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51화 (51/108)

51.

“뭘 그리 보고 있는 것이냐.”

은호는 하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친 나머지 축 늘어진 몸으로 제 품에 안긴 은호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하진이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 까닭이다.

흰 어깨 위로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살결을 두드러지게 만들어서 물어뜯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그녀의 살결 곳곳에 그가 물어뜯은 흔적이 붉은 꽃처럼 흐드러져 있었다.

은호만 보면 하진은 자신이 탐욕스러운 짐승이 되는 것을 느낀다.

죽은 아비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음을 여실히 느껴 버리고 만다.

하진을 두렵게 만드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은 아비를 닮아 버리는 것이다.

하진은 아비를 미워했다.

미움을 넘어서서 증오, 증오를 넘어서서 그것은 적당한 표현조차 찾기 힘들 정도의 감정이었다.

부자의 정, 혈육의 정.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아비의 죽음 앞에서도 연민 한 조각 찾아낼 수가 없었다.

만약 화비가 아비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기어이 제 손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진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소원은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아비의 손과 발의 힘줄을 잘라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고 그 보는 앞에서 그가 쌓아 온 모든 것을 찢고, 망가뜨리고 불사르고 싶었다.

절대로 쉽게 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발 죽여 달라고 그 입에서 애원이 나와도 절대로 쉽게 죽여 주지 않으면서 그가 잘못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의 입으로 자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종말에는 제 두 손으로 그 늙은 목을 졸라 죽는 순간 그 추악한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 하진의 바람이었다.

물론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화비에 의해서든 누구에 의해서든, 아비가 죽은 지금 하진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그 피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아비의 피가 자신의 몸에도 흐르고 있다.

자신의 몸에는 모친의 피가 절반, 그자의 피가 절반 흐르고 있다.

하진은 자라나면서 부황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물론 그 말을 제일 싫어했었다.

하지만 싫어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아비의 잔인함, 아비의 탐욕, 아비의 이기심이 제 안에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에 있는 그 탐욕의 뿌리가, 그 잔인함의 뿌리가 아비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아비처럼 괴물이 되지 않을까, 하진은 그것이 두렵다.

이 황궁에는 괴물들이 살고 자신 역시 그 괴물 중의 하나다.

아니, 자신은 괴물 중의 괴물일 수도 있다.

두려운 것은 괴물이 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자신이 은호를 망가뜨리는 것.

자신이 은호를 다치게 하는 것.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지만 그녀를 안을 때마다 사나운 짐승이 되는 자신을 보며 그때마다 불안감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이 은호의 방패가 되어 주고, 은호의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안에서 은호가 숨 막혀 죽어 가지 않을까 무섭다.

이 두려움은 이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것이 처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고 주은호가 처음이다.

단 하나의 사랑이라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뭐가 있는 것이냐?”

“그림자를 보고 있어요.”

“그림자?”

은호의 대답에 하진이 벽에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대로 맞은편 벽에는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림자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두 명인데, 그림자는 하나예요. 보세요.”

촛불에 비친 그림자가 한 덩어리로 보였다.

당연한 것이다.

그림자는 분리되어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제 모습도 폐하의 모습도 아닌 그림자예요.”

“그게 신기해서 보고 있는 것이냐?”

“그냥…… 그럴 뿐이에요…….”

은호가 몸을 돌려 하진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하진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는 각각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하진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을 때의 그림자는 하진의 그림자도 아니고 자신의 그림자도 아니다.

그것을 보며 은호는 지금 하진과 자신이 그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진이라는 사내가 있고 주은호라는 자신이 있다.

각자 살아온 삶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살아가고픈 삶의 이유가 다른 자신들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은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때는 같은 모습이 된다.

하진도 아니고 주은호도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하나가 된다.

자신도 지금까지 살아오던 자신과는 또 다른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또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하진도 자신을 위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하진과 자신은 지금 변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변하는 모습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진은 저쪽에서 자신은 이쪽에서, 서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이 변화를 설명해도 좋을까.

서로에게 가까워질수록,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멀어질수록 자신들은 서로에게 더 스며들고, 서로를 더 닮아 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지며 전혀 새로운 모양의 그림자가 되는 것처럼 하진과 자신도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이제 함께이기에 조금 더 달라진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용기를 내기로 다짐한 것은 그 시작일까.

“주 승상이 보고 싶지는 않으냐?”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은호의 등을 어루만지며 하진이 중얼거렸다.

“아비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그 말에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호야?”

그것이 이상하여 하진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왜 빨리 아비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이런.”

그리고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은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를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그녀가 대답도 못 하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참 부러운 부녀의 정이다.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애틋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하진은 그저 신기했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부녀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부녀 관계.

자신은 결코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은호가 회임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만약 아들이라면 그 아이와 자신의 관계는 어떤 관계가 될까.

제 아비와 저처럼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가 될까 아니면 은호와 주 승상처럼 서로를 극진하게 아끼는 관계가 될까.

아직은 모른다.

황궁은 아비와 아들을 서로 잡아먹게 만든다.

이 황궁의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를 미워하지 않은 부자는 없다.

이 황궁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아비를 죽이지 않은 자식은 없고 자식을 죽이지 않은 아비도 없다.

그 저주가 자신을 비껴 나갈까?

자신은 그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황궁에는 살이 끼어 있다.

혈육끼리 잡아 죽이게 만드는 살이 황궁에 자리 잡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자식은 그 살에 잡아먹힐까 아니면 그 살을 떨쳐 낼까.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지만 그 살에 잡아먹힐 생각은 없다.

자신은 적어도, 자식을 죽이는 아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자식을 미워하는 아비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주 부인이라는 봉호로 입궁한 지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 은호는 후궁들 중 제일 처음으로 첩지를 받았다.

[주이염의 여식 주은호에게 귀비의 첩지를 하사하고, 봉호는 연이라 칭할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내린 교지를 가지고 연환궁으로 온 태감이 교지를 읽어 내려갈 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후궁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귀인이나 빈의 단계를 뛰어넘어 곧장 귀비의 첩지를 내린 것도 파격적인데

‘연’

이라는 봉호까지 내린 것이다.

황제가 첩지를 받은 후궁에게 사사로이 봉호를 내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극진한 총애를 받는 후궁들이나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은호는 주 부인으로 입궁하여 아름다울

‘연(嬿)’

자를 사용하는 연비가 되었다.

아름다울 연.

지극히 아름다운 후궁이라는 뜻의 봉호를 받은 은호를 바라보는 다른 후궁들의 눈에 살벌함이 떠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분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심창의 딸 심은송이었다.

소매 안에서 은송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별것도 아닌 것이…….’

주이염의 딸이 미인이라는 소문은 은송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미인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 은송도 귀가 따갑게 미인이라는 말을 들어 왔었다.

주은호는 그저 수수한 미인에 불과하다.

꽃으로 치면 화려하지 않은 수선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신은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목단꽃이다.

꽃 중의 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나 어울리는

‘연’

이라는 봉호를 저 주은호가 가져갔다.

‘두고 보라지. 나는 더 화려한 봉호를 받아 낼 테니까.’

심은송이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를 간 것은 은송만이 아니었다.

어제 함께 입궁한 모든 후궁들이 그러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녀들의 마음에는 이미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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