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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53화 (53/108)

53.

“달수가 고작 한 달입니다. 조산했다고 핑계를 대면 됩니다.”

홍문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달수가 차기 전에는 배도 부르지 않을 것이고, 배가 부른다 해도 의복으로 가려질 것입니다. 조산이야 흔한 일이고 연비마마는 몸도 허약하시니 조산을 하셨다고 한들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러게, 그걸 못 참고 강인사를 들락거려서 연비를 기어이 회임시켰냐고 화를 내고 싶은 홍문이었지만 지금 화를 내 봤자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의의 말에 의하면 연비가 회임한 것은 아마 강인사가 아닐 것이다.

강인사 이전에, 그러니까 황궁에 있을 때 연비에게 이미 아이가 들어섰던 것이다.

한 번의 관계로도 아이는 들어설 수 있다.

초야에 아이가 들어섰을 것이다, 아마.

“한 달 정도 숨기고 있으면 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한 달 정도 바깥출입을 금하시고 다른 이들과 일절 만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회임 사실이 알려질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한 달이라는 것이지.”

하진도 홍문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에 와서 은호의 회임 사실이 알려져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 이유는 없다.

하진은 은호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선황의 아이라는 의심을 받는 것도 싫고, 은호가 황후로 있을 때 태자와 간통을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하기도 싫다.

자신이 손가락질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모든 비난이 은호에게 가는 것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어의는 입을 다물 것이고 연비전의 궁녀들의 입단속만 시키면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습니다, 폐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홍문이 하진을 슬쩍 눈으로 흘겼다.

“다른 후궁들도 돌아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불만이 없을 테니까요.”

“불만을 좀 가지라고 그래.”

“폐하. 우복야 심창의 딸은 대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우복야와 그렇게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한 약속이겠지.”

“폐하. 연비마마를 후궁의 명단에 넣는 것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을 막아 준 것이 심창입니다.”

“그 딸을 후궁으로 삼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후궁으로 삼아 줬다.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폐하.”

홍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눈에는 내가 씨나 퍼뜨려 주는 종마로 보이는 것이냐? 황제가 언제부터 종마로 전락했던 것이냐? 황제가 언제부터 좌복야 우복야 따위의 눈치나 보는 자리였지?”

“평화롭게 가자는 것입니다. 굳이 대립각을 세워서 피를 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평화롭게. 내 생각에는 그게 절대로 평화롭지 않은 것 같은데? 홍문아.”

하진이 일어섰다.

“평화라는 것은, 한쪽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평화롭다고 하는 것이다. 힘이 비등비등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꾸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평화라는 건, 그런 의견이나 욕심 따위가 아예 고개를 들지 못하게 절대적인 힘으로 짓눌러 버리는 것이다. 알겠느냐? 황제에게 그 정도의 힘은 있어야 나라가 평안하지 않겠느냐.”

하진의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귀족들과의 거래는 없다는 뜻이다.

“폭군이 되실 겁니까?”

선황의 시대는 그랬었다.

폭군이 군림하는 시대는 목숨이 두려워 누구도 충언을 하지도 않고, 또 누구도 감히 역심을 품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평온해 보인다.

폭력에 의한 평화다.

그러나 홍문은 폭군의 시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폭군의 시대라면 선황의 시대로도 족했다.

“폭군이 아니라 강한 황제가 되겠다는 듯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의견을 꺾을 줄 모르면 폭군입니다.”

“내가 폭군이라면 네 목부터 잘랐을 거다.”

“아, 폐하를 폭군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저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겠네요.”

참 말을 안 듣는 황제다.

“회임한 여인에게는 뭐가 좋은 거지?”

“회임을 안 해 봐서 모르겠습니다, 폐하.”

“해 봤으면 끔찍한 거지.”

“폐하.”

“나는 바쁘니 네가 심창을 달래 주던 심창의 딸 앞에서 재롱을 부리던 마음대로 하거라.”

“폐하.”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나가 버린 하진을 노려보던 홍문이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애초에, 자신의 손에 잡힐, 휘둘릴 사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휘둘리지 않을 강함이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주군으로 결정한 것이지만 그 필연적인 열매로 이런 어이없는 상황은 항상 달고 다녀야 한다.

“…….”

홍문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눈길을 줬다.

승상 주이염이 하진에게 올린 사직 상소다.

아직 처리는 하지 않았다.

“사직이라…….”

그 몸을 가지고 조정에 나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주이염이 사라지면 조정은 심창과 허연의 이파전이 되는 것일까?’

하지만 허연은 화비의 죽음으로 날개가 한 번 꺾였다.

화비는 선황을 시해한 죄로 죽임 당했다.

그건 역모다.

비록 역모의 죄에서 비껴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허연의 날개를 꺾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선황의 죽음과 함께 권력의 비탈길로 내려갈 줄 알았던 주 승상이, 그 딸이 다시 후궁으로 입궁하며 다들 주 승상의 권력이 부활할 것이라 여겼지만 주이염이 사직 상소를 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남은 것은 심창이다.

주이염과 허연이 건재할 때 심창은 그 두 사람의 그늘에 눌려 힘을 쓰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오랫동안 범들의 위세에 눌려 있던 교활한 여우가 이때를 놓칠 리가 없다.

조정에 누구 하나 하진의 편은 없다.

물론 선황의 편도 없었다.

정치에서

‘편’

을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힘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편이 정해진다.

오늘 내 편이었다고 해서 내일도 내 편이라는 보장은 없다.

조정의 대신들이, 동묘의 귀족들이 그렇다.

오른손을 잡고 왼손으로 비수를 찌를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들을 전부 자르고 내친다면 그것은 폭군이나 다를 바 없다.

폭군이 나라를 풍요롭게 다스린 예는 없다.

하진은 폭군이 아니라 현군이 되어야 한다.

그를 미워하고, 그를 대적하고, 그의 등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까지도 손에 휘감고 또 이용해서 원하는 대로 끌고 나갈 수 있는 그런 현군이 되어야 한다.

교활한 여우든, 승냥이든, 늑대든 뭐든 간에 그 발 아래에 꿇리고 그 모든 자들을 한 손에 잡고 끌어갈 수 있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

선황은 그에 맞서는 자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고 폭력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 끝은 초라했다.

하진은 달라야 한다.

하진의 끝도 선황과는 달라야 한다.

“심창을 만나 볼까…….”

홍문이 주이염의 사직 상소를 제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아직 주이염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진과 홍문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쩌면 이걸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창에게 그럴듯한 것을 대신 줘야 하는 마당에, 주이염을 판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는 어차피 사직하고 낙향할 인물인데.

*

“앗…….”

금군의 숙직실에서 나오던 위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루를 발견하고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지은 죄가 있어서 위연이 이루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얼굴을 숙였다.

“전하.”

뒷짐을 지고 서서 이루가 위연을 불렀다.

“어째서 그곳에서 나오시는 것입니까?”

“그, 그건…….”

위연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친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전하의 행동 하나하나가 폐하의 입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게, 음…… 그러니까…….”

그때 조금 전 위연이 나온 숙직실에서 한 궁녀가 주위를 살펴보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다 말고 이루와 위연을 보고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내가 홍문과 의논을 하려고 했는데 홍문이 너무 바빠 보이고 형님 폐하도 바빠 보여서 의논도 못 하고…….”

“전하.”

이건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다.

황제의 동생인 친왕 위연이 황궁의 궁녀와 정을 통한 것이다.

황궁의 궁녀는 모두 황제의 소유물이나 다를 것이 없다.

궁녀들은 입궁할 때 순결을 서약하고 들어온다.

궁녀에게 있어서 사내는 황제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하는 궁녀는 평생 처녀로 늙어야 한다.

한 번 입궁해서 궁녀가 되면 중한 병이 들거나 죽기 전에는 출궁하지 못한다.

궁녀로 들어와 황제의 승은을 입지 못한다 해도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친왕 위연이 궁녀와 정을 통했다.

황궁의 법으로 다스리면 궁녀는 사형이고 위연에게는 근신의 벌이 내려져야 한다.

이루가 덜덜 떨고 있는 궁녀를 힐끗 쳐다봤다.

궁녀의 아랫배가 조금 불러 있었다.

“전하. 몇 개월이나 되었습니까?”

이루가 봐도 회임한 것이 분명했다.

“다, 다섯 달 정도…….”

“어떻게 하려고 하신 겁니까.”

“형님 전하께 말씀을 드리고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 볼까 했는데 형님께 그런 사사로운 것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아이가 철이 없어서. 말도 행동도 가벼운 아이라서…….]

이루가 문득 강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강비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다섯 달이면 아직 강비가 황궁에 있을 때다.

[혹시나 그 아이가 큰 실수를,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그 아이를 끝까지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예감해서 강비는 그런 부탁을 해 왔을 것이다.

강인사에서 하진을 도와준 것도, 연비를 도와준 것도 이런 일을 대비해서 아들을 위해 그런 것이리라.

“어느 궁의 궁녀입니까?”

이루는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른다.

우연히 위연을 봤고, 위연이 숙직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여겨 따라온 것뿐이다.

오늘 위연이 입궁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입궁했으면 당연히 하진을 만났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위연은 숙직실에 갈 이유가 없다.

그곳은 금군들이 밤을 보내는 곳이다.

낮 동안에는 비어 있다.

낮 동안 비어 있는 장소를 사내가 찾는 이유는 하나다.

여인과 정을 통하기 위해서다.

황궁 안에서.

“예전에 진원 형님의 처소 궁녀였는데…….”

예전 진원 왕자의 처소 궁녀였다는 여자.

“지금은 연환궁 심 부인의 궁녀로 보내졌어.”

예전에는 진원 왕자의, 그리고 지금은 심 부인, 즉 심창의 딸의 궁녀로.

하필이면 심 부인의 궁녀다.

이번에야말로 위연이 제대로 사고를 친 것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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