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연비마마를 뵈옵니다.”
제 앞에 무릎을 꿇는 부친을 향해 은호가 얼른 다가앉았다.
“아버님.”
사실 아침부터 은호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오늘 부친을 만난다는 생각에 내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알현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치 십 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부친의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위태로워 보이던 그 모습이 꼭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강인사에 있는 동안에도 은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어서 마음은 더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 하진의 허락이 떨어졌다.
부친을 만나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부친 주이염에게 연환궁의 출입이 허락된 것이다.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외간 사내가 연환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죽은 화비의 경우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부친인 허연을 연환궁 안으로 마음대로 출입하게 했지만 원래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화비가 연환궁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그랬던 화비가 한순간에 몰락했으니 그 역시 화무십일홍의 좋은 예였다.
“얼굴이 왜 이러세요?”
부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못 본 사이에 부친의 얼굴은 그야말로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
비쩍 여위어 광대뼈가 드러날 지경이 되어 있는 부친의 얼굴은 누가 봐도 병색이 짙었다.
“어디가 편찮으신 건가요?”
“늙으니 병이 드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마.”
주이염이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오늘 주이염은 이곳에 오기 전 하진을 만나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병든 몸으로 더는 승상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사직을 윤허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아직 황제의 윤허는 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주이염은 요즘 바깥 거동이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이미 의원은 주이염의 병에서 손을 뗐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며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의원의 권고였다.
요즘 주이염이 먹고 있는 약은 홍문이 지어 인편에 보낸 약이다.
독으로 독을 치료해 보자며 홍문이 직접 약을 지어 주이염에게 보낸 것이다.
실제로 그 약이 도움이 된 것인지 한 달 전에 의원이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한 것에 비하면 주이염은 아직도 살아 있다.
더는 각혈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몸 안으로 독을 집어넣는 것이라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살이 빠지고 전신의 무기력함이 따라붙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자신의 몸이 죽어 가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다시 되살아나기 위해 앓고 있는 것인지 그건 주이염도 모른다.
독으로 병을 이기더라도 그 독이 몸을 죽일 수 있다며 홍문은 경고를 덧붙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는 약을 받아먹은 것은 어차피 죽는 거라면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자신이 죽으면 은호는 세상에 혈육 하나 없는 혼자가 된다.
물론 하진이 은호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호를 지켜 주겠지만, 이건 아버지의 마음이다.
딸을 혼자 두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지내시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마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아버님 자신을 챙기셔야지요…… 저는 이제 아버님밖에 없는데…….”
은호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보며 주이염이 인자하게 웃었다.
“마마. 마마께서 허락하시면 시골로 내려가 요양을 해 볼까 하옵니다.”
“요양이요?”
“폐하께도 이미 말씀을 올렸습니다. 승상의 직무를 내려놓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요양을 하며 잠시 몸을 돌보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쉼 없이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조정이 어수선한 이때에 물러나는 것이 신하로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물러날 때를 알아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버님. 아버님께는 휴식이 필요해요.”
“마마께서 입궁하신 지금이 제가 제일 힘이 되어 드려야 할 때인데, 이런 때에 곁을 지켜 드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은걸요.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아버님.”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마.”
제 손을 잡아 주는 딸을 바라보며 주이염의 머릿속이 오랜만에 맑아졌다.
자신은 그동안 괜한 걱정을 해 왔던 것일 수도 있다.
주이염은 자신이 없으면 누구도 은호를 지켜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은호를 온실 속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주이염이 겪어 온 세상은 잔인하고 험악한 곳이다.
먹지 않으면 먹히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었다.
그런 세상 속으로 은호를 던져 놓으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자신의 보호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누구도 자신만큼 진심으로 은호를 지켜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변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은호를 지켜 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진은 그의 목숨을 걸고 은호를 지켜 줄 것이다.
홍문 역시 간교한 자이지만 하진을 위해서 은호를 지켜 줄 것이다.
홍문은 적이 되었을 때는 위험한 자이지만 같은 편이 되었을 때는 그보다 더 든든한 자가 없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은호는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의 은호였다면 자신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무섭다고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은호는 울지 않는다.
자신을 보고 걱정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표정에 두려움은 없다.
예전에 처음 황궁에 입궁했을 때의 은호는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두려움에 질식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었지만 지금의 은호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은 발견할 수 없다.
어느새 딸은 달라져 있다.
세상의 바람을 맞으며 딸은 조금은 자란 것이다.
바람이 없는 온실 속에서는 안전하게 자랄지 모르지만 결코 강하게 자라지 못했던 딸은, 이제 세상으로 내몰려 모진 바람을 맞으며 전에 없이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리어 저를 걱정하는 말까지 해 준다.
자기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혼자가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은호가 주이염의 눈에는 그저 기특하게만 보였다.
언제까지 품 안의 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아비의 품을 떠날 준비가 끝난 것이다.
“푹 쉬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저도 그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네, 마마.”
잠시 망설이던 주이염이 소매 안에서 곱게 접은 서신을 꺼냈다.
서신은 밀봉되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버님.”
“혼자 적적하여 옛날 생각도 나고 하여,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어 본 것입니다. 무료하실 때 읽어 보십시오, 마마. 이 못난 아비가 마마께 드릴 것은 고작 이런 것밖에는 없습니다.”
“아버님…….”
주이염이 건네주는 서신을 받아 든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별하는 마당에 부친이 쓸데없는 것을 줄 리는 없다.
분명,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은호가 확신했다.
*
연비전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은 주이염이 다녀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건 정말 작고 사소한 소란이었다.
어의가 다녀가긴 했지만 부친과 작별하며 그 슬픔이 너무 컸던 연비가 급체를 하는 바람에 약을 지어 주고 침을 놓는 것으로 일은 해결되었다고 했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알려졌다.
“틀림없는 사실이냐?”
어의를 앞에 둔 하진이 사뭇 험악한 눈으로 어의를 노려봤다.
젊은 새 황제 앞에 겁먹은 채로 엎드린 어의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연비마마께 분명 태기가 있으셨습니다.”
실은 연비전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란이란 점심 수라를 받은 연비가 음식을 앞에 두고 헛구역질을 한 것이다.
어의가 바로 불려 갔고 연비를 진맥한 결과
‘회임’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의의 입에서 회임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연환궁의 책임 상궁 가연이 곧장 금환궁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즉시로 달려온 것이 금환궁의 태감이었다.
태감이 어의를 데리고 금환궁으로 왔고 어의 앞에 황제 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는 어의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후궁이 황손을 회임했다,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후궁이 황손을 잉태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황제의 장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아들일 경우에.
황제의 아들을 낳으면 그 후궁은 황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황후가 되면 그 아들은 자연히 태자가 되고 차기 황제가 된다.
그러니 연비의 회임은 당연히 큰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연비가 입궁한 지 이제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입궁 첫날 황제의 시중을 들고, 다음 날 연비의 첩지를 받고, 그리고 오늘 회임을 확진받았다?
교합하고 나서 사흘 만에 회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연비의 회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연비가 품은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
즉, 연비가 강인사에 있을 때 외간 사내와 통정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연비가 강인사에서 통정한 사내가 현 황제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임 시기로 미루어 봐서 만약 연비의 태중 아이의 아비가 황제라면, 황제와 연비는 강인사가 아니라 아직 연비가 황궁에 있을 때 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연비가 황후였고 황제가 태자였던 시기에 두 사람이 관계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이건 황궁이 뒤집히는 정도가 아니다.
세 번째의 경우도 있다.
만약 연비가 외간 사내와 통정한 적이 없다고 나온다면 연비 태중의 아이 아비는 선황이 된다.
즉, 선황과 동침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 무효가 된 연비가 다시 태후로 복위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는 연비와 동침했다.
그런 연비가 태후가 된다면, 그 역시 분란이 일 것은 뻔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