의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자주 찾아오세요. 그렇잖아도 다른 분들과 자주 차라도 마시고 싶었는데 심 부인께서 먼저 찾아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마마.”

심 부인이 괜한 아부의 소리를 했다.

“폐하께서 마마의 처소만 찾는다고 들었을 때부터 무척이나 고운 분일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정말 아름다우셔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칭찬의 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마마께서 폐하의 총애를 독점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가 될 정도입니다. 이리 고운 마마께서 계시니 폐하께서 저나 다른 후궁들에게 눈길이나 주시겠습니까?”

심 부인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까지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은호도 알아차렸다.

“마마께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작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심 부인이 손짓을 하자 심 부인 처소의 상궁이 두 손에 받쳐 든 선물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 선물을 여는 것을 사비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괜히 독이나 저주를 건 물건일까 미리 경계를 하는 것이다.

보자기를 풀자 나온 것은 약재였다.

“약?”

은호가 심 부인을 쳐다봤다.

“마마. 녹용이옵니다. 제 사가에서 들여보낸 것인데 최상품의 녹용이라 이 정도의 녹용은 아마 황궁 내탕고에도 없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걸 내게 왜…….”

“폐하께서 매일 밤 마마의 처소를 찾으시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 분명한데 폐하를 모시려면 기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제가 작은 성의로 마마께 올리는 것이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녹용…….”

은호가 제 앞에 내밀어진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심 부인은 나쁜 의도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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