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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54화 (54/108)

54.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심 부인 처소의 상궁이 후다닥 뛰어 들어오던 궁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시,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심부름?”

“네, 심 부인께서 쓰실 물품들 중에 모자라는 것이 있다 하여 경사방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궁녀가 손에 든 것을 보였다.

내미는 바구니 안에는 향품이 담겨 있었다.

“오늘 부인의 심기가 불편하시니 신경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거라.”

“네, 마마님.”

궁녀가 바구니를 들고 기둥 뒤로 돌아갔다.

기둥 뒤로 돌아간 궁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이래저래 심장이 떨어질 뻔한 일이 많았다.

위연과 밀회를 가지고 나오는 길에 황제의 심복인 이루 장군을 눈앞에서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임신한 사실까지 들켰으니 이제 앞으로 자신의 상황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연이 자신을 지켜 주겠다 했으나 황실의 법도를 내세우면 위연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위연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친왕이긴 하지만 황제는 아니다.

‘어쩌지…….’

궁녀 견아가 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이에게 해가 가면 안 되는데…….’

황궁에서 궁녀가 임신을 하면 뱃속의 아이도 죽고 궁녀도 죽는다.

황제의 승은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궁녀는 임신 사실을 들키는 즉시 죽는다.

황제의 앞에까지 끌려갈 필요도 없다.

황후가 있다면 황후의 주관 아래 맞아 죽게 되고, 황후가 없는 지금은 자신의 주인인 심 부인이 저를 죽일 수도 있다.

황궁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가 바로 자신 같은 궁녀다.

더군다나 태중의 아이 아비가 누군지 알려지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이 아이가 저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견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이 아이는 포기할 수가 없다.

황궁의 궁녀들이 목숨을 걸고 임신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승은을 입고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정말 사랑하는 사내의 아이를 품었을 경우다.

견아의 경우는 두 번째였다.

견아는 황제의 그림자도 본 적이 없다.

선황도 지금의 황제도 마찬가지다.

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아비는 죽은 진원 왕자다.

진원 왕자의 처소 궁녀로 있으며 그의 사랑을 받았지만 화비가 무서워 감히 드러내지도 못한 관계였다.

화비는 진원 왕자를 애지중지했었다.

화비를 태후로 만들어 줄, 장차 황제가 될 아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황제가 되어야 할 아들이 한낱 하찮은 궁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 화비의 성격으로 봐서 자신은 벌써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그때는 나에 대한 아바마마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전장의 공으로 상을 내리신다 하면 그때 너를 후궁으로 달라 할 것이다.]

역모를 진압하기 위해 황제와 함께 출정하기 전 진원 왕자는 견아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궁녀는 황제의 소유다.

왕자라 하더라도 궁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려면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진원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때 이미 태중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딸이면 좋겠구나.]

제 배를 어루만지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기고 돌아와 자신을 상으로 달라 하겠다던 그 사내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견아는 그의 주검조차 보지 못했다.

이 황궁에서 누가 그의 주검을 본 사람이 있을까.

들리는 말로는 그의 주검은 옹주에 화장되었다고 들었다.

왕자의 최후로는 너무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화려한 무덤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시신은 온전케 수습해 와서 안장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전장에서 독살당해 죽은 왕자의 주검을 불태우고 그저 유골함에 가루만 담아 가지고 오는 법은 없다.

물론 상황은 이해가 갔다.

진원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선황이 죽임을 당했고 선황의 국장을 치르기에도 바빴을 상황에 옹주와 서북의 반란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진원의 장례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는 변명도 그럴듯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건, 선황을 죽인 화비에 대한 징계가 다분히 들어 있는 처사였다.

화비를 사사하고, 화비 소생의 왕자의 주검은 화장시키고.

그렇게 견아는 혼자 남겨졌다.

진원이 죽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 바뀐 세상에서 견아는 아이를 지키며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누가 이 아이의 아비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길이 막막했다.

진원 왕자가 아비라고 하면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다른 누가 아비라고 해도 아이는 죽는다.

아이가 살 길은 딱 하나 선황의 아이다, 이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선황의 승은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섣부른 거짓말이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점점 불러오는 배를 보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을 때 친왕 위연이 제게 손을 내밀어 줬다.

[진원 형님의 아이냐?]

그는 자신을 바로 알아봤고,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도 바로 알아차렸다.

[아이를 어찌 키우려고 그러는 것이냐.]

처음에는 그를 믿지 못했다.

[나는 진원 형님의 아우다. 그 아이는 내 조카이니 당연히 내가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견아는 예전에 위연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항상 태자 하진과 어울려서 다녔고 진언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진언은 위연에 대해

‘재미있는 아우’

라는 평가를 내리곤 했었다.

[연이는 착한 아이지.]

진원은 다른 왕자들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의 성품이 원래 그랬었다.

그중에서도 진원은 위연을 가리켜

‘착하다’

고 했었다.

그래서 견아는 위연을 믿어 보기로 했다.

물론 그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지금 견아와 태중의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녀 자신이 위연의 첩이 되는 것뿐이다.

[내가 기회를 봐서 차차 형님 전하께 말씀을 드려 볼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희망.

[일단 내 첩으로 들어오면 너는 황궁 궁녀라는 신분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 후에 따로 집을 얻어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황궁을 나가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려고. 내가 너와 내 조카를 전부 책임질 것이니 너는 걱정 따위는 말거라.]

진언이 말한 것처럼, 위연은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황제가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위연이 자신을 도우려 해도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가…… 괜찮아…… 잘될 거야…….’

견아가 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

“아직 배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는 하진을 향해 은호가 행복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하진이 저를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무작정 배부터 만지는 모습에 은호가 자신의 회임을 이 사내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은 회임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의 회임이 하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무서웠다.

그것 때문에 하진이 자신의 회임을 기뻐하지 않는다거나, 싫어할지도, 혹은 거추장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졌다.

“제 회임 때문에 폐하께서 곤란해지실까 염려가 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너는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듣자 하니 먹지를 못한다고.”

“그것이 아니라 냄새에 조금 예민할 뿐, 잘 먹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거라. 너는 내게 너무 부탁이라는 걸 하지 않아.”

하진이 그게 불만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베갯머리 송사도 하고, 이런 것도 해 달라 저런 것도 해 달라 하는 법이다.”

“저는 정말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한 달만 기다리거라.”

“폐하.”

“한 달 후에는 네 회임을 이유로 너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다. 좋은 이유가 되겠지. 황제의 씨를 잉태했으니.”

하진이 손을 뻗어 은호의 어깨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은호야.”

은호가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다.

이 사내가 이렇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이 은호는 가장 행복하다.

자신의 이름을, 은호야 하고 불러 준다.

황제가 아니라 하진이라는 한 사내로 자신을 주은호라고 불러 준다.

이것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다.

“한 달만 참거라.”

“걱정 마시어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정말 필요한 것이 없느냐?”

“그러면…….”

사실 꼭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전부터 부탁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말해 보아라.”

“사비를 궁으로 데려오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사비?”

“제가 사가에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몸종입니다.”

“아, 알겠군. 기억이 나.”

하진이 칠석의 밤 은호와 함께 있던 몸종을 떠올렸다.

은호 또래의 나이였었다.

“사가에서부터 친자매처럼 자라던 사이라 사비가 곁에 있어 주면 무척이나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음도 편할 것 같고…….”

“내일 당장 입궁, 아니다. 오늘 당장 입궁을 명할 것이니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고작 그런 것 하나 부탁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무서웠던 것이냐?”

“무섭지는 않습니다…….”

“이젠 내가 무섭지 않아?”

“네.”

“어쩌다 내가 더는 안 무서운 사람이 되었을까.”

하진이 짓궂게 웃는 것을 보며 은호가 살며시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함께 웃었다.

사랑하는데 무서울 리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 사내를 무섭다 하더라도, 자신은 이 사내가 무섭지 않다.

사랑하니까, 무서움 따위는 없다.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네게 더는 무섭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니, 네게 위엄도 서지 않을 것 아니냐.”

짓궂은 농담을 속삭여 오던 하진이 그녀의 턱을 들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닿았다 떼며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오늘 밤에는 좀 무섭게 굴어 볼까?”

전혀, 무섭지 않은 목소리였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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