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우복야 심창을 만나고 돌아오던 홍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루였다.
“폐하를 모시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이루가 항상 하진의 곁에 그림자처럼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림자가 지금은 주인의 곁을 떠나 있다.
아무리 황궁 안이라고 해도 이루가 하진의 곁을 비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홍문의 생각이다.
암살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도되는 법이다.
음식 하나, 곁에 두는 내관 한 명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홍문은 지금 이 황궁 안의 누구도 믿지 않고 있다.
아직 황궁에는 선황 대에 선황을 섬기던 자들이 남아 있다.
물론 그들이 선황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던 자들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선황에게 아첨하며 떨어지던 콩고물을 주워 먹고살던 자들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 자들이 새 황제가 즉위하고 더 이상 받아먹을 콩고물이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적은 황궁 밖의 귀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황궁 안의 내관, 궁녀들 역시 적이 될 수 있다.
지금 황궁 안팎의 모두가 하진의 적이 될 수도 있고 하진의 편이 될 수도 있다.
저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인간들이다.
귀족, 대신, 그리고 내관과 궁녀들까지도 전부.
황궁이라는 오래 고립되었던 이 항아리 안은 말끔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수백 년을 찌들어 있던 때를 씻어 낸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그 첫 번째로 지금 하진이 시작한 것은 중앙 관리들의 세대교체다.
즉위 직후 하진은 선황 대에 폐지시켰던 과거제도를 다시 부활시켰다.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대폭 낮추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동묘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귀족 세력들과 싸울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젊고 혁신적이며 아직 정치에 물들지 않은 그런 인재를 찾아내려는 것이 과거의 목적이다.
지금까지 황궁의 병권을 가진 위치에 있는 자들은 모두 갈아 치웠다.
선황의 입김에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모두 한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하진이 오랜 세월 직접 발탁해서 여기까지 함께 온 자들로 대신 세웠다.
시작은 황궁의 병권이지만 이제 곧 나라 전체의 병권의 지휘관들을 교체함으로써 모든 병권을 하진이 손에 쥘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나라 안의 모든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하진의 손에 의해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에 문관들을 물갈이하고, 동묘의 귀족들에게서 실권을 빼앗고, 하진이 조정을 장악한 다음에는 동묘의 귀족들이 지금까지 힘을 휘두를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그들의
‘땅’
을 빼앗아야 한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온갖 명목으로 나라의 땅을 하사받아 사유화했다.
그 땅이 그들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 왔다.
그런 그들에게서 땅을 빼앗을 방법은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들의 땅에 세금을 매겨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면 결국에는 그들은 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땅과 부는 황제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홍문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강력한 황권을 중심으로 각각의 개성을 가진 인재들이 서로의 다양한 의견을 내세우며 세워 나가는 나라다.
그 중심에는 항상 황제가 있어야 한다.
황제는 누름돌이다.
무거울수록 좋다.
강할수록 좋다.
그러나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강한 황제와 폭군,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어려운 것을 해내야 자신의 황제 아니겠는가.
“의논할 것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의논?”
그냥 지나치기에는 이루의 표정이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서 홍문이 결국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실은 홍문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어쩌겠는가.
친구가 의논할 것이 있다는데.
홍문에게는 친구가 없다.
이루가 유일한 친구다.
친구가 없는 이유는, 성격이 지랄맞기 때문이다.
*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사고라도 쳤어? 궁녀라도 임신시켰어?”
홍문이 대뜸 꺼낸 말에 이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뭐야? 설마…… 정말 그런 거야?”
이루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홍문의 눈동자는 더 흔들렸다.
이루는 그저 눈동자가 흔들리는 정도이지만 홍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금방이라도 뒤로 까무러칠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홍문은 자신이 이루를 잘 안다고 자부해 왔다.
이루라고 하는 사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여자 문제’
로 말썽을 부릴 사내는 아니다.
이루는 한눈이라는 것을 파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얼마나 우직한가 하면,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진이 도저히 참지 못할 일이 있어서 선황을 만나러 가려다 이루를 대동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 명령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그렇게 명령을 한 하진이 선황을 만나고 있을 때 하필이면 비가 쏟아진 거다.
비도 보통 비가 아니라 거센 바람을 동반한 거친 폭우가 몇 시간 동안 쏟아졌는데 그 무서운 폭우 속에서도 이루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이 황제와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현무전에서 쫓겨나 현무전의 문 앞에서 황제가 다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밖에서 이루는 바위처럼 서 있었다.
결국 해거름에 들어갔던 하진이 현무전을 다시 나왔을 때는 다음 날 새벽이었는데, 그 새벽까지 이루는 여전히 그 빗속에 서 있었다고 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 긴 시간 동안 버티고 있던 다리도 대단한 다리이지만 무엇보다 그 성격이 그랬다.
다른 생각을 할 줄 모르고, 한눈을 파는 법을 모른다.
가끔 머리는 장식으로 두고 귀만 열어 둔 채로 하진이 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인형 같다는 말로 이루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이루라는 사내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죽는 한이 있어도 변심을 모르는 사내이고, 제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을 지키는 사내다.
그런 사내가 여자 문제? 그것도 황궁의 궁녀를 임신?
홍문의 입장에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정말 그런 거냐고!”
“홍문.”
이루가 심각한 표정을 굳히며 홍문을 쳐다봤다.
“진원 왕자가 자식을 남겼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뭐?”
홍문이 생각한 최대의 사고는 이루가 궁녀와 눈이 맞아 궁녀를 임신시킨 정도였다.
그 정도는 하진이 선처를 하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황제가 공을 세운 장군이나 대신들에게 황궁의 궁녀를 상으로 하사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이름이 이루의 입에서 나왔다.
진원.
하진의 이복형이자 선황의 장자.
“진원 왕자의 자식이라니?”
홍문의 눈매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 아이가 폐하께 걸림돌이 될까?”
홍문은 이루를 잘 안다.
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믿고 경솔하게 말하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말을 했으니, 진원 왕자의 자식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 진원 왕자의 자식이.
“걸림돌이 아니라 화근 그 자체가 될 거다.”
“그러면…….”
“없애 버려야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면. 그래도 죽여야 하는 걸까?”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더욱 죽여야지.”
“여자는. 아이를 품은 여자는?”
“아이만 죽일 수 있다면 아이만 죽이겠지만, 아니라면 같이 제거해야 할지도 모르겠지.”
“그렇군.”
“어떤 여자냐. 궁녀들 중의 한 명이냐?”
“예전에 진원 왕자궁의 궁녀였다 지금은 심 부인 처소의 궁녀가 된 여인인데…….”
“심 부인 처소.”
홍문이 입술을 비틀었다.
“하필이면.”
“만약 심 부인이 그 궁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되지?”
“그야 아이 아비가 누군지 추궁할 거고, 진원 왕자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용하려고 들겠지. 심창과 허연이 손을 잡을 수도 있어.”
“좌복야와 우복야가?”
“그 아이는 허연의 외손주가 될 거다. 진원 왕자는 선황의 장자였고 만약 폐하께 무슨 변고가 생겨 후사가 없이 돌아가신다면 지금 황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누굴까. 다른 친왕들? 황위는 동대 세습을 금하는 국법 때문에 친왕들은 황위를 잇지 못해. 황위는 후대 세습이라 친왕들의 자식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이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지금으로서는 친왕 이훤의 아들이 가장 서열이 높지만 만약 진원 왕자의 자식이 태어나고 모두가 그걸 알게 된다면 당연히 황위 계승 서열에 제일 가까워지는 것은 그 아이가 될 거다. 허연이 그 기회를 놓칠까? 그 절호의 기회를? 아직 폐하께는 황후도 없고 후궁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았고 후사도 없는 이 절호의 기회를 말이야.”
“허연은 그렇다 치고 심창은 왜? 심창은 자기 딸을 황후로 만들고 자기 딸의 몸에서 난 소생을 황제로 만들려고 할 텐데 심창과 허연이 손을 잡겠어?”
“심창의 딸이 황후가 될 리가 없고, 폐하의 자식을 낳을 일이 더더욱 없으면 심창은 무슨 생각을 할까.”
홍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황궁의 이들은
‘천박하다’
고 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는 아니다.
“돌아 버리겠네. 하필 이런 때에 진원 왕자의 자식이라니. 그것도 심 부인 처소의 궁녀라니.”
“내가, 죽일까?”
이루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어떻게?”
“밤에 심 부인 처소로 숨어들어 가서 목을 베어 버리면.”
“심 부인 처소의 궁녀라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름은 알고 있어?”
“견아라는 들었어.”
“견아.”
홍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폐하께는 절대로 말하지 마.”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
“충분히 큰일을 해 줬어.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를 맞을 뻔했으니까.”
“…….”
이루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입술을 닫았다.
위연이 알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지금 그 말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했다.
궁녀는 홍문이 처리할 수 있지만 위연이 얽혀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전하는…….’
위연은 아마 측은지심으로 그 궁녀를 도와주는 것이겠지만, 위연은 철이 없다.
아직 어리다.
그러니까 그 일이 불러올 파장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더라면 위연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알았더라면.
모르면 감싸 줄 수 있어도 알면 감싸 줄 수가 없다.
견아라는 그 궁녀에게는 잔인한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그녀가 가지고 올 그 여파를 알고 있는 이상 동정은 할 수 없다.
자신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루가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자신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