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체기가 있어서 어의가 다녀갔다더니, 오늘 또 어의가 들락거렸다고?”
심 부인 은송이 눈매를 찡그렸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게 걱정이라 또 연비 처소에 드셨다는 것이냐?”
지금 막 연비전을 훔쳐보고 온 상궁의 말에 은송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졌다.
지금 연환궁의 후궁들의 시선은 전부 연비전을 향해 있다.
후궁들 중 처음으로 황제를 모신 후궁일 뿐만 아니라 첫 합궁 후에 연비의 봉호를 받았을뿐더러 그날 이후 황제가 매일 밤 연비전만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정무를 보던 도중에도 가끔 연비전에 들러 차를 마시고 간다 했다.
가뜩이나 연비는 모든 후궁들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동묘의 소문난 미인에 승상의 딸, 선황의 황후. 다시 후궁이 된 여인.
주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연화궁 궁녀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
“네.”
“무슨 소문이냐?”
자신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면서 아무 관련도 없는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은송이 궁녀를 흘겨봤다.
지금 은송은 모든 것이 초조했다.
입궁하기 전까지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것이 어긋나고 있었다.
자신의 미모로 황제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빗나갔다.
처음은 양보해도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 생각했지만 그 역시 빗나갔다.
게다가 오늘 낮에 심창이 보낸 답신을 받았다.
황제가 자신의 처소를 찾게 해 달라고 심창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대한 답신을 받았지만 답신의 내용은 차가웠다.
애초에 심창과 은송 자신은 피가 이어진 친부녀 사이가 아니다.
서로의 목적에 의해 손을 잡았을 뿐이다.
[사나흘 안에 폐하께서 네 처소에 들 것이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결국 네 쓸모는 거기까지라고 알 것이다. 네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거라.]
심창의 그 답신의 내용은 그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하면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 번의 기회.
그 기회를 놓치면 자신은 끝장이다.
이렇게 되면 은송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소문이든 뭐든.
“연비가 예전에 황후로 있을 때 말입니다.”
상궁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큼 은밀하다는 뜻이었다.
*
[은환궁에 자객이 들어 연비를 죽이려 하는 일이 있은 직후에 당시의 태자였던 폐하께서 연비를 태자궁으로 옮겨 보호했다고 합니다. 당시 선황께서는 옹주에 계셨고 말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황후와 태자가 며칠을 같은 처소를 사용했다는 건 구설수에 오르기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선황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금환궁에 연비가 들어 있었고 그 자리에 폐하도 계셨다고 합니다. 화비와 선황만 계셨던 게 아니라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화비가 황제를 죽였다고만 알려져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연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정말 화비가 황제를 죽였을까?
왜 연비는 태후가 되지 못했을까.
지금 황제가 연비를 대하는 태도로 봐서는 둘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황제는 기어이 연비의 국혼을 무효로 이끌어 갔을까.
연비의 태후 책봉은 표면적으로는 대신들의 주청이 있었지만 그걸 승낙한 것은 황제다.
황제는 왜 연비의 국혼을 무효로 하고 그녀를 강인사로 보냈으며 왜 다시 후궁으로 입궁시켰을까.
연비 처소만 찾을 정도로 총애를 쏟을 정도인데 왜 국혼 무효라는 수치스런 일을 그녀에게 내린 것일까.
‘황후였던 당시에 둘이 이미…….’
은송의 의심이 거기까지 미쳤다.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확신일 수밖에 없다.
황제와 연비는 태자와 황후이던 시절 이미 부정한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 거라면 이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지금 이 후궁에 있는 여인들은 전부 구색 맞추기로 들여보낸 것일 수도 있다, 은송 자신을 비롯해서 말이다.
그런 것이라면 이건 억울함을 넘어서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공평한 것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황제의 마음이 이미 연비에게 전부 넘어간 상태에서 황제의 마음을 빼앗으라는 심창의 요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저 허수아비처럼 방실방실 웃고만 있으려고 이 황궁에 들어온 것이 아니야.’
심창의 양녀가 되어 후궁으로 입궁할 결심을 했을 때 이미 은송도 마음에 품은 목표가 있었다.
여인으로 가장 존귀한 자리에까지 올라 보고 싶었다.
단순히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어느 부자나 귀족의 첩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귀 정도를 원한 것이 아니다.
황후, 태후, 황제의 어미.
바라던 것은 그것이다.
한낱 상인의 딸로 태어났으나 초한 전체를 손에 쥐고 싶었다.
아름다운 미모 하나로 나라를 틀어쥔 여인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고사에 경국지색의 미모를 자랑하던 미녀 호예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미모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가 된 여인 호예.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나라의 일을 그 손에 쥐락펴락했다는 그 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은송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장사꾼의 딸로 태어났지만 보다 존귀한 자리에 오르고 싶었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게 하고 싶었다.
장사꾼이었던 생부는 항상 귀족들에게 머리를 굽신거렸었다.
그것이 은송의 눈에는 비굴하게만 보였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 하겠는가.
귀족이 되지 못하면 장사꾼 따위는 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
귀족들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부친을 보며 은송은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생각했었다.
무릎 꿇는 쪽보다는 무릎 꿇리는 쪽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양녀가 되면 황후가 되게 해 주겠다는 심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주이염…… 주은호…….’
은송은 연비, 주은호는 예전에 본 적이 없다.
다만 승상 주이염의 딸이라는 사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이염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부친은 승상 댁에 보낼 물건들을 준비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했었다.
최상의 비단, 장신구들.
그것들은 전부 주 승상의 외동딸인 주은호의 생일 선물로 보내지는 것들이었다.
주승상의 눈에 들기 위해서 동묘의 귀족들이 그때가 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최상의 비단을 선물로 꾸려 주 승상의 집으로 보내는 주문을 은송의 부친에게 넣었다.
거의 동묘의 모든 귀족들이 주이염이라는 사내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그에게 아첨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더 좋은 선물, 더 귀한 선물을 챙기는 것을 보며 은송은 그것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굴도 모르는 주은호가 부러웠었다.
한 귀족은 다른 귀족보다 낮은 질의 물건을 제 이름으로 보냈다며 부친에게 패악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때 그 발 아래에서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던 부친의 모습에 은송은 정이 뚝 떨어졌었다.
그런 삶, 그런 비굴한 삶 따위, 싫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귀족들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황후가 반드시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앞을 가로막는 것은 주은호다.
주은호.
‘그년이 황제의 총애는 독차지해도, 총애가 아들을 낳게 해 주는 보장은 아니니까.’
총애를 아무리 받아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아이가 들어서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아들을 낳는가이다.
그것도 장자를.
장자를 먼저 낳는 것이 자신이라면 황제가 아무리 주은호를 총애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장자 승계가 원칙이니까 말이다.
물론 황후의 몸에서 태어난 장자이겠지만.
아직 황후는 정해지지 않았고 주은호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황후는 될 수 없다.
한 번의 기회.
그 한 번의 동침으로 자신이 주은호보다 먼저 아들을 낳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한 번.’
이미 연비에게 푹 빠진 황제가 자신을 소홀히 할 수는 있겠지만 황제도 사내다.
사내들에게는 욕정이라는 것이 있다.
사내치고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
마음은 주은호에게 주라지.
하지만 마음을 준 여인이 있다 해도 사내라는 것들은 몸은 다른 여인에게도 반응하기 마련이다.
머리가 지조를 지킨다 하여 아랫도리까지 지조가 있는 건 아니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라고 은송이 생각했다.
아랫도리는 요염한 계집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자신 같은.
그때였다.
챙그랑―!
그릇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에 은송이 눈을 들었다.
“무슨 소란이냐?!”
상궁이 얼른 돌아서서 눈초리를 세웠다.
“죄, 죄송합니다!”
찻잔을 들고 들어오던 궁녀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리며 찻잔과 찻주전자가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허둥지둥 깨진 사기 조각들을 줍던 궁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다른 손으로 깨진 사기 조각을 줍는 궁녀에게로 다가간 상궁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얼른 치우지 못하겠느냐?!”
상궁의 호통에 궁녀가 두 손으로 깨진 조각을 치우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욱……!”
깨진 조각을 줍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궁녀가 연신 구역질을 해 댔다.
“죄, 죄송…… 웁…… 죄송합니…… 우웁……!”
“이게 무슨…….”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궁녀를 노려보던 상궁의 표정이 서서히 묘하게 변해 갔다.
그리고 상궁의 시선이 은송을 향했다.
은송의 시선 역시 궁녀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만.”
은송이 상궁을 향해 손짓했다.
궁녀를 가까이 데려오라는 손짓이었다.
“체기라도 있는 것이냐?”
제 앞에 덜덜 떨며 선 궁녀를 향해 은송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녀에게 그리 물으며 문득 은송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체기.
연비에게 체기가 있다고 했다.
어의가 드나들었고, 지금도 드나들고 있다.
체기.
그게 정말 체한 것일까?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